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 여성 40여명 고충 토로 집담회
80세 할아버지는 “미스김”
여성이라 얕봐 설움 두배
누수에 방음 안되는 ‘고장난 집’
집주인에 쉽게 말도 못하고… 지난겨울, 김씨 방 벽에 커피색 무늬가 생기기 시작했다. 손으로 눌러보니 고인 물이 쭉 흘러나왔다. 누수였다. 벽에 큰 금이 가 있었다. 별수 없이 집주인에게 수리를 요청했지만, 수리는 아직까지 안 되고 있다. “집주인이 ‘다른 세입자들은 모두 명절 인사 문자 메시지를 보냈는데 당신만 보내지 않았다’고 하더라.” 김씨는 혹시 그 때문은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대학생 김수정(24)씨는 “4년간의 전쟁이었다”며 셋방살이 경험을 전했다. 김씨는 “80살 할아버지가 집주인이었는데 나를 늘 ‘미스 김’이라고 불러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어느 날 한 달 수도요금이 5만원이나 나왔다. 다음달에도 같았다. 김씨는 사용량보다 많은 요금이 나왔다며 수도 점검과 수리를 요청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집주인은 내 요청을 귓등으로 흘렸고 몇 달이 지나갔다. 결국 친한 교수님께 요청해 함께 집주인을 찾아갔다. 그러자 집주인이 곧바로 수리기사를 불러 고쳐줬다.” 김씨는 “셋방살이에는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권력관계 외에도 남성과 여성, 나이 많은 사람과 나이 어린 사람이라는 권력관계가 작용한다”고 했다. 4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민공간 나루’에 1~17년차 비혼 여성 세입자 4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열린 ‘내가 사는 그 집’ 집담회에서 셋방살이의 고충을 털어놓고 경험에서 나오는 정책 대안도 제시했다. 집담회 내내 집주인의 횡포에는 경악하고, 내 집 없는 설움에는 공감하는 반응들이 이어졌다. 집주인뿐 아니라 ‘집 자체’가 셋방살이를 더 힘들게 한다며 집중적인 성토 대상이 됐다. 서울 성북구의 한 월셋방에서 7년째 살고 있다는 윤아무개(39)씨는 ‘고장난 집’ 때문에 생필품이 돼버린 물건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싱크대에서 악취가 심하게 올라와 베이킹소다를 하루도 빠짐없이, 한달에 3㎏씩 뿌려야 합니다. 또 천장이 얇은 합판으로 된 집이라 층간소음이 심합니다. 귀마개가 필수품인데 소모품이라 2주일마다 새것으로 교체하죠. 습도계와 제습기도 필수품이에요. 실내 적정 습도는 40~60% 정도라는데, 제 방 습도는 늘 80% 수준이기 때문이죠.” 대학생 안현경(22)씨는 ‘가벽’으로 인한 소음으로 고통받는 친구 얘기를 들려줬다.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갔는데 옆방 전화 통화 소리는 물론 음식 준비하는 소리까지 들렸어요. 심지어 음식 냄새까지 넘어와요. 합판으로 만든 가벽으로 방 하나를 두 개로 만든 구조였어요. 친구는 스트레스 탓인지 눈병까지 생겼어요.” 셋방살이도 관록이 붙는다. 17년차 세입자 박하윤경(40)씨는 ‘고참’다운 조언을 내놨다. “집을 구할 때는 수돗물 수압, 곰팡이, 해충, 채광, 통풍, 방음 등을 반드시 살피고, 이 중 우선순위를 정해 계약을 해야 합니다. 집주인과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대응할 수 있도록 다른 세입자들과 평소 친분을 두텁게 쌓아놓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민우회는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고, 살아봐야 아는데, 살고 나면 뒤통수 맞는 월셋집’이라는 문제의식을 책으로 묶어냈다. 집 구하기부터 집주인과의 분쟁 등 셋방살이 전과정에 대한 실질적 조언을 담은 ‘세입자 안내서’ <새록세록>을 만들었다. 권박미숙(32) 활동가는 “주거약자인 월세 세입자들은 누수, 부실한 난방, 악취 등 일상적인 주거문제에 맞닥뜨린다. 특히 늘어나는 1인 가구의 한 축인 비혼 여성들은 집주인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설움을 겪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의 월세 대출 신설 정책은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뼈 빠지는 세입자들에게 월세 대출금까지 갚으라는 이중고로 몰아넣는 대책일 뿐이다. ‘복불복’으로 집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득에 적정한 집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최저주거기준’이 아닌 ‘적정주거기준’을 갖춘 집을 원한다”고 했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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