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경희대 교수
이택광 경희대 교수 “진보는 다시 일상으로 가야”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싸가지 없는 진보론’을 둘러싸고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에 던질 메시지(콘텐츠)가 없다는 것”이라고 반박한 데 이어, 이번에는 문화비평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진보의 위기는 싸가지나 콘텐츠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강 교수의 ‘싸가지론’과 진 교수의 ‘메시지론’ 모두를 반박하고 나섰다.
이 교수는 3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우선 강준만 교수의 ‘싸가지 없는 진보론’(관련 기사: 강준만 “잘난 척만 하는 ‘진보’는 필패다” )에 대해 “강 교수의 진단은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이에게 또 독을 먹이는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강 교수의 ‘싸가지론’은 진보의 규범을 재정립하자는 것일 텐데, 지금의 문제는 보수가 포퓰리즘을 선점해버린 것”이라면서 “보수는 이익 달성을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하지만 진보는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이걸 공동선 혹은 도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보수는 ‘이것이 우리 이익이니 우리가 하자는 대로 하면 너희도 잘 된다’는 식이고, 진보는 ‘이게 공동선인데 이걸 하지 않으면 너는 나쁜 놈’이라는 식의 선악 논리를 구사하면서 도덕 프레임을 이용해 자기 족쇄를 채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구도에서 진보가 조금만 잘못해도 보수보다 더 강하게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 강 교수의 논리인데, 정작 문제는 그 구도를 만든 것이 바로 진보이고, 진보가 도덕성을 자신들의 역량으로 강조하며 저항을 미학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 사회 기존의 진보는 민주화를 도덕성의 문제로 봤고, 나중에 이 틀을 깨려 했던 참여정부는 민주화를 능력의 문제로 봤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른바 ‘깨시민(깨어있는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이나 새누리당 지지자들을 (능력이) 모자란 사람들 취급하며 깔보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니 강 교수의 ‘싸가지론’은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이에게 또 독을 먹이는 처방”이라며 “동종요법이라도 효과가 있으려면 일단 그 독사과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독의 성분부터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진중권 교수의 ‘메시지론’(관련 기사 : 진중권 등 ‘강준만의 진보 싸가지론’ 반박) 에 대해서도 “결국 진 교수의 말도 넓게 봤을 때 참여정부 능력주의의 일종”이라며 “지금 진보의 위기는 콘텐츠나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 대 반민주, 부패 대 반부패 구도가 무용지물이 됐지만 민주화의 주역들은 더욱더 엘리트화하면서 자기들끼리 위상학적 균형을 이루는 공모관계에 있다”며 “2012년 선거 과정에서 보수가 정책을 선택하면서 진보의 의미가 상실되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유권자들이 새누리당을 선택한 건 진보의 정책을 여당이라서 더 잘 추진할 거 같다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진보가 콘텐츠가 없어서 문제인 건 아니다”라며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복지 관련 여러 가지 정책이 나왔지만 2012년의 결과가 어땠느냐”라며 “이미 나올 건 다 나왔으니 내용이 없는 게 아니라 그걸 추진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진보적인 교육 정책과 관련해 ‘국공립대통합네트워크’ 같은 대학 개혁 정책을 내세웠다가 ‘서울대 폐지론이냐’는 일부의 거센 반발에 바로 꼬리를 내린 사례 등을 들며 “진보에는 정책이 없는 게 아니라 정치가 없는 것인데, 진 교수는 애써 그런 걸 외면하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다득표를 기준으로 한 지금의 선거 틀과 의회 정치의 한계 안에서 능력주의 등을 내세우는 이런 상황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며 “다수 대중이 이 프레임에 피로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식의 토대부터 전환해야 한다. 진보적 가치는 정책을 통해 달성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는 것에서 이뤄진다”며 “진보는 다시 일상으로 가야하고, 일상에서 조직되고 있는 새로운 움직임들을 포착해야 한다. 일단 의회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들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논의하고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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