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아름다운재단 예종석 이사장이 딸 나연씨의 미국 웨스트민스터대 경영대 연구실에서 함께한 모습. 아버지는 딸에게 경영학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딸은 자연스럽게 같은 길을 택했다. 예종석 제공
[토요판] 가족 / ‘아름다운 재단’ 예종석 이사장과 딸 인터뷰
▶ 아버지와 인터뷰하기, 그것 참 쉽지 않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겸연쩍습니다. 일단 마주앉아 말을 터보십시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대화하는 새로운 가족상을 만들어가는 ‘인터뷰 ; 가족’ 기획의 세번째 편입니다. 독자 여러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실명과 익명 기고 모두 환영합니다. 보내실 곳 gajok@hani.co.kr. 200자 원고지 기준 20장 안팎. 원고료와 함께 사진도 실어드립니다.
이제 내게 자식이 생기고 나니 새삼스레 나와 아빠의 관계, 또 아빠와 할아버지의 관계를 재조명해보곤 한다. 여느 딸들처럼 아빠에게 살갑게 다가가고 애교 넘치는 스타일이 못 되지만 그 마음만큼은 어느 딸 못지않은데 표현하지 않으면 누가 알까. 내게 자식이 생기고 나니 이제야 표현의 중요성을 배우고 표현의 방법을 알아간다. 오랜 유학생활로 마주앉아 나누는 심도 있는 대화는 연중행사가 되어버린 것이 늘 아쉽지만 오늘은 소소한 화제로 아빠와의 빈 공간을 채워가 볼까 한다. 어느덧 자라 당신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딸과 대화하는 아빠는 어떤 느낌일까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딸
노래 하나를 배우더라도
차 안에 녹음테이프 갖다놓고
반복연습하던 아빠 뒷모습 생생
음주마저도 너무 열심이셨죠? 아빠
네가 어학연수 간다고 해놓고
미국에 눌러앉아 깜짝 놀랐어
커피 끓이는 널 두고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라고 나 경영학 교수, 공익단체 대표, 음식문화평론가, 시사칼럼니스트, 와인과 스키 마니아 등으로 바쁘고 재미있게 사시는 아빠지만 타임머신 타고 과거의 어느 한때로 갈 수 있다면 지금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나 순간은? 아빠 돌아갈 수 있다면 네가 태어나던 무렵의 미국유학생활 시절로 돌아가보고 싶어. 그때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지. 할아버지(예춘호 전 의원)는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되시고 서울의 가족들은 감시에 시달리던 때라 항상 좌불안석이었지. 게다가 경제적 상황도 좋지 않고 공부까지 힘들어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고 행복했어야 할 신혼생활과 신출내기 아빠로서의 역할도 엉망이었지. 그래서 엄마나 너한테도 마음의 빚이 많았어.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족과 함께 미국생활도 즐기고 학창생활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미국의 대학생활이라는 것이 힘든 면도 있지만 재미있게 즐길 거리도 많잖아.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달리 우리나라와 미국의 경제력 차이가 워낙 커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말이야. 나 여쭤보기 송구하지만 그럼 제가 태어나던 무렵 아빠가 나한테 제일 미안하게 생각하는 일은 뭐였나요? 아빠 미국에서 맞은 네 백일날 저녁 먹는데 할아버지(예 이사장의 부친 예춘호 전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은 박정희 정부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활동했으나 3선개헌에 반대하며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1980년 전두환·노태우 쿠데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쿠데타군에 구속돼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구속되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어. 이어서 광주사태가 터졌고. 두 달 동안은 할아버지의 행방도 알 수가 없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 정보부 지하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계셨고 육군교도소로 옮겨져서 내란음모라는 누명을 쓰신 채 군사법정에서 12년형을 선고받으셨지. 갓난아기인 네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 할아버지께서 옥중에서 내게 돌아오지 말고 공부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오셨는데 독방에서 고생하시는 걸 생각하면 제정신일 수가 없었어. 그러니 식구들 모두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 한창 자라던 네게 혹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지금도 마음에 걸려. 나 직접적으로 관여하거나 강요하는 스타일이 아니셨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지금 저의 커리어에 가장 큰 동기부여와 영향을 줬고 또 주고 있는 사람은 아빠인데 그것이 나름 아빠의 뜻있는 교육철학이셨는지 궁금해요. 아빠 너도 잘 알다시피 내가 ‘교육철학’ 같은 엄숙하고 숭고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잖아.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마다하겠냐마는 나는 네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하기 싫었어. 내가 중·고교 시절에 워낙 말썽꾸러기 노릇을 해서 할아버지께 야단을 많이 맞아 반작용으로 그랬는지도 모르지. 또 그런 질책이 그리 효과가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터라 그러기도 했고.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는 생활신조를 터득했기에 너희에게 강요는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은 심어주려 했지. 그래서 그런지 상백이(아들)는 지금도 어쩌다 내가 한마디 하려고 들면 “알았어요. 제 인생 제가 책임져야죠”라고 후렴처럼 말하잖아.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크게 노력한 것도 없는데 자식 둘이 다 나와 같이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내 의중을 너희들이 잘 따라와준 결과라 느껴져서 흐뭇하긴 해. 그런데 너는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왜 경영학 분야 중에서도 나와 같은 마케팅을 전공으로 택했어? 나 마케팅을 전공으로 정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사실 귀에 가장 익숙한 과목이기 때문이었어요.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에 마케팅이란 단어가 가장 많았잖아요. 내가 뭘 잘하는지 뭐가 잘 맞을지 아직 잘 모르는 때라 바보 같지만 익숙함이 가장 안전할 거 같단 생각을 했어요. 다행히도 마케팅 수업들이 너무 흥미로웠고 컨설팅 회사의 일도 재미있었고요, 이 길로 들어선 것이 정말 보람차고 잘했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더 확실해지는데 그건 아빠와 자연스럽게 오가는 마케팅 관련 대화가 어색하지 않은 때예요. 아빠와 여러 각도로 더 가까워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 뿌듯해요. 가까이에서 봐온 아빠는 다방면으로 엄청난 노력형이에요.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노래 하나를 배우시더라도 녹음테이프를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반복적으로 들으며 연습하던 아빠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비슷한 맥락에서 아빠는 음주마저도 열심이시죠. 술이 아빠의 삶의 큰 즐거움인 것을 알기에 엄마도 나도 “끊으시라”고는 차마 말 못하고 늘 “적당히”라 외치지만… 아빠에게 있어 술이란? 아빠 음식을 즐기는 사람에게 술은 식욕을 돋우는 촉매와 같은 것이지. 음식이 술을 부르기도 하고 술이 음식을 부르기도 하지만 말이야. 입에 맞는 음식과 궁합이 잘 맞는 술을 같이 만나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 되는 거지. 오죽하면 프랑스 사람들이 음식과 와인의 조합을 ‘마리아주’라고 결혼에 비유를 다 하겠어. 이 세상의 어떤 음식도 짝이 잘 맞는 술이 있지. 그런 술을, 음식을 사랑하는 내가 싫어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닐까? 좋은 음식과 조화를 잘 이루는 술을 즐기는 것은 내 인생의 큰 즐거움이자 동반자야. 술이 없는 인생은 너무 황량할 것 같아. 반주는 과음할 수 없는 음주방식이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말고. 나 아빠는 온라인 식도락 동호인들 사이에 ‘예폭’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잖아요. 처음엔 이 ‘폭’자의 의미를 몰랐는데 나중에 폭탄주에서 유래한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폭’소했더랬지요. 와인 전문가가 그런 별명을 얻은 건 평소 주변 지인 분들께 너무 말아 드려서인가요? 아빠 내가 워낙 술에 관한 한 청탁을 가리지 않지만 폭탄주를 모임에서 가끔 즐기는 데는 이유가 있어. 애주가들이 폭탄주를 ‘군사문화의 잔재’니 ‘좋은 술에 대한 모독’이니 하지만 좌중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그만한 게 없거든. 이른바 ‘아이스브레이킹’용으로는 최고지. 그래서 사람들 여럿 모인 자리에서 한두 잔씩 돌리다 보니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나서 그게 아이디가 되고 아호가 되기에 이르렀네. 하지만 폭탄주는 한두 잔으로 그쳐야지 많이 마실 건 아니야. 나 아빠가 지금까지 제일 섭섭하거나 마음에 안 들었던 제 선택이나 행동은 뭐였어요? 아빠 네가 대학교 1학년 때 방학 동안 미국에 어학연수 간다고 해서 보냈더니 그곳에 주저앉아 대학 입학 허가를 받고는 학교 식당에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얻어놓고 공부하겠다고 버틸 때 제일 놀랐지. 집안 분위기가 여자들은 유학을 허락하지 않던 때라 내가 당황해서 미국으로 데리러 갔지. 그때 네가 일하던 식당에서 내게 했던 말 기억하니? “아빠도 옛날에 저처럼 미국에 공부하러 왔었잖아요?”라고 해서 말문이 막혔었다. 멀쩡한 척했지만 커피 끓이는 너를 두고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라. 나 커리어 면에서 지금 저의 모습이 약 30년 전 아빠가 미국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로서 활동을 시작하던 때와 흡사할 텐데 아빠가 저에게 특별히 조언해주고 싶은 것들이 있으신지. 아빠 글쎄 나는 평생 계획 같은 걸 세우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에 그냥 얹혀서 살아온 것 같아. 어떤 목적을 갖고 일을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일은 피하지 않고 나름으로는 성실하게 수행해온 셈이지. 그런 생활철학 때문에 ‘상선여수’(上善如水: 가장 뛰어난 선은 물과 같다)를 좌우명으로 삼게 됐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삶의 방식을 후회해본 적도 없고. 그러나 이런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다가오는 이런저런 일들과 굳이 싫지 않으면 연관을 맺어왔는데, 내가 뭘 굳이 이루려 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아무튼 성취감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 무언가 달성하고 싶으면 연구도 사회활동도 한 분야에 천착할 것을 권하고 싶어. 부담감을 느끼면서까지 그럴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 방향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겠지. 그러나 인생을 치열하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좀 헐렁하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인생을 다이내믹하게 사는 아빠지만 그런 아빠의 인생 중심에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과거에 좀 놀던(?) 아빠가 학자의 길을 택할 수 있게 되신 것도, 다방면을 종횡무진하시지만 교육과 공익활동으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목적성 있는 삶을 살고 계시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아빠의 말씀을 들으며 알게 모르게 나의 생각이 아빠를 많이 닮아 있고 닮아가고 있었음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또한 꼭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몸소 보여주는 것이 더 큰 교육임을 느끼며 나는 어떤 엄마로 살 것인지 생각해본다. 예나연 미국 웨스트민스터대 경영대 교수
노래 하나를 배우더라도
차 안에 녹음테이프 갖다놓고
반복연습하던 아빠 뒷모습 생생
음주마저도 너무 열심이셨죠? 아빠
네가 어학연수 간다고 해놓고
미국에 눌러앉아 깜짝 놀랐어
커피 끓이는 널 두고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라고 나 경영학 교수, 공익단체 대표, 음식문화평론가, 시사칼럼니스트, 와인과 스키 마니아 등으로 바쁘고 재미있게 사시는 아빠지만 타임머신 타고 과거의 어느 한때로 갈 수 있다면 지금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나 순간은? 아빠 돌아갈 수 있다면 네가 태어나던 무렵의 미국유학생활 시절로 돌아가보고 싶어. 그때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지. 할아버지(예춘호 전 의원)는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되시고 서울의 가족들은 감시에 시달리던 때라 항상 좌불안석이었지. 게다가 경제적 상황도 좋지 않고 공부까지 힘들어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고 행복했어야 할 신혼생활과 신출내기 아빠로서의 역할도 엉망이었지. 그래서 엄마나 너한테도 마음의 빚이 많았어.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족과 함께 미국생활도 즐기고 학창생활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미국의 대학생활이라는 것이 힘든 면도 있지만 재미있게 즐길 거리도 많잖아.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달리 우리나라와 미국의 경제력 차이가 워낙 커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말이야. 나 여쭤보기 송구하지만 그럼 제가 태어나던 무렵 아빠가 나한테 제일 미안하게 생각하는 일은 뭐였나요? 아빠 미국에서 맞은 네 백일날 저녁 먹는데 할아버지(예 이사장의 부친 예춘호 전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은 박정희 정부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활동했으나 3선개헌에 반대하며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1980년 전두환·노태우 쿠데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쿠데타군에 구속돼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구속되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어. 이어서 광주사태가 터졌고. 두 달 동안은 할아버지의 행방도 알 수가 없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 정보부 지하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계셨고 육군교도소로 옮겨져서 내란음모라는 누명을 쓰신 채 군사법정에서 12년형을 선고받으셨지. 갓난아기인 네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 할아버지께서 옥중에서 내게 돌아오지 말고 공부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오셨는데 독방에서 고생하시는 걸 생각하면 제정신일 수가 없었어. 그러니 식구들 모두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 한창 자라던 네게 혹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지금도 마음에 걸려. 나 직접적으로 관여하거나 강요하는 스타일이 아니셨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지금 저의 커리어에 가장 큰 동기부여와 영향을 줬고 또 주고 있는 사람은 아빠인데 그것이 나름 아빠의 뜻있는 교육철학이셨는지 궁금해요. 아빠 너도 잘 알다시피 내가 ‘교육철학’ 같은 엄숙하고 숭고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잖아.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마다하겠냐마는 나는 네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하기 싫었어. 내가 중·고교 시절에 워낙 말썽꾸러기 노릇을 해서 할아버지께 야단을 많이 맞아 반작용으로 그랬는지도 모르지. 또 그런 질책이 그리 효과가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터라 그러기도 했고.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는 생활신조를 터득했기에 너희에게 강요는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은 심어주려 했지. 그래서 그런지 상백이(아들)는 지금도 어쩌다 내가 한마디 하려고 들면 “알았어요. 제 인생 제가 책임져야죠”라고 후렴처럼 말하잖아.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크게 노력한 것도 없는데 자식 둘이 다 나와 같이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내 의중을 너희들이 잘 따라와준 결과라 느껴져서 흐뭇하긴 해. 그런데 너는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왜 경영학 분야 중에서도 나와 같은 마케팅을 전공으로 택했어? 나 마케팅을 전공으로 정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사실 귀에 가장 익숙한 과목이기 때문이었어요.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에 마케팅이란 단어가 가장 많았잖아요. 내가 뭘 잘하는지 뭐가 잘 맞을지 아직 잘 모르는 때라 바보 같지만 익숙함이 가장 안전할 거 같단 생각을 했어요. 다행히도 마케팅 수업들이 너무 흥미로웠고 컨설팅 회사의 일도 재미있었고요, 이 길로 들어선 것이 정말 보람차고 잘했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더 확실해지는데 그건 아빠와 자연스럽게 오가는 마케팅 관련 대화가 어색하지 않은 때예요. 아빠와 여러 각도로 더 가까워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 뿌듯해요. 가까이에서 봐온 아빠는 다방면으로 엄청난 노력형이에요.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노래 하나를 배우시더라도 녹음테이프를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반복적으로 들으며 연습하던 아빠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비슷한 맥락에서 아빠는 음주마저도 열심이시죠. 술이 아빠의 삶의 큰 즐거움인 것을 알기에 엄마도 나도 “끊으시라”고는 차마 말 못하고 늘 “적당히”라 외치지만… 아빠에게 있어 술이란? 아빠 음식을 즐기는 사람에게 술은 식욕을 돋우는 촉매와 같은 것이지. 음식이 술을 부르기도 하고 술이 음식을 부르기도 하지만 말이야. 입에 맞는 음식과 궁합이 잘 맞는 술을 같이 만나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 되는 거지. 오죽하면 프랑스 사람들이 음식과 와인의 조합을 ‘마리아주’라고 결혼에 비유를 다 하겠어. 이 세상의 어떤 음식도 짝이 잘 맞는 술이 있지. 그런 술을, 음식을 사랑하는 내가 싫어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닐까? 좋은 음식과 조화를 잘 이루는 술을 즐기는 것은 내 인생의 큰 즐거움이자 동반자야. 술이 없는 인생은 너무 황량할 것 같아. 반주는 과음할 수 없는 음주방식이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말고. 나 아빠는 온라인 식도락 동호인들 사이에 ‘예폭’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잖아요. 처음엔 이 ‘폭’자의 의미를 몰랐는데 나중에 폭탄주에서 유래한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폭’소했더랬지요. 와인 전문가가 그런 별명을 얻은 건 평소 주변 지인 분들께 너무 말아 드려서인가요? 아빠 내가 워낙 술에 관한 한 청탁을 가리지 않지만 폭탄주를 모임에서 가끔 즐기는 데는 이유가 있어. 애주가들이 폭탄주를 ‘군사문화의 잔재’니 ‘좋은 술에 대한 모독’이니 하지만 좌중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그만한 게 없거든. 이른바 ‘아이스브레이킹’용으로는 최고지. 그래서 사람들 여럿 모인 자리에서 한두 잔씩 돌리다 보니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나서 그게 아이디가 되고 아호가 되기에 이르렀네. 하지만 폭탄주는 한두 잔으로 그쳐야지 많이 마실 건 아니야. 나 아빠가 지금까지 제일 섭섭하거나 마음에 안 들었던 제 선택이나 행동은 뭐였어요? 아빠 네가 대학교 1학년 때 방학 동안 미국에 어학연수 간다고 해서 보냈더니 그곳에 주저앉아 대학 입학 허가를 받고는 학교 식당에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얻어놓고 공부하겠다고 버틸 때 제일 놀랐지. 집안 분위기가 여자들은 유학을 허락하지 않던 때라 내가 당황해서 미국으로 데리러 갔지. 그때 네가 일하던 식당에서 내게 했던 말 기억하니? “아빠도 옛날에 저처럼 미국에 공부하러 왔었잖아요?”라고 해서 말문이 막혔었다. 멀쩡한 척했지만 커피 끓이는 너를 두고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라. 나 커리어 면에서 지금 저의 모습이 약 30년 전 아빠가 미국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로서 활동을 시작하던 때와 흡사할 텐데 아빠가 저에게 특별히 조언해주고 싶은 것들이 있으신지. 아빠 글쎄 나는 평생 계획 같은 걸 세우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에 그냥 얹혀서 살아온 것 같아. 어떤 목적을 갖고 일을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일은 피하지 않고 나름으로는 성실하게 수행해온 셈이지. 그런 생활철학 때문에 ‘상선여수’(上善如水: 가장 뛰어난 선은 물과 같다)를 좌우명으로 삼게 됐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삶의 방식을 후회해본 적도 없고. 그러나 이런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다가오는 이런저런 일들과 굳이 싫지 않으면 연관을 맺어왔는데, 내가 뭘 굳이 이루려 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아무튼 성취감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 무언가 달성하고 싶으면 연구도 사회활동도 한 분야에 천착할 것을 권하고 싶어. 부담감을 느끼면서까지 그럴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 방향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겠지. 그러나 인생을 치열하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좀 헐렁하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인생을 다이내믹하게 사는 아빠지만 그런 아빠의 인생 중심에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과거에 좀 놀던(?) 아빠가 학자의 길을 택할 수 있게 되신 것도, 다방면을 종횡무진하시지만 교육과 공익활동으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목적성 있는 삶을 살고 계시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아빠의 말씀을 들으며 알게 모르게 나의 생각이 아빠를 많이 닮아 있고 닮아가고 있었음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또한 꼭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몸소 보여주는 것이 더 큰 교육임을 느끼며 나는 어떤 엄마로 살 것인지 생각해본다. 예나연 미국 웨스트민스터대 경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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