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재심 양씨 무죄 확정
“중정서 또 당할까 겁나…검찰·법정서도 말 못해”
“중정서 또 당할까 겁나…검찰·법정서도 말 못해”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도 초도순시 오시니까 보고서 작업 좀 도와주시죠.”
1976년 12월3일, 제주도에 살던 양아무개(77)씨는 도청 공무원으로 보이는 남성 두 명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자 돕겠다는 마음에 따라 나섰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도청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의 제주지역 대공분실이었다. 지하방으로 내려가자 조금 전까지 친절하던 공무원이 돌변했다. “너 이놈의 자식, 네 형이 조총련인데 왜 신고하지 않았냐?”
영장 없이 끌려온 양씨는 그날부터 구타를 당했다. 서울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압송돼 계속 고문을 받았다. “자백하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다”며 팬티만 입혀놓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취조실의 커다란 등불 두 개의 빛이 너무 세 눈을 뜨기 힘들었다. 방은 매우 더웠고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다. 수사관은 “물속에 전선이 있다. 협조하지 않으면 전기고문을 받는다”고 협박했다. 수사관은 5~6일간 잠을 못 자게 했다. 양씨가 졸 때마다 각목으로 몸을 쿡쿡 찔러댔다. 맞으면서도 꾸벅꾸벅 조는 지경이 돼서야 자게 해줬다. 묻는 말에 사실대로 답하면 “그게 아니잖아”라며 욕설과 협박을 일삼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기력해지고 수사관들의 요구에 응해야 할 것 같았다. 수사관이 “이렇게 했잖아?”라고 물으면 “좋다. 그렇게 했다고 하겠다”고 말할 정도가 됐다.
양씨는 곧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고 며칠 뒤 검사가 찾아왔다. “중앙정보부에서 한 얘기는 진실이 아니다”라고 했으나, 검사는 “이러면 안 된다. 검찰에서 부인하면 다시 중앙정보부로 가서 조사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양씨는 끔찍한 고문을 또 받을 수 있다는 경고가 두려워 검사의 말을 들었다.
양씨는 이듬해 1월 반국가단체인 조총련 소속인 이복형과 접촉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로 기소됐다. 양씨는 법원에서도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법정마저도 고문 사실을 주장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누구도 수사 과정의 불법행위를 거론하지 않았다. 양씨는 이듬해 5월 대법원에서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2011년 12월 재심을 신청한 양씨는 이번에는 당시 당한 일을 상세히 털어놨다. 서울고법은 지난 8월 “양씨가 불법 구금당해 고문·가혹행위를 당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도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양씨의 무죄를 확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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