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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법, 유신·독재체제 과거사 판결 ‘역주행’

등록 2014-10-30 21:27수정 2014-10-30 22:22

유신시대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옥살이까지 했던 오종상씨가 지난 12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에서 36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 판결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역행한 유신헌법과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유신시대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옥살이까지 했던 오종상씨가 지난 12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에서 36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 판결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역행한 유신헌법과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긴급조치 적용 수사·재판 판결
국가 배상책임 부인 단초 제공

손배소 청구기간 단축 등
최근 피해자 권리 축소 경향 뚜렷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행위’조차 처벌한 희대의 악법인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과거사위의 진상규명 결정 등을 근거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선고받고 있다. 이들은 영장 없는 체포와 감금, 가혹행위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도 내고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의 취지가 본격 적용되기 시작하면, 과거의 고통에 대해 배상받을 길이 상당 부분 막힐 가능성이 높다. 대법원의 논리는 한마디로 ‘수사·재판 기관이 엄연한 실정법이던 긴급조치를 집행한 것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이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했었다”는 점도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대법원은 유신체제가 아니어도 당연히 불법행위일 수밖에 없는 가혹행위가 입증되면 배상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수사 과정의 불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으면 구금기간에 비례해 받는 형사보상금으로 족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이는 “악법도 법”이라고 주장하는 ‘실정법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이 나온다. 집권자가 정당한 입법절차 없이 만든 법령을 근거로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도 그 근거가 되는 ‘실정법’만 있었다면 국가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조영선 변호사는 “수십년 전 가혹행위를 나중에 입증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급심은 대체로 긴급조치 위헌 결정을 근거로 영장 없는 체포·구금을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정해왔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의 말처럼 하급심에서는 긴급조치 발동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1부(재판장 김기영)는 6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에 위배돼 위헌·무효이므로,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한 행위는 직무집행 과정에서 저지른 위법행위”라고 밝혔다.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을 전격 석방했으나 고문 폭로 사태로 민주화 열기에 불을 붙였다. 사진은 2월22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창립 준비모임.  자료사진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을 전격 석방했으나 고문 폭로 사태로 민주화 열기에 불을 붙였다. 사진은 2월22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창립 준비모임. 자료사진
대법원도 1960년대 일부 범죄에 대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게 한 ‘인신구속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수사를 받다가 숨진 위아무개씨 유족이 낸 소송에서 “국가가 위헌적 법률을 제정·집행함으로써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고, 그로 인해 구체적 피해까지 발생했다면 불법행위”라는 하급심 판결을 지난 6월 확정한 바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박정희 대통령이 위헌적 긴급조치로 반대자들을 탄압한 행위 자체를 불법행위로 볼 근거가 충분한데도 ‘집행자’들에게만 과도하게 초점을 맞췄다. 민변이 “입법행위 내지 대통령의 불법행위 책임을 간과한 판결은 유신체제에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힌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긴급조치가 위헌이니 그 자체로 불법행위가 성립한다’는 원고 쪽 주장에 대한 추상적 판단을 한 것이지, 긴급조치로 체포·구금된 행위 자체가 정당하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판결문을 보면, 긴급조치 집행 자체는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규정하고 손해배상 대상을 줄이겠다는 의지가 뚜렷해 보인다. 대법원 안팎에서는 다른 과거사 사건들과 달리 긴급조치 사건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곧바로 책임이 돌아가는 데 부담을 느낀 판결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유죄 선고를 남발한 선배 법관들의 행위를 불법행위로 낙인찍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됐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번 사건 말고도, 최근 몇년간 대법원은 과거사 배상 사건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축소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왔다. 2011년에는 간첩 누명을 쓴 납북어부 유족이 받을 지연손해금(이자) 기산 시점을 “과잉 배상 우려”를 이유로 불법행위 시점이 아니라 재심의 사실심(항소심) 변론종결일로 바꿔 배상액을 대폭 깎았다. 이 여파로 인혁당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은 미리 지급받은 배상금 일부를 반납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5월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가능 기간을 과거사위 결정 뒤 3년에서 6개월로 대폭 단축하는 판결을 했다. 올해 3월에는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생활지원금을 받았다면 따로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원심을 확정하기도 했다.

안경호 4·9평화통일재단 조사실장은 “국가범죄 피해자들에게는 국가가 먼저 나서서 명예회복과 보상을 해야 할 텐데, 피해자들이 법원을 찾아다니며 재심과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상황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법원도 국가의 무책임한 행태에 편승해 피해 회복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수년 전 과거사 청산에 사법부도 나서겠다던 선언이 무색해졌다”고 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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