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형기 경남농아인협회 밀양시지부장(오른쪽부터)과 정현택, 윤미선 회원이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서 한국수어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 중 수화로 대화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청각장애인들 국회 앞 10여일째 농성
손팻말 들고 ‘수화 언어법 제정’ 촉구
“수술 때 의사 말 알아들을 수 없어”
수화 통역 필요한데 도움 받지 못해
손팻말 들고 ‘수화 언어법 제정’ 촉구
“수술 때 의사 말 알아들을 수 없어”
수화 통역 필요한데 도움 받지 못해
자신의 권리와 당신의 의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매일 엇갈리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지난 12일 ‘구호 없는 농성장’ 하나가 조용히 차려졌다. 여느 농성장처럼 스티로폼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천막 하나를 쳤다. 10㎡ 남짓한 천막 안에는 난로 하나가 놓였다.
누구 하나 소리쳐 요구하지 않는 천막의 침묵은 조용하게 내걸린 펼침막이 깨고 있었다. ‘농인은 수어 사용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국회는 한국수어법을 조속히 제정하라.’
날마다 청각장애인 2명이 돌아가며 천막을 지킨다. 안엔 수화통역사도 있다. 24일 오전 ‘수화언어법’ 제정을 촉구하는 이들의 천막에는 마침 김아무개(44)씨 등 경남에서 올라온 청각·언어장애인 3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씨는 2012년 ‘부인과 질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시간은 아침 7시였다. 수술이 끝난 뒤 “괜찮냐”는 말에 답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의사는 수술 전에도 당부 사항을 일러줬지만, 김씨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수화통역이 필요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화통역센터의 업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였다. 김씨는 “입원했을 때도 의사가 아침 8시에 회진을 돌며 아픈 곳은 없느냐고 물었지만 의사소통이 어려웠다”고 했다.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지난해 청각장애인만 해도 25만5000명이다. 언어장애인은 1만7830명이다. 이들에게 ‘제1언어’는 국어가 아니라 수화다. 그런 만큼 이들이 입법을 촉구하는 수화언어법은 수화에 ‘국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수화가 아닌 ‘수화언어’(수어)라는 표현을 쓴다.
수화통역이 되지 않아 겪는 어려움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청각·언어장애인 천형기(46)씨는 공항에서 탑승 게이트가 바뀌었는데도 안내가 방송으로만 이뤄진 탓에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기차나 버스를 탈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천씨는 “내가 사는 경남 밀양에 수화통역센터 4곳이 있다. 청각·언어장애인이 1500명이나 되는데 수화통역사는 턱없이 모자란다”고 했다. 정부 지원을 받는 전국의 수화통역센터는 192곳이다. 국가공인 수화통역사는 지난해 기준으로 1134명에 불과하다.
국회에는 여야 의원 4명이 각각 발의한 관련 법안이 계류돼 있다. 이들 법안은 수화언어 통역 지원과 통역사 양성, 장애 발생 초기부터 일찍 수화언어를 배울 수 있는 교육환경 보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양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4학년에 재학중인 정현태(37)씨도 수화언어가 제1언어다. 그는 “수화통역이 없다 보니 동기들 강의노트를 빌리거나 가족이 함께 강의를 듣고 전달해주는 방법으로 공부했다. 늘 비장애인과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은 단절감을 느꼈다”고 했다. 청각장애학교를 졸업한 윤미선(41)씨도 “특수학교에서도 수화를 할 줄 아는 선생님이 거의 없어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고스란히 취업의 어려움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김씨 등은 점심시간이 되자 천막 밖으로 나왔다. 구호 대신 손팻말을 하나씩 들었다. ‘농인은 모든 생활영역에서 수어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외침이었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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