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조작 피해 유족 위자료 재산정
‘간첩 가족’ 몰린 정신적 고통 불인정
북파·사망사실 숨긴 책임만 인정
변호인 “증거·사실관계 무시한 판결”
‘간첩 가족’ 몰린 정신적 고통 불인정
북파·사망사실 숨긴 책임만 인정
변호인 “증거·사실관계 무시한 판결”
법원이 애초 28억원으로 산정했던 간첩 조작 피해자 유족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액수를 1억5000만원으로 대폭 깎는 판결을 했다. 1960~70년대에 ‘간첩 가족’으로 몰린 이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위자료를 줄 필요가 없다는 대법원의 비상식적 판단 때문이다.
서울고법 민사6부(재판장 김필곤)는 북파공작원 임무를 수행하다 숨졌으나 간첩 누명을 쓴 김상한씨의 유족 6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국가는 1억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28일 밝혔다. 앞서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지난해 2월 ‘국가가 28억원을 배상하라’는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위자료 산정을 다시 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이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신적 피해 정도를 크게 낮춰 잡고 배상액을 대폭 깎도록 한 것은 이례적이다.
동아대 교수였던 김씨는 42살 때인 1961년 반국가단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지명수배됐다가 이듬해 첩보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공작원으로 북파됐다가 1년 만에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1964년 ‘북괴의 지령에 따라 지하조직을 만들어 국가변란을 꾀했다’며 조작된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면서 김씨가 인혁당 발족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본명 대신 ‘김영춘’이라는 가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1974년 또다른 조작 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 발표 때 김씨 본명을 공개하면서 그가 조직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월북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는 2005년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고 밝혔고, 국방부는 2008년에야 김씨가 간첩활동을 하다 월북한 게 아니라 북파됐다가 사망했다고 통지했다.
유족들이 낸 소송에서 1·2심은 “간첩의 가족으로 지목된 유족들은 신분상 불이익과 경제적 궁핍을 겪게 됐을 것이 경험칙상 인정된다”며 국가가 28억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중앙정보부와 법무부 발표 당시 ‘김영춘’ 또는 ‘김상한’이라는 이름만 거론됐을 뿐 신상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었다. 유족의 친지나 일반인들이 남파간첩으로 지목된 자가 김씨라는 것을 알고, 유족들이 ‘간첩의 가족’으로 불이익을 받은 점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북파와 사망 사실을 유족에게 숨긴 것에만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며, 간첩 조작에 따른 유족의 정신적 손해는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또 “원심이 인정한 위자료 액수는 1960년대에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통지 의무 위반 사건들에서 인정된 위자료 액수를 훨씬 상회한다”고 밝혔다. 이어 “1953년 7월 이후 특수임무 수행 중 사망하거나 행방불명 통보가 지연된 경우 지급된 사망특별위로금이 최대 1억2132만원”이라며 구체적 위자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족 변호를 맡은 조용환 변호사는 “증거와 사실관계를 다 무시한 판결이다. 대법원은 일반 북파공작원 사망 소식을 안 알려준 사건과 똑같이 위자료를 주라는 건데,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횡포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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