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축제에서 댄서들이 음악에 맞춰 파워풀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전후 사정 살핀 흔적 없다고?…천만의 말씀
성인에 ‘복장 강요’ 현명한 방법 아니다가 초점
성인에 ‘복장 강요’ 현명한 방법 아니다가 초점
제가 24일 <인터넷한겨레>에서 쓴 ‘꼰대스러운 숙대 축제, 그들만의 드레스코드’(▷ 관련 기사 바로가기) 기사에 대해 일부 매체들이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슬로우뉴스>는 25일 ‘언론이 말하지 않은 대학 축제 의상 논란의 10가지 디테일(▷ 관련 기사 바로가기)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숙대 총학의 결정은 합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도리어 그들의 비판자들을 더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도 27일 ‘숙대 축제 드레스코드가 꼰대스럽다고?’(▷ 관련 기사 바로가기)라는 기사에서 ‘전후사정을 살핀 흔적 없이 꼰대스럽다는 말까지 동원하며 축제를 비꼬는 건, 축제에서 성상품화하며 호객에 열을 올리는 일부 대학생만큼이나 생각 없어 보인다’고 비판했습니다.
비판 기사들은 제 기사가 전후사정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숙대 총학의 행태를 비판했다고 꼬집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후 사정을 따져봤고, 여러 논란을 펼치기 보다 하나의 논란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먼저 숙대 축제의 의상 논란은 크게 3개의 다른 결이 있습니다. 바로 △대학까지 스며든 선정성과 성상품화 등 천박한 자본주의 논란 △노출이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남성 중심적 담론을 숙대 총학이 받아들였다는 퇴행적 결정 논란 △성인에게 복장 규정을 강제한다는 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판 기사의 논리 전개는 대학까지 스며든 선정성과 성상품화 등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해 질타하고, 이런 현실에서 여대생들은 남성으로부터의 모멸감과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으며,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총학의 선택은 그렇게 비판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대학까지 스며든 선정성과 성상품화 등 천박한 자본주의 논란과 관련해선 숙대를 포함한 여대생에게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중대 범죄가 일어났을 때, 그 범죄자의 사람됨만 비판하면 문제 해결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러나 기자는 왜 그 범죄자가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관해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축제의 천박함의 책임을 대학생들에게 묻기 전에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천박함의 원인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당신은 그렇게 보여주면 되지 않겠냐”고 물어 보실 수 있겠습니다. 다음 부분에 설명했습니다.)
남성들의 모멸감과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는 것도 꼰대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단정하게 입는 아랍의 경우 성범죄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성인에게 복장규정을 강요하는 게 적절한지에 관해서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숙대만의 드레스코드’가 손쉬운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현명한 방식이 아니라는 점, 쌍방향이 아닌 일방통행식이란 점에서 ‘꼰대스럽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월적인 지위를 통해 드레스코드를 강요했던 우리은행과 아시아나항공의 사례도 함께 제시한 것입니다.
저는 한 기사에서 결이 다른 주제를 모두 담을 경우, 논리 전개가 매끄럽지 못할 뿐더러 논리의 정확성도 떨어진다고 봤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이 모든 논란을 아우를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 처럼요. 다만 숙대총학이 이런 식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서만은 두 문장이지만 핵심만 보여주었습니다.
‘언론이 말하지 않은 대학 축제 의상 논란의 10가지 디테일’ 기사의 경우 ‘예술계열 학부에서 유독 선정적 포스터가 많다’ ‘환자에게 성희롱 당할 위험에 항상 노출된 간호대 학생’ 등의 논리 구성에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보입니다. 하지만 저널리즘 문법이 아닌 자유스런 에세이형 기사에서 기사의 엄정함을 요구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되짚어 봐야 하는 것은, 이 기사에서 제가 쓴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은 ‘한겨레 보도와 달리 남성 고객을 겨냥한 복장규제에 항의한 아시아나 항공 승무원들과 남성 고객을 겨냥한 복장 경쟁을 제한한 숙대 총학생회 사이의 공통점을 오히려 찾아야 하지 않나’입니다. 이 기사는 ‘남성’ VS ‘여성’(아시아나 항공 승무원, 숙대 총학생회)이라는 프레임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아시아나 항공 승무원들이 문제 삼은 것은 치마를 입고 일하면 불편한데도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치마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프레임으로 따져보면 ‘불편하지 않게 일하고 싶은 노동자의 권리’ vs ‘수익을 위해 여성스러움을 강요하는 회사’가 맞을 겁니다. 굳이 숙대축제 논란에 비쳐보면, 회사가 수익을 내기 위해 승무원들을 억압한 것으로, 천박한 자본주의 논란이 더 적절한 듯합니다.
그럼 이렇게 물으실 수 있겠습니다. 대안이 뭔데? 제가 쓴 기사에 관해서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규제하고 강요하기보다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해봤으면 어떠했을까요? 축제기간에 토론회를 열어 대학축제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 터놓고 얘기했더라면, 숙대 총학은 대내외적으로 ‘쿨(cool)’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겁니다. 내년에는 기대해 보겠습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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