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철 헌법재판소 소장(9명 중 가운데)이 12월19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재 대심판정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을 읽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내란관련 모임 참석 안했다”
소송 낸 2명 이름 결국 삭제
기초 의원 수 등 8곳도 고쳐
소송 낸 2명 이름 결국 삭제
기초 의원 수 등 8곳도 고쳐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12월19일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때 ‘내란 관련 모임’ 참석자로 잘못 지목한 이들의 이름을 결정문에서 삭제했다. 헌재가 결정문을 수정하는 일은 아주 이례적이다. ‘연내 선고’라는 방침에 맞추려고 재판관과 연구관들이 충분한 검토 없이 결정문에 나오는 주요 사실관계를 ‘짜깁기’했다는 점을 자인한 조처로 풀이된다.
헌재는 ‘내란 관련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돼 있는 윤원석 <민중의 소리> 대표와 신창현 전 진보당 인천시당 위원장의 이름을 결정문에서 삭제했다고 29일 밝혔다. 두 사람은 진보당 경기도당이 주최한 2013년 5월 ‘합정동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헌재는 결정문에 이들을 참석자로 명시했다. 이 모임은 검찰이 이석기 전 의원 등을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하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됐고, 헌재가 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는 데도 중요한 근거로 쓰였다.
헌재 관계자는 “오류 사실이 보도된 날부터 재판관들이 결정문을 검토했고, 신씨 등이 소송을 제기하기 전인 22일 재판관 9명이 평의를 열어 해당 부분 등을 고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또 진보당 당원교육위원회의 위원이 아닌데도 위원으로 표현된 이아무개씨와 안아무개씨에 대해서도 ‘위원’이라는 직함을 뺐다.
결정문 오류는 더 있었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진보당은 기초의회에 지역구 의원 31명과 비례대표 의원 3명을 당선시켰지만, 결정문에는 “기초 지역구 의원, 비례대표 의원 3인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고 표현했다. 정당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정당 등록요건이 되려면 “시·도당별 1천인 이상”이 돼야 하지만 ‘시·도당별’이라는 설명을 빠뜨렸다. 이석기 전 의원의 1심 선고일을 설명하면서 ‘2014년’을 ‘2017년’으로 잘못 적기도 했다. 헌재는 이렇게 모두 9군데를 삭제·수정했다고 밝혔다.
자기 이름이 엉뚱하게 올라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신씨는 12월31일부터 헌재의 사과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해왔다. 신씨와 윤씨는 26일 헌재 재판관 9명 가운데 진보당 해산 결정에 찬성한 8명과 국가를 상대로 6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신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결정문을 고친 것은 잘된 일이다. 하지만 헌재가 이에 대해 사과 한마디라도 하는 등 훼손된 명예를 회복해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소송을 취하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헌재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나 행정수도 위헌 등 중요 사건에서 이번처럼 어처구니없는 결정문 오류를 내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고유명사나나 숫자를 잘못 적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중요 사실을 잘못 쓰거나 왜곡하는 오류는 전례가 없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고법원이 낸 결정문에서 엉뚱한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오류를 범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정문을 작성하면서 시한에 쫓기고 서둘렀다는 걸 방증한다. 진정 국민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정정하기 전 사과부터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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