지난 3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의 ‘미디어 갤러리’에서 열린 ‘미래 한국의 좌표, 독일서 찾다’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싱크탱크 광장]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2014 베를린 사회포럼’
노조의 힘이 강력한 독일에는 왜 격렬한 투쟁 현장이 없을까. 독일은 모든 전쟁범죄에 대해 ‘자발적 청산’에 나섰을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5년이 흐른 지금, 동서독 사람들의 마음속 장벽도 모두 허물어졌을까.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소장 이창곤)는 지난 6월28일부터 7월4일까지 드레스덴과 베를린 등 독일의 5개 도시를 돌며 이 나라 복지제도와 노사관계 및 통일의 현장을 탐방한 ‘2014 베를린 사회포럼’ 행사를 진행했다. 지난 3일 저녁(현지시각)에는 베를린의 ‘미디어 갤러리’에서 ‘미래 한국의 좌표, 독일서 찾다’란 주제로 종합토론회를 열었는데, 이 마무리 행사에는 포럼 참가자들은 물론 현지 교민과 연구진 등 40여명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1세대 파독 간호사부터 현지의 시민운동가, 베를린자유대학 교수 등 발제자들은 독일의 장점은 수용하되 한계는 넘어서는 ‘한국 모델’의 필요성을 이구동성으로 강조했다.
“독일선 노동이 사회의 기본”
국제 노조간부 교육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독일에 머물고 있는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장은 최근 한 다국적기업의 파업 현장을 방문했던 체험을 털어놨다. 노조의 힘이 막강하다고 하니 “기대를 갖고” 찾아갔지만, 긴장감이 돌기는커녕 그저 연설하고 조용히 토론만 하는 ‘싱거운’ 곳이었다고 한다. “독일의 노조는 산업별(산별) 노조 체제가 형성되어 있으니 개별 기업이 치열하게 싸울 이유가 없고, 현장에는 종업원평의회가 있어 노조 활동도 보장돼요. 또 노사 공동결정제도가 있으니 사용자와 노조 대표가 항상 논의가 가능한 구조인데다, 해고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고 사회보장제도도 잘 갖춰져 있고요. 격렬히 싸우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는 거죠.”
이 단장은 독일 노동운동의 핵심으로 산업별 노조를 꼽는다. 독일은 각 사업장을 넘어 산업별로 노조가 형성되어 있고, 높은 수준의 조직률과 이에 바탕한 강한 교섭력으로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해왔다. 산별노조와 종업원평의회를 통해 노동자들이 겹겹이 보호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처럼 치열한 투쟁이 필요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는 “우리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더해도 150만명에 불과하고, 가장 큰 산별노조인 금속노조 조합원이 15만명이다. 독일은 개별 산별노조에 200만명 이상의 조합원이 소속되어 있다. 예산이 수조원에 이르고 상근자가 수백명이 되는 산별노조가 규모의 경제를 갖고 노-사 관계와 노-정 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거대한 산별노조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니 노동자가 존중받고 노동을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노동이 사회의 한 분야라면 독일은 노동이 사회의 기본”이라며 “노동시장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 등 한국 노동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기업별 노조를 넘어 산별 노조로 나아가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 좌표, 독일서 찾다’ 종합토론
노동자 겹겹이 보호받는 구조
한국처럼 치열한 투쟁 필요없어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2014 베를린 사회포럼’
나치 과거청산 성공적 진행 불구
집시 학살 등 미해결 과제도 많아
통독 이후 사회통합 평가 엇갈려
“남북한, 독일보다 상황 심각할 것” 여전히 진행중인 과거청산 독일 베를린에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박물관, 추모비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독일은 나치에 협력한 전범들을 끈질기게 추적해 처벌한 것은 물론, 다양한 장치를 통해 ‘추악한’ 과거를 반성하고 되새기며 끊임없이 과거사 청산 작업을 이어왔다. 하지만 독일의 이런 성찰이 전쟁 직후부터 ‘성실히’ 이뤄진 것은 아니다. 1960년대까지는 나치 출신들이 당시 서독 사회 요직에 두루 포진해 있었다. 과거청산보다는 경제적 재건에 몰입하던 독일 사회를 일깨운 이들은 이른바 독일의 ‘68세대’이다. 독일에서 한국 위안부 피해를 알리는 일본인 사진가 야지마 쓰카사는 이날 토론회에서 “1968년 학생운동 하던 사람들이 자기 부모님 또는 할아버지·할머니가 나치 때 무슨 일 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독일의 진정한 과거청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치 친위대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들 역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집행한 ‘공범’이라는 문제의식이다. 그는 이때부터 ‘아래로부터의 성찰’이 본격화됐고, 68세대가 1980년대 들어 사회 주요세력으로 자리하면서 교육 프로그램 강화, 강제노동자 배상 등 구체적인 청산작업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독일이 모든 차원의 과거청산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과 함께 집시 역시 50만명 넘게 학살됐지만 이에 대한 배상이나 사과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990년대 독일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난민촌을 담당한 적이 있다는 한미순 독일기독교대학 강사(사회복지학)는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피해 온 집시들은 쫓아내고, 경제적 문제로 러시아에서 독일로 건너온 유대인들에게는 곧바로 영주권과 모든 사회보장 혜택을 누리게 해줬다. 유대인들의 로비와 힘이 없었다면 자발적인 과거청산을 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야지마 쓰카사도 “나치가 아닌 일반 군대도 폴란드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지만, 이에 대한 청산은 아직 안 되고 있다. 나치 외 다른 면에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통일 뒤 사회통합 고민해야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홀머 브로흘로스 베를린자유대학 교수(한국학)는 4개의 완전히 다른 체제를 경험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동독의 한 소도시에서 태어나 북한 김일성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통일 독일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살게 됐고, 이후 남한의 한국외국어대학에서 3년간 교수 생활을 했다. 그는 이 가운데 가장 힘겨웠던 시기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부터 통일이 공식선언된 1990년 10월까지 1년여의 기간”을 꼽았다. 독일 통일이 서독 주도의 ‘흡수통일’ 형식으로 급격히 진행되면서, 그를 비롯한 동독 사람들은 그들의 살아온 문화와 가치관, 생활양식을 통째로 바꿔야 했다. 브로흘로스 교수는 “통일되고 나서 처음엔 매우 이질적이고 (적응이)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25년이 지나면서 경계는 흐릿해지고 현재는 동서독 문제보다는 독일의 남북 경제력 차이가 더 큰 이슈가 됐다고 강조했다. 반면 독일의 사회통합과 유럽에 정착한 탈북자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이희영 대구대 교수(사회학)는 “통일 이후에도 동서독의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잘라 말했다. 여전히 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금기시하는 주제가 되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공적 영역에서 동독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순간, ‘게으르고 찌질한 동독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이 문제를 밝히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통일 독일 사회통합의 ‘완성도’에 대해선 브로흘로스 교수와 이 교수의 의견이 달랐지만,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이 교수는 “유럽으로 건너온 탈북자들을 만나 연구하고 있는데, 이들은 남한에서의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견디지 못해 떠나온 이들이다. 남북 통일이 되면 독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브로흘로스 교수는 “북핵 포기를 전제조건으로 걸어서는 안 되고, ‘햇볕정책’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베를린/글·사진 최혜정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 idun@hani.co.kr
한국처럼 치열한 투쟁 필요없어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2014 베를린 사회포럼’
나치 과거청산 성공적 진행 불구
집시 학살 등 미해결 과제도 많아
통독 이후 사회통합 평가 엇갈려
“남북한, 독일보다 상황 심각할 것” 여전히 진행중인 과거청산 독일 베를린에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박물관, 추모비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독일은 나치에 협력한 전범들을 끈질기게 추적해 처벌한 것은 물론, 다양한 장치를 통해 ‘추악한’ 과거를 반성하고 되새기며 끊임없이 과거사 청산 작업을 이어왔다. 하지만 독일의 이런 성찰이 전쟁 직후부터 ‘성실히’ 이뤄진 것은 아니다. 1960년대까지는 나치 출신들이 당시 서독 사회 요직에 두루 포진해 있었다. 과거청산보다는 경제적 재건에 몰입하던 독일 사회를 일깨운 이들은 이른바 독일의 ‘68세대’이다. 독일에서 한국 위안부 피해를 알리는 일본인 사진가 야지마 쓰카사는 이날 토론회에서 “1968년 학생운동 하던 사람들이 자기 부모님 또는 할아버지·할머니가 나치 때 무슨 일 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독일의 진정한 과거청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치 친위대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들 역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집행한 ‘공범’이라는 문제의식이다. 그는 이때부터 ‘아래로부터의 성찰’이 본격화됐고, 68세대가 1980년대 들어 사회 주요세력으로 자리하면서 교육 프로그램 강화, 강제노동자 배상 등 구체적인 청산작업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독일이 모든 차원의 과거청산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과 함께 집시 역시 50만명 넘게 학살됐지만 이에 대한 배상이나 사과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990년대 독일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난민촌을 담당한 적이 있다는 한미순 독일기독교대학 강사(사회복지학)는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피해 온 집시들은 쫓아내고, 경제적 문제로 러시아에서 독일로 건너온 유대인들에게는 곧바로 영주권과 모든 사회보장 혜택을 누리게 해줬다. 유대인들의 로비와 힘이 없었다면 자발적인 과거청산을 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야지마 쓰카사도 “나치가 아닌 일반 군대도 폴란드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지만, 이에 대한 청산은 아직 안 되고 있다. 나치 외 다른 면에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통일 뒤 사회통합 고민해야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홀머 브로흘로스 베를린자유대학 교수(한국학)는 4개의 완전히 다른 체제를 경험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동독의 한 소도시에서 태어나 북한 김일성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통일 독일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살게 됐고, 이후 남한의 한국외국어대학에서 3년간 교수 생활을 했다. 그는 이 가운데 가장 힘겨웠던 시기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부터 통일이 공식선언된 1990년 10월까지 1년여의 기간”을 꼽았다. 독일 통일이 서독 주도의 ‘흡수통일’ 형식으로 급격히 진행되면서, 그를 비롯한 동독 사람들은 그들의 살아온 문화와 가치관, 생활양식을 통째로 바꿔야 했다. 브로흘로스 교수는 “통일되고 나서 처음엔 매우 이질적이고 (적응이)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25년이 지나면서 경계는 흐릿해지고 현재는 동서독 문제보다는 독일의 남북 경제력 차이가 더 큰 이슈가 됐다고 강조했다. 반면 독일의 사회통합과 유럽에 정착한 탈북자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이희영 대구대 교수(사회학)는 “통일 이후에도 동서독의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잘라 말했다. 여전히 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금기시하는 주제가 되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공적 영역에서 동독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순간, ‘게으르고 찌질한 동독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이 문제를 밝히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통일 독일 사회통합의 ‘완성도’에 대해선 브로흘로스 교수와 이 교수의 의견이 달랐지만,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이 교수는 “유럽으로 건너온 탈북자들을 만나 연구하고 있는데, 이들은 남한에서의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견디지 못해 떠나온 이들이다. 남북 통일이 되면 독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브로흘로스 교수는 “북핵 포기를 전제조건으로 걸어서는 안 되고, ‘햇볕정책’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베를린/글·사진 최혜정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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