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묵 감독.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5년 1월14일, 지난 11년간 독립영화를 만들며 살아온 내 삶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하루. 그 전까지 살아온 배경이 연극의 스테이지 전환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낯설고 두려운 무대가 등장했다. 한번 발 딛고 들어서니 다시 익숙했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곳, 1년6개월의 감옥살이가 시작됐다.
S#1. 2015년 1월14일 오전 6시: 꿈
철창에 갇힌 내가 보인다. ’아직 하루가 남았을 텐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밖에 있는 친구들에게 떠난다고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잠깐 나갔다 올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외쳐본다. 하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다. 절망감에 휩싸여 바닥에 주저앉으니 일순간 몸이 진흙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얼굴까지 흡수돼 호흡을 할 수 없게 될 쯤 신음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오전 6시. 10시 재판이니 수감되기까지 4시간이 남았다.
S#2. 오전 7시: 망원 유수지
집 근방의 한강 유수지를 찾아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산책을 즐겼던 곳이다. 오늘은 특별히 ‘마지막’ 일출을 보기 위해 왔으나 흐린 날씨 탓에 구름만 실컷 보았다. 한강을 따라 걸으며 ‘마지막’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쉬었다.
선고일이 확정된 날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자유로운 행동에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버릇이 생겼다. 또한 동시에 이전에 없이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두게 되기도 한다. 마치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이러할까 싶은 나날이었다. 성산대교 앞에 서서 마지막 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갔다.
S#3. 오전 8시: 집
식탁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돼지고기 김치찌게가 차려져 있다. 병역거부를 선언하며 힘든 고비를 함께 겪어온, 이제는 가족같은 동거인들이 정성스레 차려준 마지막 아침상. 다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여전히 다들 오늘부터 내가 수형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징역에 대한 현실감이 없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4년간 같이 지낸 두 동거묘 ‘돼지’와 ‘미고’에게도 작별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서려니 발이 잘 떨어지니 않았다. 내년에나 다시 올 수 있을 집을 ‘마지막’으로 둘러본다.
S#4. 오전 9시30분: 서부지방법원
계획했던 시간보다 늦게 법원에 도착했다. 법원 건물 옆에서 마지막 담배를 물고서 불을 붙인다. 앞으로 1년6개월 동안은 강제적으로 금주·금연을 해야 한다. 마지막 한 모금의 타르를 혀끝에서 음미해본다. ‘이 좋은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만…’
S#5. 오전 10시: 406호 법정
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406호 법정 앞에는 떠나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일찍부터 와서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함께 영화를 만들어온 동료들과 독립영화인들, 심지어 부산에서 찾아와준 고향 친구들까지…. 걱정을 끼친 미안함과 동시해 걱정해주어 고마운 바보같은 마음이 들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부재의 시간을 앞두고서 친구들과 포옹을 나눈 뒤 법정에 들어섰다.
방청석에 대기하고 있으니 곧 나를 호명한다. 그때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잡고 있던 연인과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고서 피고인석으로 나갔다. 간단히 본인 확인을 한 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고 묻는다.
“저의 선택에 변함 없고 후회 없습니다. 그간 재판 일정을 배려해주신 재판부에 대한 감사와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해준 친구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최후 진술이 끝나자 판결이 내려진다.
“징역 1년6월을 선고한다”
선고와 동시에 대기하던 교관이 내 팔을 붙들고 피고인석 뒤에 위치한 문으로 안내했다. 이미 머리 속에서 무수히 시뮬레이션하며 그려보았던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당황했었다. 방청석에 있는 친구들도 놀란 기분일 것 같아 그들을 향해 웃으며 손인사를 보냈다.
S#6. 1월14일 오전 10시20분: 구치감
법정 문 뒤로 오니 그곳에는 한 발의 간격을 두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50여명가량의 죄수복을 입은 재소자들이 구치소에서 출정 나와 재판 대기 중인, ‘구치감’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법정이 엄숙했다면, 구치감은 음습했다. 마치 도살장의 가축을 보는 듯 암울함과 불편한 긴장감이 지배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단테의 <신곡>.
‘이곳에 들어온 자, 그 어떤 희망도 포기하라.’
지옥문에 들어선 표정으로 서 있으니 교관이 서류를 보고는 묻는다.
“병역법 위반이야?”
“네.”
그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며 미소를 보인다. 난 영문도 모른 채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래, 잘 왔어.” 이 말과 함께 팔목에 수갑을 채운다.
‘잘 왔다니’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이런 태도가 일반적으로 법정구속인을 맞이하는 그의 방식인가 싶어 계속 지켜봤으나 그렇진 않았다. ‘막 구속된 이를 놀리려던 것은 아닐 텐데… 그럼 나를 환대해준 건가?’ 그의 진의는 알 수 없지만, 구속 후 처음 들은 말 치고는 따뜻한 인사였다.
S#7. 정오: 호송버스
출정 온 이들의 모든 재판이 끝나자 채워진 수갑 위로 포승줄이 묶이기 시작한다. 생애 처음 맞는 구속, 첫 수갑, 그리고 첫 포승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마지막’이었던 것이 이제부터 겪게 될 모든 일들 앞에는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될 것이다.
포승줄에 묶인 채 호송차량에 탑승한다. 버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가 없었다. 유령의 시점이 있다면 이와 같으리라. 그렇게 바라본 도시 풍경은 묘하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S#8. 오후 1시: 남부구치소
경직된 직사각형 디자인의 잿빛 건물, 과거 중·고등학교의 갑갑한 건축구조를 닮은 구치소 안. 건물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시시티브이(CCTV)가 긴장감을 더한다.
먼저 입고 온 의류와 신발을 벗고 소지품과 기본 인적사항을 검사한다. 이후 교관의 안내에 따라 샤워를 하면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칙칙한 죄수복으로 갈아입게 된다. 이 와중에 수감되면 사용하려고 챙겨온 노트, 수건, 내복 등은 반입불가라 한다. 어차피 수형 중 자비로 구매가 가능한 물품인데, 왜 반입이 안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당분간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넘쳐날 것이다. ‘처음이니까’. 그럴 때마다 ‘왜’라고 질문하면 괴로운 징역살이가 될 거라 생각하니 갑갑함과 막연한 두려움이 다가온다.
S#9. 오후 3시: 접견실
“김경묵씨?”
“네?”
방문 옆 스피커에서 나를 호출하는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접견입니다. 나오세요.”
굳게 잠겨있던 철문이 철컹하는 소리와 동시에 열린다. 앞에서 기다리는 교도관을 따라 한참 긴 복도를 지나 접견실에 도착했다. 구치소에 수감된 바로 당일부터 외부접견이 가능했다. 단 하루 한번, 10분 동안만.
전광판에 나의 수감번호가 뜬다. 안내에 따라 ‘9번 방’으로 가니, 아크릴 유리문 밖으로 하우스메이트들이 보인다. 나를 발견한 친구들의 눈가에는 금세 닭똥같은 눈물이 흐른다. 칙칙한 죄수복을 입은 모습이 처량해 보였나보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하고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나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바늘구멍의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 유리벽에 대고 대화해야 하는 면회 조건은 슬픔을 더욱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나의 현실이었던 저 바깥의 풍경이 이제는 신기루와 같이 멀어져 철창 안의 구치소가 나의 새로운 현실이 되었다. 어느새 오늘 아침에 꾸었던 악몽 속으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손만 뻗으면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고 발을 내딛으면 걸어나갈 수 있을 듯 했지만, 이제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서 ‘이곳’과 ‘저곳’의 경계는 분명하게 나뉘어졌다. 이 명징한 경계 너머로 슬퍼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제서야 나의 수형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턱도 없이 짧은 접견이 끝나고 일어섰다. 문밖 친구들의 실루엣이 사라지고나서야 참았던 눈물이 나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이후로도 접견이 있을 때마다 나의 행색을 처음 보는 친구들은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나 역시 면회 전에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갔다가 끝마치고 나면 대기실에서 한동안 먹먹해진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S#10. 1월17일 오후 3시: 신입방
구치소에 수감된 지 사흘이 지났다. 재판을 받고 실형이 확정된 이들이 수감되는 교도소와는 달리, 구치소는 미결수 상태로 재판 중인 이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다. 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기간이 남았기에 구치소에서 한두달간을 지내다 근방의 교도소로 이감을 가게 된다.
구치소에 수감이 되면 먼저 ‘신입방’이라는 곳에서 닷새가량 지내며 수형생활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두평 남짓한 공간에서 다섯명이 붙어 지내야 했지만, 다들 처음 실형을 선고받은 뒤 정신적인 충격에 항소를 준비하느라 지쳐 있어 별달리 부딪힐 일은 없었다. 항소를 준비하는 이들은 자연스레 하루빨리 이곳을 나갈 기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형량이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한 병역거부의 경우에는 항소하여 무죄가 나온다 할지라도 상고에서 다시 유죄로 확정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번도 예외는 없었다. 말하자면 내게는 항소할 명분이 없었다.
S#11. 1월31일 오후 5시: 혼거방 사람들
보통 정치적인 이유로 수감된 이들은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독거방에 수용된다. 그러나 나와 같은 병역거부자는 정치범이 아니라 ‘잡범’으로 분류되어 여러 사람과 함께 지내는 혼거방(본방)으로 간다. 신입방에서는 다들 초범이라 서로 조심하며 생활했지만, 본방으로 방을 옮긴 뒤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본방에는 짧게는 두세달 길게는 일년 이상 구속되어 재판 중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선고 확정이 나지 않아 하루하루 불안과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지내고 있었다. 세평가량의 공간에서 일곱명의 성인 남성들이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환경의 압박은 만만치 않다. 게다가 나의 경우는 ‘병역거부’라는 죄명이 그보다 더한 문제가 되었다.
으레 방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무슨 죄로 얼마의 형량을 받고 온 것인지 묻기 마련이다. 난 병역법 위반이라 답했다. 반사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냐’고 묻는다. 한해 700여명가량의 병역거부자가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되는 실정인 만큼, 구치소 내에서도 병역거부자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군사훈련을 거부한 이들과 달리 나처럼 개인의 신념을 이유로 수감된 사람은 극히 소수다. 지난해에는 7명이, 올해는 아직까지 나만 수감된 상태다. 여호와의 증인도 아니면서 군복무를 거부(그들에게는 병역을 ‘기피’)한 나에게 온갖 힐난이 빗발친다.
“사내자식으로 태어나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저버리고 싶으면 대한민국 국민 자격이 없다.”
“너처럼 다 군대 가지 않으면 이 나라는 누가 지키냐? 너 같은 놈들은 전쟁 나면 가족도 버리고 먼저 도망갈 궁리를 하겠지.”
‘한국은 북한과 전쟁 중인 나라’라며 격렬하게 반응하는 두사람이 있었다. 사기로 구속된 40대 아저씨는 이후로도 유난히 군대를 소재로 나를 괴롭혔다. 나이도 가장 어리고 방에서도 신참이라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난 잠잠히 듣기만 했다. 어느 날 그가 가족까지 들먹이며 ‘군대 안 가니 효자라고 부모님이 좋아하더냐’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올라 한마디 응수했다.
“저는 군대가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군사력이 강하고 방위산업에 투자를 많이 하는 나라일수록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킵니다.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과 권력 때문이죠. 저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은 채 국가의 노예마냥 군 복무를 강제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처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사장님의 사기죄를 가지고 떠들어대지 않듯이 서로의 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당하게 반박했지만 ‘도대체 왜 내가 저런 미친놈으로부터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싶어 서럽고 분한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그날의 논란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병역기피자’로서 난 지나치게 당당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재향군인회 소속 임원이었고, 방의 또 다른 이는 본인을 포함하여 집안의 삼부자가 특전사 출신의 군인 가족이었다. 그날의 발언으로 인해 두사람에게 미운털이 확실히 박히게 됐다.
그들에게 군 경력은 희생인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의 근원이기도 했다. 반면 군대를 경험하지 않은 나와 같이 ‘정신상태가 글러먹은 남자’는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던 것이다.
이후로도 재향군인회 아저씨는 방 고참이라는 명분으로 나에게 ‘계집애 같다’며 ‘남자답게 행동하는 법’을 매일같이 전수해주셨다. 운도 지지리 없지 ‘어떻게 이런 군인 사랑방에 갇히게 되었는지’ 신세 한탄을 해본들, 다수의 남성이 현역 제대를 한 사회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내가 특이한 경우이고 그들이 대한민국의 평균일 것이다(반면에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아주 싫어했는데, 자신이 이번 정권 때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겨울에 수감되었으니 지인들은 추위로 인해 고생할까 걱정했지만, 막상 들어와 생활해보면 어디에서 지내건 시설보다도 어떤 사람과 함께 지내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된다. 사람 리스크가 가장 큰 곳을 뽑자면 군대와 감옥이 아닐까 싶다. 싫다고 나가거나 그만둘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S#12. 오후 7시: 징역의 군사주의
“군대 가서 고생 안 하면 군대가 아니다”라고 흔히 하는 말에서 군대를 ‘징역’이라 바꾸어도 낯선 감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징역 생활이 군사화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남성 중심인 대다수의 대한민국 조직문화가 근본적으로 군대식 계급체계를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기에서는 하루 세번 인원 점검을 하는데 군대의 점호와 그 형식이 거의 똑같다. 교관이 방 번호를 부르면 방안에서 행과 열을 맞춰 정자세로 앉아 남자(군인)다운 목소리로 본인의 번호를 외쳐야 한다. 이때 목소리가 작거나 입고 있는 관용복과 방안의 관물대, 모포 등의 각이 살아있지 않으며 훈계를 들어야 한다(이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징벌의 사유가 될 수도 있다). 샤워는 일주일에 한번 15분간, 외부접견은 한달에 네번 10분간, 운동은 하루 한번 30분간으로 엄격하게 지켜지지만, 이마저도 공휴일에는 모두 불가능하다.
관의 관리체계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재소자의 관계 역시 방에 들어서는 순간 명확히 서열이 정해진다. 중요하게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 방에 먼저 들어온 순서와 나이의 역학으로 등급이 매겨진다. 본인이 ‘빵잽이’(수차례 교도소에 수용된 자)라면 이 역학을 무시하고 방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도 있겠으나, 이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 두가지로 서열이 정해진다.
나이로도 ‘짬밥’으로도 가장 아래 순위인 난 ‘막둥이’라 불리며 하루 종일 긴장된 상태로 방의 쫄따구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시어머니보다 더 호되게 잔소리를 해대던 재향군인 아저씨는 군기가 잔뜩 잡힌 내 모습을 보며 흡족해하셨다. 여자 사동에 수감된 경험이 있는 지인으로부터 듣기로는 여 사동은 이와 같이 경직된 군사문화는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유별나게 군사화된 남자 수형소가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군대라는 남자들의 집단문화가 학교에서부터 직장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듯하다.
군사주의 문화에 순응하기 싫어 병역을 거부한 내가 순수 마초 남성들의 세계인 감옥에 걸어 들어온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군대 아니면 감옥이라는 대안 없는 현실에서 그 두 세계는 목적하는 바는 다르나 쌍둥이와 같이 서로가 닮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S#13. 2월2일 오후 9시: 낯선 천장
오후 9시 취침, 오전 6시 기상. 감방의 밤과 낮은 바깥보다 일찍 찾아온다. 취침시간에도 재소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백열등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나의 취침 자리는 화장실 앞, 쓰레기통 옆이다. 수감된 지 벌써 4주가 다 됐지만 여전히 잠들기 전 바라보는 천장은 낯설기만 하다. 아직까지도 바깥세상을 떠올리면 이곳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럴 때면 내가 어쩌다 이 낯선 천장을 마주하게 되었는지 상념에 젖어들고는 한다.
지난 10년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망설임이었다. 병역거부에 따른 징역살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불복종으로 인한 국가의 처벌이 무섭지 않은 강철의 투사이기보다는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무참히 짓밟는 군체제가 두려워 여기까지 오게 된 나약한 인간이었다. 실상 신체의 자유를 감금당한 채 낯선 사람들과 장시간 보내야 하는 감옥은 군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병역거부자들이 선택한 것은 군대 대신 감옥이 아니라 국가 폭력의 공포와 무력한 내재화를 거부한 것이고, 그들은 그에 따른 책임을 받아들였다. 모든 병역거부자들의 바람처럼 언젠가는 이 땅에도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어 그들의 ‘희생’이 진정한 평화체제를 위한 밑거름이었음을 인정받을 날이 올 거라 본다.
돌이켜보면 내게 병역거부는 강제적 군복무라는 막다른 길목에서 마주쳤던 무력과 불안, 환멸과 분노, 외로움과 고립감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택했던 결과였다. 어쩌면 내가 궁극적으로 선택한 것은 이전의 나를 비우고 새롭게 태어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앞으로 감옥에서 겪게 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두렵고 막막하지만, 또한 뜻하지 않은 삶의 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김경묵 독립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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