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 거부땐 원고쪽 주장 인정
‘다윗’, 재판시작 전 증거수집 쉬워져
불리해지는 ‘골리앗’ 반발 예상
‘다윗’, 재판시작 전 증거수집 쉬워져
불리해지는 ‘골리앗’ 반발 예상
의료사고로 숨진 ㄱ씨의 유족은 병원에 진료기록을 요청했으나, 병원은 기록 전체를 내놓지 않았다. 유족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 전 진료기록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원에 증거보전 신청을 계획했지만 ‘기록이 소실될 위험이 있다’는 걸 소명하기 어려워 포기했다. 유족은 소송을 내도 병원이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에 불응하면 별다른 불이익을 가할 수 없다는 변호사의 조언에 소송 자체를 접었다.
앞으로는 이처럼 대기업·병원 등을 상대로 다투는 당사자가 자료 확보의 어려움 탓에 소송을 포기하는 일이 줄어들 전망이다. 대법원은 소송 전 독립된 증거조사 절차인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30일 밝혔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재판 시작 전 증거 수집을 위해 법원에 증인신문·검증·감정·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할 수 있다. ㄱ씨 유족과 같은 사례의 경우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에 따라 병원이 진료기록을 내면 전문심리위원이 참여하는 증거조사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화해조정이 이뤄지거나, 소송으로 가면 관련 자료는 증거로 활용된다. 병원이 문서제출명령을 거부하면, 재판부는 소송에서 ㄱ씨 유족의 주장이 진실하다고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게 된다.
그동안 일반인들이 병원이나 대기업 등과 법정 싸움을 할 때 증거 확보가 어려워 곤란을 겪는 사례가 많았다. 민사소송에선 소송을 낸 원고가 피고의 잘못을 입증해야 하는데, 소송을 당한 대기업이나 병원이 자료 협조를 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 등에선 대기업·병원 등에 진실 규명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도록 재판부가 명령할 수 있는데(디스커버리 제도), 한국 법원도 이런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구상이 현실화하면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들의 소송은 수월해지겠지만, 관련 법 제·개정 과정에서 대기업 등의 반발도 예상된다. 대법원은 구체적 대상과 분야 등은 추후 논의하겠다고 했다.
이 방침은 상고법원 추진을 앞두고 대법원이 사법·재판 신뢰를 높이겠다며 내놓은 ‘사실심(1·2심) 충실화 마스터플랜’ 가운데 하나다. 대법원은 이밖에도 현재 경력 5년 이상 법관이 맡고 있는 단독재판부 재판장의 절반을 경력 15년차 이상 부장판사로 채우고, 고등법원은 판사 전원을 경력 15년 이상 판사로 채우겠다고 밝혔다. 또 재판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의료·건축 등 전문 분야 재판 때 의사·건축사 등이 판사들과 나란히 법대에 앉아 증인신문 등에 참여하고 판결 전 의견을 내는 ‘전문심리관’ 제도도 도입할 계획이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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