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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가해자는 아빠·엄마…그러나 그들도 한때 피해자였다

등록 2015-05-06 22:06수정 2015-05-07 16:52

일러스트 박민희
일러스트 박민희
[탐사기획] 부끄러운 기록 ‘아동 학대’ ④ 가해
여자가 죽은 아이를 버린 때는 2011년 겨울이었다. 세살 지훈(가명)이는 숨이 끊어지고도 보름 동안 집 안에 방치됐다. 부모는 주검을 비닐로 싸 상자에 넣고 테이프를 돌려 붙여 집 근처 공터에 버렸다. 아이는 여자가 낳은 둘째 아이였다. 자식의 주검을 처리하던 당시, 여자는 넷째를 임신중이었다. 사건 당일, 새벽 3시에 잠이 깬 지훈이는 방문을 걷어차며 울었다. “마이쭈(과일맛 캐러멜 사탕) 먹고 싶어요.” 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 방 두개짜리 집, 세살 아이는 혼자 작은방에서 자고 있었다. 지훈이의 형과 여동생은 부모와 함께 안방에서 잠을 잤다. “떼가 심하고 식탐과 공격성이 강해서 지훈이만 따로 재웠다”고 여자는 말했다.

반지하 월세 3남매와
뱃속엔 넷째
아빠는 보채는 아이에 충동적으로 주먹질 했다
그 엄마를 만났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지 않자 잠에 취한 여자가 남편에게 말했다. “어떻게 좀 해봐.” 밤마다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와 밀린 월세 때문에 집주인이 이사를 가라고 한 참이었다. 작은방으로 건너간 남편은 아이의 머리, 가슴에 주먹질을 했다. 아이는 곧 사망했다. 여자는 법정에서 “당시 감기약을 먹고 깊이 자고 있어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의 아빠는 상해치사와 사체유기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현재 복역중이다. 하지만 엄마는 기소가 유예됐다. 남은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죽은 지훈이의 네살짜리 형, 젖먹이 여동생, 뱃속의 아이까지 모두 셋. 엄마가 있어야만 아이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기소의 권한을 가진 검찰의 판단이었다.

남은 아이들이 있어 남편의 형량도 줄었다. “부양할 너무나도 어린 두 아이에게 아빠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 중형을 선고하면 피고인의 가정에 가혹한 결과가 발생하는 점 등을 헤아려 관대한 처분을 해달라”는 것이 남편의 변호인이 법원에 낸 의견이었다. 법원도 판결문에서 “피고인 이외에는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는 점”을 참작해 형을 정했다고 밝혔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발생한 아동학대 사망 사건의 가해자 112명(5명은 미확인)을 분석하니 10명 중 8명이 친부모였다. 가해자의 평균 나이는 34살, 피해자 평균 나이는 4.6살이다. 가해자 직업은 무직, 주부, 자영업, 일용직 순으로 많았다. 자신의 아이를 때리고, 짓밟고, 외면하고, 죽음으로 몰고 간 아동학대 가해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4년 전 지훈이 살인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로서 가해자였던 부모를 직접 찾아 나섰다. 당시 꽁꽁 얼어 있던 주검의 모습을 떠올리며 여자와 남은 아이들을 수소문했다. 지훈이 사망 뒤 여자를 면담했던 아동보호전문기관, 남은 아이 양육을 이유로 기소를 유예했던 검찰이나 경찰도 현재 그 가족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탐문을 거듭한 끝에 그들을 찾았다. 집 앞에서 기다리다 4월7일 드디어 여자와 마주쳤다.

일러스트 이강훈 leebido@daum.net
일러스트 이강훈 leebido@daum.net
그들도 어릴 적엔 피해자

그동안 이사를 거듭했던 그는 아이들과 함께 볕이 더 들지 않는 지하 방에 살고 있었다. 보증금 400만원에 월세 25만원, 방 두개짜리 집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그만 비켜가는 듯했다. 그에겐 휴대전화도 없었고, 회색 티셔츠는 7년째 거의 매일 입어 보풀이 일어난 상태였다.

무엇보다 4년 전과 비슷한 것은 여자가 말하는 ‘자녀의 상태’였다. “지훈이도 이랬어요. 정말 힘든 아이였죠. 지수(가명)가 지훈이 비슷해요.” 여자는 대뜸 죽은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사건 당시 뱃속에 있던 넷째, 이제는 네살이 된 지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여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엊그제는 소주 세 병 먹고 그냥 지수만 데리고 죽을까 싶어 연탄까지 한장 사놨어요.”

아이에 대한 여자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있었다. “보통 애가 아니에요. 거짓말에, 도벽에, 머리 회전은 어떻게 빠른지. 벌을 세우고 때려도 절대 잘못했다는 소리를 안 해요. 한두시간 벌을 세우면 오줌을 그냥 싸버려요. 팬티 빨게 하고 다시 벌세우면 또 싸고요. 걔 떼쓰고 우는 소리 때문에 쫓겨나서 얼마 전에 이사도 했어요. 걔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도저히 감당이 안 돼요.”

지수와 지훈이는 계속 겹친다. “지훈이도 이랬어요. 떼를 심하게 부리고 식탐이 심하고 공격성이 강했죠. 그래서 따로 잤어요. 죽던 날도 새벽에 깨서 마이쭈 달라고 하길래 그냥 자라고 하니까 울고불고 발로 문을 차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래서 때린 게 그렇게 됐어요.” 밤마다 집 밖으로 들리는 울음소리, 식탐, 공격성, 거짓말, 엄마에게 받는 미움의 정도까지 둘은 비슷했다.

지훈이는 ‘힘든 아이’였기에 부부는 아이를 토요일 밤까지 맡아주는 어린이집에 보냈다. 지수도 밤 11시까지 돌봐주는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다. 둘 다 엄마와 따로 자야 했다. 밤늦게 집에 와서 다음날 아침까지, 짧은 시간인데도 늘 새벽이면 사달이 났다. 지수도 지훈이처럼 새벽에 냉장고 주변을 맴돈다. “식탐이 꼭 시아버지를 닮았어요. 그래서 더 화가 나요.” 분노의 방향은 어느새 시집을 향하고 있었다.

지수를 데리고 가 얼마 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의사가 욕구불만, 애정결핍이라는 뻔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애한테 위계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고요. 엄마고 뭐고 그런 게 없다는 거죠.” 그는 이제 자신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상담비가 비싸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4년 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남편이 구속된 뒤 만삭이었던 여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시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지수를 낳아 곧바로 아동복지시설에 입소시켰다. 6개월 뒤 도로 데리고 왔다. “모성애 때문에 어떻게든 내가 키우자고 데려왔는데 그때 아이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나봐요.”

시집의 도움은 더는 받을 수 없었다. 시아버지는 아기 업은 며느리에게 뜨거운 라면 냄비를 집어던질 정도로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정한 식사 시간에 상차림이 5분만 늦어져도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을 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죽은 손주 앞으로 나온 장례 지원금을 써버렸다. “장례비를 써버린 것 때문에 당시에 내가 욕을 먹었어요.” 여자는 분통을 터뜨렸다.

여자의 남편, 지훈이 아빠는 그런 가정에서 자랐다. 시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에 취해 부인과 세 아들을 때리고 집안 물건을 부수었다. 생계는 시어머니가 식당 일을 해서 꾸려나갔다. 남편은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자동차 부품 공장, 가구 공장, 단란주점 등을 떠돌며 일했다. 22살 때는 친구와 차 문을 따고 들어가 물건을 훔치려다 걸려 특수절도 미수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기도 했다.

죽은 지훈이와 겹치는 지수
“거짓말, 식탐, 도벽까지…힘든 아이”
네살 지수를 시설에 보내며
“나도 사람이에요” 엄마는 울었다

어릴 적 가정폭력 경험으로
사회경제적 스트레스와 고립
“아이들과 나를 떼어놓으려 해”
보호기관에 연락않고 숨어 살았다

여자는 남편과 20대 초반에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시달린 것도, 중학교를 중퇴한 것도, 이후 기댈 곳 없는 세상에서 험하게 살아온 것도 두 사람은 비슷했다. 남편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욕해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무기력한 사람이었지만, 여자는 “그래도 나를 때리지는 않으니까, 그거 하나로 같이 살았다”고 말했다.

지훈이가 죽던 해, 여자는 서른살이었다. 30년 인생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여자는 아버지에게 매 맞던 어린 시절, 가출해서 거리를 떠돌던 열다섯살 때, 그리고 아이 사망 사건 직후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말하다 가끔 그는 화병에 걸렸다며 가슴팍을 쳤다.

“친정아버지가 일주일에 5일은 두들겨 팼어요. 하루는 엄마가 길거리에서 맞다가 갈비뼈가 부러진 채로 쓰러져 있었는데 경찰을 불렀더니 ‘부부 문제니 잘 해결하라’고 말하고 가버리더라고요. 도움받을 곳이 없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가정 일은 가정 안에서 해결하라’는 생각은 15년 전에 더 강했다. 엄마가 집을 떠나고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된 여자는 열다섯에 가출을 했다.

“열다섯에 거리에서,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여자는 술집, 다방 등에서 일을 하며 살아남았다. “술집에서 일하다가 미성년자라서 경찰 단속에 걸린 적도 두번 있어요. ‘가족 인계 조치’가 끝이더라고요.” 술을 토하려다 생긴 버릇은 이제 폭식증으로 남았다.

그러다 만난 남편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내 말고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친구도 없었다. 일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하루 종일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서 일자리를 구해줬다가 “네 남편은 일하러 와서도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더라”는 원망을 듣기도 했다. 일하러 갔다 온다고 나가서 연락이 없으면 여자는 아이를 업고 동네 피시방에 가서 남편을 찾아오곤 했다고 한다.

‘학대당한 경험’과 ‘고립’은 아동학대 가해자의 주요 특성 중 하나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이 2013년 한해 동안 확인된 아동학대 가해자 2만1788명을 분석한 결과 4883명(22.4%)이 ‘사회경제적 스트레스 및 고립’을 겪고 있었다. 393명이 어린 시절 자신도 누군가에게 학대당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폭력적인 부모와 집 안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일은 어린아이들에게 출구를 알 수 없는 지옥과 다름없다.

지훈이가 죽던 날을 이야기하며 여자는 남편을 원망했다. “그날 돌도 안 된 막내 분유값이 없어서 친정엄마에게 연락해 아쉬운 소리를 했어요. 이사도 가야 하는데 보증금도 다 까먹어서 돈도 없었고요. 그런데도 남편은 맨날 피시방에나 가 있으니….” 하지만 아이를 때린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원망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애들은 호되게 혼내서 기를 꺾어놔야 한다”거나 “때리지 않고 어떻게 아이를 키우나”라는 생각이 확고했다. 오히려 아이의 죽음과 관련해 벌을 받게 된 남편이 “불쌍해 보였다”고 말했다.

사건 직후 여자는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 타인에 대한 불신만 키우며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출산 뒤 시집을 떠난 그는 “애들도 어디 못 나가게 하고 숨어 살았다”고 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의 도움도 거절했다. “상담원이 자꾸 나를 문제 있는 사람 취급하더라고요. 갓 낳은 지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이랑도 떼어놓으려고 해서 일부러 연락을 끊었어요.” 동생의 죽음을 목격했을지도 모르는 지훈이 형에 대한 지원도 이뤄지지 않았다.

여자를 만나고 온 뒤 일주일이 지났다. 사달이 났다. “며칠 전에 지수가 밤 11시30분에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는데, 자라고 이불 깔아주고 다른 방에 가서 자고 있자니, 새벽에 애가 제 방에 들어와서 화장품 다 끄집어내고 냉장고 문 열어 김치를 퍼 먹고….” 여자는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그날부터 지금껏 지수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벌을 주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안 친정어머니가 “이러다간 애한테 허튼짓할 거 같다”며 당분간 아이를 맡기로 했다. 여자는 지수를 아동보호시설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입소하러 가는 날, 지수는 양갈래로 머리를 예쁘게 묶고 분홍색 옷을 입었다. 차에 탄 아이는 한시간 내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는 ‘곰 세마리’가 흘러나오자 작게 흥얼댔다. 잘 부른다는 칭찬에 쉬지 않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시설에 들어가기 전 지수에게 엄마가 때린 곳 중에 제일 아팠던 곳을 물었다. 아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발바닥이요. 근데 이제 다 나았어요.” 나중에 여자가 지수의 손바닥, 발바닥을 때렸다고 말했으니 아이의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말을 해서, 똥오줌을 못 가려서, 식탐이 지나쳐서, 떼가 심해서…. <한겨레>가 분석한 2008년 이후 아동학대 사망 사건의 수많은 가해자들이 아이에게 문제가 있어서 때렸다고 항변했다. 김성준 임상심리전문가는 “학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고문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고문을 받다 보면 피해자는 옷도 못 추스르고 더러워지고 무기력해지는데 그 모습을 보고 고문 가해자가 ‘이런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는 고문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후 정당화다.

지수는 짐 하나 없이 시설에 입소했다. 아이를 두고 돌아서는 길, 여자는 울었다. 입소 절차를 진행하느라 아이와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온 길이었다. “나도 사람이라고요. 직접 낳아서 4년 넘게 키운 앤데 보내는 마음이 왜 슬프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잠시 흐느낀 뒤 여자는 눈물을 닦고 남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임지선 최현준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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