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신뢰성 손상 우려” 내세워
‘조사 땐 사표 불허’ 규칙 비켜가
“사태 무마에만 급급” 비판 일어
이정렬 전 판사 “내 명예 훼손” 고소
‘조사 땐 사표 불허’ 규칙 비켜가
“사태 무마에만 급급” 비판 일어
이정렬 전 판사 “내 명예 훼손” 고소
인터넷 포털에서 익명으로 1만건가량의 악성 댓글을 달아온 이아무개 수원지법 부장판사가 사표를 내자 대법원이 곧바로 수리했다. 비위 조사가 진행중이거나 징계가 청구된 상태에서는 기본적으로 사표를 수리할 수 없는데, 대법원이 사태 무마에 급급해 성급히 사표를 받아들였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법원은 “이 부장판사가 13일 수원지법에 사표를 제출해 16일자로 수리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2008년부터 네이버와 다음 아이디 5개로 세월호 유족, 호남지역민,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 등을 원색적으로 비방하거나 저주하는 댓글을 달아온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대법원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에서 법관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댓글을 올려 직무상 위법행위라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도 “이 부장판사가 맡은 종전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성마저 의심받는 상황에서 법관직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에 더 큰 손상을 줄 수 있다”고 사표 수리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대법원 규칙을 교묘히 비켜간 것이다. ‘법관의 의원면직 제한에 관한 예규’에는 △직무에 관한 위법행위로 △징계가 청구되거나 △수사기관으로부터 수사중임을 통보받은 때 △감사 담당 부서에서 비위와 관련해 조사중일 때는 의원면직(사표)을 허용하지 않게 하고 있다. 단, ‘법관직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것이 사법에 대한 공공의 신뢰를 심하게 해친다고 판단’되면 예외적으로 사표 수리를 허용한다. 대법원은 이 부장판사가 법관직을 유지하면 재판 신뢰에 타격을 줄 수 있어 사표 수리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징계를 받은 뒤 사직 의사를 철회하면 퇴직을 강제할 근거가 없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장판사는 사법연수원 25기로 재임용 심사가 2019년에 예정돼 있다. 그때까지 원칙적으로 해임은 불가능하다. 징계는 최고 정직만 가능하고, 금고형 이상을 선고받아야 파면할 수 있다.
하지만 댓글 가운데는 자신이 재판을 맡은 피고인을 비방하는 글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직무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도 대법원이 주말을 틈타 사표를 수리한 배경에 의구심도 일고 있다. 한 판사는 “징계로 이어져 공론화가 지속되는 데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태도는 최민호 수원지법 판사가 ‘명동 사채왕’한테서 수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와 정반대다. 의혹이 불거졌을 때 대법원은 ‘당사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고, 그는 계속해서 재판 업무를 보다가 열달 만에야 구속됐다. 대법원은 뒤늦게 사표 수리를 유보하고 정직 1년 처분을 내렸다. 이번에는 비위 내용을 조사한 지 사흘 만에 사표를 수리했다.
논란이 더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대법원의 바람과 달리 파장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부장판사의 비방 댓글의 대상 가운데 한명인 이정렬 전 부장판사가 명예훼손 혐의로 그를 경찰에 고소했기 때문이다. 이 전 부장판사는 “비겁하게 익명으로 숨어서 저열한 언어로 나를 비방·모욕한 점, 부도덕에는 눈을 감고 오히려 약자를 짓밟은 점 등 그분의 언사가 나를 무척 불쾌하게 했다”며 “대법원이 이 부장판사의 사직서를 즉각 수리해 버린 한심한 행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이 전 부장판사가 현직에 있을 때 ‘가카새끼 짬뽕’이라는 표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논란이 일자 “페이스북 치워놓고 네 일이나 좀 열심히 하지 그러셨삼”이라고 하는 등 비난 글을 올렸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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