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가운데)이 1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선고를 받은 뒤 취재진을 피해 법정을 나서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과 이를 막는 수행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자 비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법원, 선거법 무죄 선고 논란
‘박근혜 지지·야당 반대’ 명확한데
재판부 “특정후보 선거운동 아냐”
국정원글 11만건만 증거로 채택
원세훈 전 원장에 유리한 해석
‘무상급식’ 판례 무죄 근거로 제시
“국가기관을 개인 잣대 적용” 비판
‘박근혜 지지·야당 반대’ 명확한데
재판부 “특정후보 선거운동 아냐”
국정원글 11만건만 증거로 채택
원세훈 전 원장에 유리한 해석
‘무상급식’ 판례 무죄 근거로 제시
“국가기관을 개인 잣대 적용” 비판
법원이 2012년 대선 때 국가정보원의 인터넷 여론 조작 행위를 놓고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거가 정치 과정의 일부인데도 주관적 법 해석을 통해 공직선거법 위반죄는 물을 수 없다는 모순된 판단에 대해 법률적·상식적 비판이 제기된다. ‘타협적 판결’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들이 쓴 인터넷 글 2125건, 찬반클릭은 1214회를 정치 관여로 인정했다. 하지만 검찰이 기소한 78만여건에 대해 “검찰의 추론에 불과하다”며 국정원 직원들이 인정한 계정 175개로 쓴 글 11만여건만 증거로 채택했다.
■ 선거법 위반 무죄 판단 이유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11일 국정원의 여론 조작 행위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 및 여당을 지지하고 야당 및 정치인들을 반대·비판하는 활동”이라고 인정면서도 “대선 시기에 사이버활동을 (박근혜 후보 당선을 위한) 선거운동으로 전환했다는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며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같은 행위에 대해 국가정보원법 위반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선거법 위반 혐의에 따로 무죄를 선고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선거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특정 후보를 당선 또는 낙선시키려는 목적성, 계획성, 능동성이 모두 인정돼야 한다”는 전제를 제시한 뒤, 원 전 원장이 일부러 박근혜 후보를 도우려고 선거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이유로 선거 시기에 트위터 글 수가 줄어든 점, 전부서장회의 발언에서 명시적으로 선거운동을 지시했다고 볼 만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었다. 오히려 원 전 원장이 “대선정국을 맞아 원이 휩쓸리지 않도록 더욱 철저히 관리”하라는 등 선거에 개입하지 말라고 한 게 확인된다고 했다. 한마디로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고 문재인 후보를 낙선시키려는 목적 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다고 평가한 것이다.
■ 원세훈 전 원장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 재판부는 선고 법정에서 “오로지 증거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증거만 기초로 해 법관의 양심에 따라 공정한 결론을 내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법 무죄 논리를 위해 객관적 상황을 외면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원 전 원장은 꾸준히 ‘지시·강조 말씀’을 통해 각종 선거에 대응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작년 선거 때도 보수세력 분열 때문에 졌다”(2011년 11월)거나 “종북좌파들이 다시 정권을 잡을라 그러고… 금년에 잘못 싸우면 국정원이 없어지는 거야”(2012년 2월) 등의 발언을 해왔다. 그런데도 대선을 앞두고 명시적 지시를 하지 않아 선거 개입 목적이 없다고 판단해버린 것이다. 원 전 원장이 약 3년간 해온 ‘지시·강조 말씀’의 맥락에 비추면, 선거에 개입하지 말라는 취지의 지시도 ‘정부·여당 옹호 여론전은 계속하되 밖으로 선거 개입 시비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히 하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검찰 관계자는 “트위터·댓글에 박근혜 후보 지지 내용도 있고 반대도 있다면 재판부 판단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국정원 직원들 글에는 ‘박근혜 지지, 야당 반대’ 경향이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정원법에서 금지하는 특정 정당·정치인 비판 행위를 선거 기간에 하도록 했다면 그 자체가 선거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기관이 노골적으로 선거 개입을 지시하는 경우가 어딨나. 재판부가 허위 수사결과 발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재판에서도 정황 증거를 김 전 청장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는데, 이번에도 같다”고 지적했다.
■ “선거법 무죄 근거 판례 부적절 인용” 재판부는 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 판단 근거로,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친환경 무상급식 풀뿌리 국민연대’ 배옥병 대표가 무상급식 지지 활동으로 기소된 사건의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재판부가 언급한 대목은 “선거 이전부터 특정 정책을 지지·반대한 경우 그 정책이 선거 쟁점이 됐더라도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 개별적으로 선거운동에 해당하는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개입 댓글·트위터 활동은 선거 전부터 이미 광범위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대선을 겨냥해 선거운동 차원에서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하지만 이 판례는 ‘정책만 홍보하는 경우’는 선거운동이 아니라고 본 반면, 특정 정당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정책을 지지·비판한 행위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목적 의지가 인정된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 역시 판결문에 “국정원 직원들이 대선 즈음에도 정부 정책 등을 홍보하는 글을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는 야당·정치인들을 반대·비방하는 글을 작성 및 게시했는데, 대선 후보자와 소속 정당에 대한 반대·비방 취지의 글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도 선거 개입의 적극적 의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판례를 갖고도 국정원 쪽에 유리한 대목만 취사선택한 셈이다.
이호중 교수는 “재판부가 선거운동을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며 언급한 판례는 일반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인데,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지켜야 할 국가기관에 그대로 적용할 논리로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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