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료 개선 백지화 후폭풍
“누가 이 정부 신뢰하겠나”
진보-보수 한목소리로 성토
“누가 이 정부 신뢰하겠나”
진보-보수 한목소리로 성토
‘고소득 직장인 등 45만명 반발 우려…602만가구 혜택 무기 연기’(조선일보), ‘17개월 끈 건보 개혁…고소득자 불만 살까 포기’(경향신문), ‘부자에 더 걷으려던 건보개편 포기’(매일경제), ‘연말정산 파장 놀랐나…건보료 무임승차 개편 백지화’(중앙일보).
정부가 건강보험료(건보료) 부과 방식 개편을 사실상 ‘백지화’한 데 대해 29일 거의 모든 언론이 한목소리로 이를 비판하는 보도를 내놨다. 전문가, 시민사회단체, 야당도 사회보장제도의 뼈대를 이루는 건보료 체계의 대수술을 하루 새 손바닥 뒤집듯 한 정부의 행태를 두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번 건보료 개편의 당위성과 방향을 적극 옹호했다. 개선안 발표을 강행할 경우 ‘고소득층 건보료 폭탄’ 등 자극적 언론 보도로 증세 논란이 다시 번질 것이라는 정부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45만명 안팎의 고소득층한테 보험료를 더 거둬, ‘송파 세 모녀’로 대표되는 저소득층 600여만명의 부담을 더는 내용의 건보료 부과 방식 개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그만큼 높았다는 방증이다.
파문이 커지자 청와대는 이날 “백지화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갖고 추진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혔으나 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건보료 개편 백지화 논란은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기획단’(기획단)이 개선안을 내놓기로 한 29일을 하루 앞두고 “올해 안에 건보료 개선안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폭탄선언을 하면서 비롯됐다. 복지부가 꾸린 기획단은 2013년부터 3년째 약 30차례의 크고 작은 회의를 열어 7개 개선안 모형을 갓 완성한 참이었다.
문 장관의 건보료 개편 백지화 선언이 나오자 1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기획단에서는 정부의 무책임·무원칙 행태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기획단 위원인 김진수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정부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갑자기 추진하던 정책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도대체 누가 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건강보험 부과체계의 문제가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힘들게 개선안을 만들어놓고 ‘없던 일로 하자’니 황당하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다른 기획단 관계자도 “정부가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데,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 여부처럼 중요한 결정을 이렇게 즉흥적으로 내리는 걸 보면 나라에 질서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정부가 진보와 보수, 어느 쪽도 반대하지 않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을 뒤엎으며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아직 충분한 준비가 안 돼 있다. 추가 부담이 있는 근로소득자 등은 불만이 클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을 보면, 국정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무적 판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문 장관은 백지화 선언 하루 전인 27일 출입기자들을 만나 29일 이후로 예정된 개선안 관련 보도의 연기를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건보 부과체계 관련 엠바고(특정 시점까지 보도 연기)를 두번이나 조정했다. ‘제 뜻은 아니었으나’ 상황이 그렇게 됐다. 한번만 더 연기해달라. 부과체계를 개편하려면 청와대나 국회를 설득하며 가야 하는데, (증세 논란 등으로) 지금처럼 사회 분위기가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는 (청와대 등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은 청와대를 무시한 채 내 뜻대로 추진하기 어렵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았다.
반면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하기 위해 좀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판단은 전적으로 (복지부) 장관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위원장은 “정부가 연말정산 논란을 계기로 고소득 직장가입자에 대한 보험료 부담 강화 방안을 포기하려는 것”이라며 “건보료 부과체계를 소득 중심으로 개편한다는 방향의 개선안은 정말 개혁적인 내용이었는데 정부의 실책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문 장관의 백지화 선언을 통해 역설적으로 건보료 개선에 관한 여론의 흐름이 확인된 만큼, 정부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을 다시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획단 위원으로 참여한 사공진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보건복지 이슈와 관련해 이렇게 한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는데, 진보든 보수 언론이든 모두 기획안에 찬성하고 있다”며 “그래도 (정부가) 이번 기회에 여론의 흐름은 확실히 파악했을 테니, 이를 부과체계 개편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백지화가 아니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토해서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성진 박수지 김양중 석진환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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