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이정우·박세일 교수, 대화아카데미 발제문
결국 대안경제모델이 문제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 이정우 경북대 교수, 박세일 서울대 교수는 한결같이 한국적 방식의 세계화 적응 전략을 주문했다. 그 열쇠를 참여정부가 쥐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대화문화아카데미(이사장 박종화)는 26일 이들 세 교수의 발제문을 언론에 배포했다. 오는 29일 열리는 ‘민주화·세계화 시대의 양극화’ 대화모임(<한겨레> 20일치 19면)에서 발표될 내용이다. 세 교수는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지난 10여년 동안 각 정부의 초기 정책 입안에 큰 영향을 줬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주최 쪽이 사전에 발표문을 공개한 것이다.
발표문에서 세 학자는 한결같이 참여 정부의 ‘창의적 대안 마련 노력’ 여부에 청진기를 들이댔다.
“세계화 자체를 양극화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이정우 교수) “양극화는 세계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자기변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박세일 교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큰 문제는 민주화 이후 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다.”(최장집 교수)
사회 양극화의 원흉을 전지구적 세계화에 뒤집어 씌워버리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이들의 발표문에 담겨 있다. 세계화 자체에 반대하는 일부 좌파 세력의 문제의식과 대비된다.
다만 한국적 발전전략의 방향에 대해 세 교수는 미묘하지만 중대한 차이를 드러냈다. 시장주의의 폐해를 고쳐잡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최 교수와 이 교수가 비슷했다. 국가능력의 부족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박 교수와 최 교수가 비슷한 기조를 보였다. 그러나 국가가 앞으로 해야할 역할에 대한 최 교수와 박 교수의 판단은 전혀 달랐다.
이정우 “참여정부 정책은 ‘성장과 분배 병행’에 초점”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이 교수는 일단 현 정부의 정책기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참여정부의 경제·사회정책은 ‘성장과 분배의 동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밝혔다. 근로소득세액공제, 부동산대책 등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조세·지출을 통한 (복지국가의) 전통적 재분배보다는 소득의 원천인 부동산·주식 등 자산의 재분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도 내놓았다. 투자의욕을 높이면서도 소득재분배를 통해 사회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정책 기조는 참여정부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이 교수는 “참여정부는 이런 관점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한국의 경제와 정치체질을 고치는 데 주력해 왔다”며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개별주체의 효율성만 강조하는 시장논리를 넘어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혁신적인 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더욱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적어도 발표문만 보자면, 이 교수는 현 정부에 대한 더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고 있다.
박세일 “신기술혁신 속 양극화 해결 상당수”
문민정부에서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지냈고 지난 3월까지 한나라당 정책위원장을 맡았던 박 교수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다. 박 교수는 “세계화 시대에 신기술혁신을 이루면서도 양극화를 해결하는 나라들이 상당수 있다”고 짚었다. 박 교수는 세계화에 성공한 나라들의 공통점을 몇가지 꼽았다. △높은 성장률 유지 △외국인 투자유치 등 경제 개방화 △자유경쟁을 지향하는 지적·문화적 분위기 아래 재산권 제도 등의 효율적 보호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안정 △세계적 최고대학과 최고기업연구소 등 인재양성 △평생교육-적극적 노동시장정책-복지를 연계하는 21세기형 사회안정망 구축 등이다.
박 교수의 현 정부 비판도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위에서 제시한 ‘성공한 국가들’과 달리 “국가에 의한 경제사회시스템의 자기변화능력이 느리기 때문”에 발생했다. 근본적으로 지금 한국 사회에는 “포퓰리즘과 기회주의, 아마추어리즘이 난무하는 반면, 선진화의 주체는 없다”고 지적한다.
최 교수의 참여 정부 비판에는 좀 더 날이 서 있다. “(현 정부는) 지난 2년간 현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통해 경제를 봤다.”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언론·여론이 비판하면 대통령 보좌관·측근들이 변명하는 구조다.” “대통령은 공허한 담론을 좋아하며 정당과 거리두기만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최 교수는 현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극히 교조적으로 수용해 극히 과격하게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그 결과 “양극화가 급속히 팽창하고, 사회통합은 오히려 해체되고, 경제회복의 사회적 기반은 침하하며,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까지 약화됐다”는 것이다.
최장집 “신자유주의 교조적 수용…사회통합 해체돼”
최 교수가 보기에 양자택일은 해법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극대화 또는 신자유주의 반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구성장모델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하고, 대안마련과는 너무 거리가 멀고, 설사 대안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전환의 비용이 너무 크다.”
최 교수는 세계화 파고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에 주어진 ‘공간’이 있다고 짚었다. “신자유주의와 유럽식 복지국가체계라는 두 길 사이에는 그 나라의 실정에 맞는 경제발전방향을 추구할 수 있는 광범한 공간이 존재하며 다양한 변형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방향은 현재의 시장경제체제에 사회적 모델을 접맥시키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자의 사회적 시민권을 인정하는 정부-정당-재벌-노동간의 사회협약을 거론했다. 최 교수는 “만약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제안이 지역감정이라는 잘못된 개혁목표설정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협약을 내용으로 제안되었다면, 나는 이를 지지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 교수들의 발표는 2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올림피아 호텔에서 들을 수 있다. 발표 뒤에는 저녁 9시까지 참석자들이 함께 하는 대화모임이 열릴 예정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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