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총리 후보자가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이던 2005년 12월14일 서울중앙지검 청사에서 ‘엑스파일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검사 황교안의 길
이념 확고했으되 늘 부실했던 수사결과
그는 과연 부패 척결할 총리 적임자인가
이념 확고했으되 늘 부실했던 수사결과
그는 과연 부패 척결할 총리 적임자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총리’, ‘화합총리’ 요구가 빗발치는데도 공안검사 출신의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총리 후보로 지명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그가 부패 척결과 정치 개혁의 적임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검사 시절 그가 남긴 행적은 박 대통령의 설명과 거리가 멀다. 그는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으로부터 ‘시국·노동 사건에 엄격하고 권력형 비리엔 관대한 검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5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엑스파일 사건’(국정원 도청 사건)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의 로비 및 ‘떡값 검사’ 의혹에 면죄부를 준 것은 그가 부패 척결의 적임자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박 대통령이 그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내세워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검사 황교안’을 보면 박 대통령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검사장 탈락, 정권에 밉보여서였나 무능해서였나
▶ 2005년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기자들과 종종 설전을 벌였습니다. ‘법과 원칙’을 강조했던 수사 결과가 그의 말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부실수사를 따지는 기자들에게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는 그의 답변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죠. 10년이 지난 지금 총리가 되려는 그의 ‘법과 원칙’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을까요. 황교안 후보자가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던 시절 지검을 출입했던 기자가 ‘검사 황교안’의 행적을 따져보았습니다.
2005년 12월14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2차장 집무실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곳은 취재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해 여름을 강타한 ‘엑스파일 사건’(국정원 도청사건) 중간수사결과에 대한 배경설명(백브리핑)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그곳에서 방 주인인 황교안 2차장검사(현 총리 후보자)는 건조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나는 당시 검찰 출입기자였고, 그는 이 사건을 지휘한 수사 책임자였다.
“보도자료 뒷부분을 보면 이건희 회장의 현금성 재산이 900억원이라는 게 나옵니다. 혹시 들어본 적 있나요? 없을 겁니다. 이번에 우리 수사팀이 처음으로 밝혀낸 거니까. 대단한 성과죠. 이렇게 열심히 수사했는데, 왜 자꾸 부실수사라 그럽니까, 허허.” 황 차장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앞서 브리핑 때 도청 녹취록에 나오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정관계 로비와 ‘떡값 검사’ 의혹 관련자 전원을 무혐의 처리한 것을 두고 부실수사가 아니냐고 따져 물은 것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는 브리핑 뒤 기사 마감으로 녹초가 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며 자기 방으로 불렀던 터라 잔뜩 기대를 걸었다. 그런 내게, 그의 말은 전혀 엉뚱한 소리로 들렸다. 이건희 회장의 개인 재산이 얼마인지 밝혀낸 것이, 어떻게 로비 의혹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면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엉터리 900억’ 수사를 부끄럽게 한 8000억원
더구나 그가 ‘성과’라고 내세운 것조차도 얼마 안 가 엉터리임이 드러났다. 두달여 뒤인 2006년 2월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재산 800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했다. 8000억원에 공익재단 출연금이 일부 포함됐다고는 하지만, 900억원과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이런 민망한 수사결과를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수사”라고 강변했으니, 그해 검사장 승진에서 그가 서울중앙지검 1, 2, 3차장 중에 유일한 탈락자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그의 검사장 탈락은 엠비(MB·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좌파정부의 공안검사 탄압’으로 포장됐고, 박근혜 정부에서 초대 법무부 장관에 발탁되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급기야 그는 지난 21일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 개혁’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새 통치철학을 집행할 적임자라는 이유로 총리 후보자에 지명됐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금권정치를 수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날려버린 수사 책임자가 10년 뒤 ‘정치·사회 개혁의 적임자’로 화려하게 변신한 셈이다. 무엇이 그의 변신을 가능하게 만든 것일까. 박 대통령은 무엇에 반해 그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히려는 걸까.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검찰발 사건이 유독 많았던 2005년, 황 후보자는 서울중앙지검의 핵심 간부 중 하나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자들의 눈에 비친 황 후보자는 박 대통령이 높이 평가했다는 부패척결이나 사회개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고 약자의 권리 보호엔 소홀한 구태의 향기가 진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은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창조적 파괴’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당시 검찰 출입기자 가운데 그가 10년 뒤 총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이가 과연 있었을까.
하지만 보수정권이 들어선 뒤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했다는 이유로 그는 ‘좌파정권에 저항한 투사’로 인식됐다. 황 후보자 스스로도 ‘좌파정권의 희생자’로 마케팅하는 데 애썼다. 스스럼없이 과장과 억측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게 2011년 5월 부산지역의 한 교회에서 한 특강이다. 당시 부산고검장이었던 그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부로 규정하고 자신을 포함한 공안검사들이 부당하게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대중씨는 계속 재야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도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도 조사받고 정부하고는 계속 갈등했던 분이다. 그런데 이런 분이 대통령 딱 되고 나니까 그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던 검사들이 전부 좌천됐다”고 주장했다. 또 노무현 정부에서도 공안검사에 대한 인사 탄압이 있었다며 이를 ‘환란’에 빗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공안검사 탄압론’은 검찰 안에서도 지나친 주장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수도권 지역의 한 검사장급 간부는 “능력 있는 공안검사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잘나갔다. 공안검사라는 이유로 한직으로 쫓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영주(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박만(제2기 방송통신심의위원장) 등 당시 공안을 대표했던 검사들은 김대중 정부에서 각각 대검 공안기획관과 서울중앙지검 1차장,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 등 공안 핵심 보직을 두루 거쳤다. 황 후보자도 김대중 정부 초기 사법연수원 교수에서 서울지검 북부지청 형사5부장을 거쳐 2000년에 공안 분야의 엘리트 코스인 대검 공안 3과장과 1과장을 지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중반까지 잘나갔다. 2002년 서울지검 공안2부장을 거쳐 2005년에는 서울지역의 공안사건을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2차장에 발탁됐다.
금권정치 수술 기회 날려버린
엑스파일 사건 민망한 수사결과
이 때문인지 2006년 검사장 승진서
서울중앙지검 1, 2, 3차장 중
그 혼자 탈락하는 수모 겪었다 2002년 서울지검 공안2부장 시절
국정원 도청 의혹 수사했지만 무혐의
나중에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의
강도높은 수사 뒤 사실로 밝혀지자
주호영 의원이 수사 책임자 교체 요구 김종빈 검찰총장 사퇴 부른 어떤 고집 황 후보자가 노무현 정부 후반기인 2006년과 2007년 2년 연속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것을 ‘정권에 밉보인 탓’이라 주장하는 것도 사실과 큰 차이가 있다. 그는 문제의 교회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에 의해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니까 공안부에 오래 있던 사람들에 대해 또 곱지가 않겠지요. 그러던 중 제가 사건 하나 잘못 처리했어요. 그분이 볼 때.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었는데, 공안부에서 어떤 교수 하나를 구속하겠다는 거예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석달쯤 전에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런 거를 처벌하면 되겠느냐,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내가) 보고를 받아보니까 구속 사안이 맞아요. 구속하겠다는 의견을 올렸어요. 검찰총장도 보고를 딱 받아보고 ‘구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천정배)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를 해보니깐 구속을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장관은 ‘대통령의 뜻을 극단적으로 거스를 수는 없다’ 이래 가지고 총장은 이건 부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사표를 쓰고 나가버렸어요.”(<경향신문> 2015년 1월14일치 보도) 그가 특강에서 언급한 사건은 2005년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강 교수는 인터넷 매체에 ‘6·25는 북한의 통일전쟁’이라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강 교수에 대한 경찰 수사를 지휘하면서 구속 수사하는 쪽으로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김종빈 당시 검찰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고, 김 총장은 이에 반발해 취임 6개월여 만에 사퇴했다. 당시 천 장관은 검찰에 ‘불구속 수사 원칙’을 강조했다. 특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무분별하게 이뤄진 구속 수사 관행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 구속 상태에서 발생하는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피의자가 법에 보장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재야 변호사 출신인 천 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불구속 수사 원칙을 들고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황 후보자가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강 교수 구속을 주장하면서 내세운 근거는 매우 빈약했다. <한겨레>가 당시 입수한, 공안1부가 작성해 검찰총장에 보고한 ‘강 교수 신병처리 방안’을 보면, 검찰은 강 교수를 구속해야 하는 사유로 △동종 범죄에 대한 엄벌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사법처리 의견 70% 상회 △반국가사범 처벌에 대한 검찰의 강력한 의지 표명 등을 제시했다. 구속영장 발부 기준인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에 대한 소명은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심지어 검찰은 ‘법원이 이미 (‘만경대’ 사건과 관련해) 강 교수를 보석으로 석방한 바 있어 도주·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할 우려가 높다’는 점을 보고서에 적시했다. 만경대 사건은 2001년 평양축전 방북단으로 북한을 방문한 강 교수가 만경대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사건이다. 검찰은 또 2안으로 불구속 수사 방안을 제시하면서 ‘강 교수가 교수 신분이고 증거가 이미 확보됐으며, 경찰 조사에 순순히 응하는 등 도주·증거인멸 우려가 없어 불구속 수사 원칙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검찰 스스로 강 교수를 구속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구속 사유로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를 들고나온 것을 두고, 당시 검찰 안에서도 ‘수사기관이 여론재판에 기대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강 교수는 만경대 사건과 이 사건이 병합돼 재판을 받은 뒤 1심과 2심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안대희 전 대법관도 검사장 탈락한 적 있지만… 온전히 법률적 관점으로만 보면 강 교수에 대한 신병처리는 천 장관과 김종빈 총장이 대립할 사안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황 후보자를 비롯한 공안검사들은 이를 노무현 정부와의 기싸움으로 인식했다. 여기서 밀리면 ‘좌파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공안 기능 축소 등 검찰 개혁에 저항할 힘을 잃게 된다고 판단했다. 황 후보자는 구속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일부 대검 참모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황 후보자의 말을 들은 김 총장은 취임 축하 난의 꽃이 채 시들기도 전에 총장실을 떠나야 했다. 당시 검찰 안팎에선 야인이 된 김 총장이 자신에게 장관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퇴를 종용했던 검찰 간부들을 원망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황 후보자의 검사장 탈락은 그와 같은 기수인 사시 23회(사법연수원 13기)의 치열한 경쟁의 결과다. 사시 23회는 처음으로 사시 합격자 수가 300명으로 대폭 늘어난 세대다. 검사들은 부쩍 늘었지만 검사장 자리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검사장 승진을 앞두고 중요한 수사나 업무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여지없이 경쟁자에게 밀린다. 실제로 당시 법무부 고위 관계자는 황 후보자가 엑스파일 수사에서 삼성 로비 의혹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게 주요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한 검사장급 검찰 간부는 “황 후보자가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것은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이지 좌천된 게 아니다. 이를 인사 탄압이라고 한다면, 그동안 검사장 승진에서 떨어진 간부들은 모두 탄압을 받았다는 얘기냐”고 반문했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안대희 전 대법관도 검사장 승진에서 몇 차례 탈락한 적이 있지만 ‘인사 탄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이도 다른 승진자가 검사장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는 게 검찰 인사”라고 말했다. 황 후보자는 2013년 자신이 법무부 장관이 된 뒤에는 8년 전과 상반된 처신을 보였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서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의 구속 수사를 주장하는 수사팀의 의견을 묵살하고 불구속 수사를 지시한 것이다. 당시 상황은 원 전 원장이 댓글 삭제 등 증거인멸을 지시할 개연성이 충분히 있었다. 또 선거에 개입할 의도가 명백하기 때문에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수사팀은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법률가로서의 양심”을 들먹이며 공직선거법 적용과 구속영장 청구를 막았다. 결국 원 전 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은 포기하되 선거법 혐의는 적용하는 선에서 의견이 조율됐다. 원 전 원장은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강정구 교수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에서 보여준 황 후보자의 법률가답지 않은 태도는 그의 정치적, 이념적 성향을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말로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정권의 성향에 따라 법률적 판단을 달리하는 당파적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인 2009년에 쓴 <집회·시위법 해설>에서 4·19 혁명을 ‘혼란’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하는 등 편향된 역사관을 과감하게 ‘커밍아웃’했다. 황 후보자는 만성두드러기 증세로 군 면제 판정을 받은 덕분에 사시 동기보다 2~3년 앞서 검사로 임용됐다. 1983년 사법연수원 수료 뒤 청주지검과 대전지검 홍성지청을 거쳐 1988년 서울지검 공안부에 배치됐다. 이 무렵 북한 공작원 김현희 칼(KAL)기 폭파 사건과 임수경 평양청년학생축전 참가 사건 등 대형 사건에 투입됐다. 하지만 말석 검사로서 주로 선배들의 수사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수사 검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22일 성명을 내어 “황 후보자가 나의 방북 사건 담당 검사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지만, 그는 말석에서 고분고분 선임자들의 지시와 명령에 따르는 막내 검사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황 후보자는 공안검사로서의 자부심과 소신은 강했다. 군사독재 정권과 김영삼 정부에서 공안검사는 검찰의 핵심 보직으로 꼽혔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 들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좀더 유연하게 접근하는 ‘신(新)공안’ 개념이 등장하면서 이전 정권에서의 ‘구(舊)공안’ 경력을 내세우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는 이때 <국가보안법 해설>을 펴내 “국가가 존속하는 한 체제 수호에 관한 법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그가 검찰 안에서 ‘공안통’으로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는 계기가 됐다. 황 후보자는 구공안 경력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한겨레>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구공안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있다. 2005년 서울중앙지검 2차장 때
강정구 교수 사건 구속수사 강행
사유는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2013년엔 원세훈 원장 구속의견 묵살
그러나 결국 징역 3년형으로 구속 “난 여러분이 싫어하는 구공안”
‘한겨레’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런 말로 자신을 소개했던 그는
정작 수사에선 성과를 낸 적 없다
수사보단 이론에 밝다는 평가다 “열심히 수사”했다, 그러나 체면 구겼다 하지만 정작 수사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이 별로 없다. 그에 대해 ‘수사보다는 이론에 밝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와 연수원 동기인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사건 수사 때 피의자들과 논쟁을 벌일 정도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수사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온전히 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잘나가는’ 공안검사가 실제 수사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못하는 것은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공안부의 주요 업무인 간첩사건의 경우 주로 국정원에서 수사를 시작한 경우가 많다. 국정원에서 만들어준 사건을 기소하는 역할만 하다 보니 실제 수사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안검사에게 특수부 검사와 같은 수사 능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지도 모른다. 황 후보자는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던 2002년 ‘국정원 작품’이 아닌 사건에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았다. 정형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폭로로 제기된 ‘김대중 정부 국정원의 도청 의혹’ 사건이었다. 그는 주임검사로서 1년여 동안 자신의 말대로 “열심히 수사”했지만, 결과적으로 체면을 구겼다. 이 사건 주요 관련자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는데, 얼마 안 가 엉터리 수사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3년 뒤 자신이 서울중앙지검 2차장으로 지휘했던 엑스파일 사건(국정원 도청사건) 수사에서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도 조직적으로 불법감청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졌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주축이 된 수사팀에서 국정원을 압수수색하는 등 강도 높은 수사를 통해 밝혀낸 것이다. 당시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은 이를 문제 삼아 국감에서 엑스파일 사건 수사 책임자인 황교안 후보자를 교체할 것을 주장했다. 황 후보자는 당시 이에 대해 “당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고, 그에 따른 결과가 나왔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검찰 안에서도 궁색한 변명이라는 말이 나왔다. 2002년 수사 때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면 불법감청 기기들을 증거로 확보할 수 있었는데도 압수수색도 없이 소극적으로 수사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황 후보자가 언제, 어떤 계기로 공안검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경기고 재학 시절 학도호국단장을 맡을 정도로 국가관이 남달랐다는 증언은 있다. 그와 고교 동창인 노회찬 전 의원(전 정의당 대표)은 “나는 유신 반대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고, 그는 학도호국단장이었다. (황 후보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치관이 변한 게 없다. 나랑은 많이 달랐다”고 <미디어오늘>(5월22일치 인터넷판) 인터뷰에서 말했다. ‘황 후보자가 초임 검사 시절 고교 동창들이 공안사건에 휘말렸을 때 많은 도움을 줬다’는 최근의 언론보도에 대해 노 전 의원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노 전 의원은 도청 녹취록 폭로로 황 후보자가 지휘했던 수사팀에 의해 2007년 불구속 기소돼 2013년 대법원 유죄 선고로 의원직을 잃었다.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이었던 황 후보자는 이 무렵 노 전 의원에게 10만원의 정치후원금을 낸 뒤 이듬해 9만원을 소득공제 받았다. 이를 두고 검찰 안팎에서 기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황 후보자는 그러나 엑스파일 수사 당시 공개적인 자리에서 노 전 의원을 원망하는 듯한 말을 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언론 브리핑 때 ‘경기고 동문들이 (녹취록 내용을 폭로한) 노회찬 욕을 많이 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경기고 선배인 안강민 전 대검중수부장(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등이 노 전 의원이 폭로한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황 후보자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이들은 그의 총리 후보 지명에 엇갈린 반응을 내놓았다. 연수원 13기 동기인 한 변호사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정권의 이해에 따라 통합진보당 해산 작업을 성공시켰다. 총리가 되면 대통령을 잘 보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의 고교 동문인 한 지방법원장도 “보수 성향이 강하지만, 야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등의 무리수는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 개신교계는 ‘황교안 지키기 운동’ 이종걸 원내대표와 노회찬 전 의원은 그의 총리 임명에 반대했다. 그를 ‘김기춘(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바타’로 표현한 이 원내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40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지만, 그가 총리 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법무장관에 만족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노 전 의원은 “총리에 공안통을 임명하겠다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총리 자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박 대통령과 황 후보자를 싸잡아 비판했다. 황 후보자의 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론도 둘로 갈라졌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지난 21~22일 <머니투데이> 의뢰로 긴급 여론조사를 한 결과, ‘잘한 인사’(40.0%)와 ‘잘못한 인사’(36.5%) 의견이 오차범위 안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보수 개신교계는 온라인에서 ‘황 후보자 지키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불교계는 그의 종교적 편향을 이유로 후보 사퇴를 주장하고 있다. 극단적 편가르기는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한다. 황 후보자는 10년 전 언론 브리핑 때 ‘국익’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다. 공안검사는 국익을 위해 희생할 각오로 일한다고. 그는 지금도 ‘국익’을 생각하고 있을까.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막기 위해 희생할 각오는 돼 있을까.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좌파정권에 저항한 투사’로 인식되는 데 주저함이 없던 정통 공안검사가 국무총리 후보에 올랐다.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청문회 준비차 출근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엑스파일 사건 민망한 수사결과
이 때문인지 2006년 검사장 승진서
서울중앙지검 1, 2, 3차장 중
그 혼자 탈락하는 수모 겪었다 2002년 서울지검 공안2부장 시절
국정원 도청 의혹 수사했지만 무혐의
나중에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의
강도높은 수사 뒤 사실로 밝혀지자
주호영 의원이 수사 책임자 교체 요구 김종빈 검찰총장 사퇴 부른 어떤 고집 황 후보자가 노무현 정부 후반기인 2006년과 2007년 2년 연속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것을 ‘정권에 밉보인 탓’이라 주장하는 것도 사실과 큰 차이가 있다. 그는 문제의 교회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에 의해 구속까지 됐던 분이에요.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니까 공안부에 오래 있던 사람들에 대해 또 곱지가 않겠지요. 그러던 중 제가 사건 하나 잘못 처리했어요. 그분이 볼 때.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었는데, 공안부에서 어떤 교수 하나를 구속하겠다는 거예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석달쯤 전에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런 거를 처벌하면 되겠느냐,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내가) 보고를 받아보니까 구속 사안이 맞아요. 구속하겠다는 의견을 올렸어요. 검찰총장도 보고를 딱 받아보고 ‘구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천정배)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를 해보니깐 구속을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장관은 ‘대통령의 뜻을 극단적으로 거스를 수는 없다’ 이래 가지고 총장은 이건 부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사표를 쓰고 나가버렸어요.”(<경향신문> 2015년 1월14일치 보도) 그가 특강에서 언급한 사건은 2005년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강 교수는 인터넷 매체에 ‘6·25는 북한의 통일전쟁’이라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강 교수에 대한 경찰 수사를 지휘하면서 구속 수사하는 쪽으로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김종빈 당시 검찰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고, 김 총장은 이에 반발해 취임 6개월여 만에 사퇴했다. 당시 천 장관은 검찰에 ‘불구속 수사 원칙’을 강조했다. 특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무분별하게 이뤄진 구속 수사 관행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 구속 상태에서 발생하는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피의자가 법에 보장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재야 변호사 출신인 천 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불구속 수사 원칙을 들고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황 후보자가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강 교수 구속을 주장하면서 내세운 근거는 매우 빈약했다. <한겨레>가 당시 입수한, 공안1부가 작성해 검찰총장에 보고한 ‘강 교수 신병처리 방안’을 보면, 검찰은 강 교수를 구속해야 하는 사유로 △동종 범죄에 대한 엄벌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사법처리 의견 70% 상회 △반국가사범 처벌에 대한 검찰의 강력한 의지 표명 등을 제시했다. 구속영장 발부 기준인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에 대한 소명은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심지어 검찰은 ‘법원이 이미 (‘만경대’ 사건과 관련해) 강 교수를 보석으로 석방한 바 있어 도주·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할 우려가 높다’는 점을 보고서에 적시했다. 만경대 사건은 2001년 평양축전 방북단으로 북한을 방문한 강 교수가 만경대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사건이다. 검찰은 또 2안으로 불구속 수사 방안을 제시하면서 ‘강 교수가 교수 신분이고 증거가 이미 확보됐으며, 경찰 조사에 순순히 응하는 등 도주·증거인멸 우려가 없어 불구속 수사 원칙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검찰 스스로 강 교수를 구속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구속 사유로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를 들고나온 것을 두고, 당시 검찰 안에서도 ‘수사기관이 여론재판에 기대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강 교수는 만경대 사건과 이 사건이 병합돼 재판을 받은 뒤 1심과 2심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안대희 전 대법관도 검사장 탈락한 적 있지만… 온전히 법률적 관점으로만 보면 강 교수에 대한 신병처리는 천 장관과 김종빈 총장이 대립할 사안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황 후보자를 비롯한 공안검사들은 이를 노무현 정부와의 기싸움으로 인식했다. 여기서 밀리면 ‘좌파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공안 기능 축소 등 검찰 개혁에 저항할 힘을 잃게 된다고 판단했다. 황 후보자는 구속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일부 대검 참모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황 후보자의 말을 들은 김 총장은 취임 축하 난의 꽃이 채 시들기도 전에 총장실을 떠나야 했다. 당시 검찰 안팎에선 야인이 된 김 총장이 자신에게 장관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퇴를 종용했던 검찰 간부들을 원망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황 후보자의 검사장 탈락은 그와 같은 기수인 사시 23회(사법연수원 13기)의 치열한 경쟁의 결과다. 사시 23회는 처음으로 사시 합격자 수가 300명으로 대폭 늘어난 세대다. 검사들은 부쩍 늘었지만 검사장 자리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검사장 승진을 앞두고 중요한 수사나 업무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여지없이 경쟁자에게 밀린다. 실제로 당시 법무부 고위 관계자는 황 후보자가 엑스파일 수사에서 삼성 로비 의혹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게 주요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한 검사장급 검찰 간부는 “황 후보자가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것은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이지 좌천된 게 아니다. 이를 인사 탄압이라고 한다면, 그동안 검사장 승진에서 떨어진 간부들은 모두 탄압을 받았다는 얘기냐”고 반문했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안대희 전 대법관도 검사장 승진에서 몇 차례 탈락한 적이 있지만 ‘인사 탄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이도 다른 승진자가 검사장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는 게 검찰 인사”라고 말했다. 황 후보자는 2013년 자신이 법무부 장관이 된 뒤에는 8년 전과 상반된 처신을 보였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서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의 구속 수사를 주장하는 수사팀의 의견을 묵살하고 불구속 수사를 지시한 것이다. 당시 상황은 원 전 원장이 댓글 삭제 등 증거인멸을 지시할 개연성이 충분히 있었다. 또 선거에 개입할 의도가 명백하기 때문에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수사팀은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법률가로서의 양심”을 들먹이며 공직선거법 적용과 구속영장 청구를 막았다. 결국 원 전 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은 포기하되 선거법 혐의는 적용하는 선에서 의견이 조율됐다. 원 전 원장은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강정구 교수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에서 보여준 황 후보자의 법률가답지 않은 태도는 그의 정치적, 이념적 성향을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말로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정권의 성향에 따라 법률적 판단을 달리하는 당파적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인 2009년에 쓴 <집회·시위법 해설>에서 4·19 혁명을 ‘혼란’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하는 등 편향된 역사관을 과감하게 ‘커밍아웃’했다. 황 후보자는 만성두드러기 증세로 군 면제 판정을 받은 덕분에 사시 동기보다 2~3년 앞서 검사로 임용됐다. 1983년 사법연수원 수료 뒤 청주지검과 대전지검 홍성지청을 거쳐 1988년 서울지검 공안부에 배치됐다. 이 무렵 북한 공작원 김현희 칼(KAL)기 폭파 사건과 임수경 평양청년학생축전 참가 사건 등 대형 사건에 투입됐다. 하지만 말석 검사로서 주로 선배들의 수사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수사 검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22일 성명을 내어 “황 후보자가 나의 방북 사건 담당 검사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지만, 그는 말석에서 고분고분 선임자들의 지시와 명령에 따르는 막내 검사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황 후보자는 공안검사로서의 자부심과 소신은 강했다. 군사독재 정권과 김영삼 정부에서 공안검사는 검찰의 핵심 보직으로 꼽혔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 들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좀더 유연하게 접근하는 ‘신(新)공안’ 개념이 등장하면서 이전 정권에서의 ‘구(舊)공안’ 경력을 내세우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는 이때 <국가보안법 해설>을 펴내 “국가가 존속하는 한 체제 수호에 관한 법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그가 검찰 안에서 ‘공안통’으로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는 계기가 됐다. 황 후보자는 구공안 경력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한겨레>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구공안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있다. 2005년 서울중앙지검 2차장 때
강정구 교수 사건 구속수사 강행
사유는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2013년엔 원세훈 원장 구속의견 묵살
그러나 결국 징역 3년형으로 구속 “난 여러분이 싫어하는 구공안”
‘한겨레’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런 말로 자신을 소개했던 그는
정작 수사에선 성과를 낸 적 없다
수사보단 이론에 밝다는 평가다 “열심히 수사”했다, 그러나 체면 구겼다 하지만 정작 수사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이 별로 없다. 그에 대해 ‘수사보다는 이론에 밝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와 연수원 동기인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사건 수사 때 피의자들과 논쟁을 벌일 정도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수사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온전히 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잘나가는’ 공안검사가 실제 수사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못하는 것은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공안부의 주요 업무인 간첩사건의 경우 주로 국정원에서 수사를 시작한 경우가 많다. 국정원에서 만들어준 사건을 기소하는 역할만 하다 보니 실제 수사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안검사에게 특수부 검사와 같은 수사 능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지도 모른다. 황 후보자는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던 2002년 ‘국정원 작품’이 아닌 사건에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았다. 정형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폭로로 제기된 ‘김대중 정부 국정원의 도청 의혹’ 사건이었다. 그는 주임검사로서 1년여 동안 자신의 말대로 “열심히 수사”했지만, 결과적으로 체면을 구겼다. 이 사건 주요 관련자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는데, 얼마 안 가 엉터리 수사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3년 뒤 자신이 서울중앙지검 2차장으로 지휘했던 엑스파일 사건(국정원 도청사건) 수사에서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도 조직적으로 불법감청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졌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주축이 된 수사팀에서 국정원을 압수수색하는 등 강도 높은 수사를 통해 밝혀낸 것이다. 당시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은 이를 문제 삼아 국감에서 엑스파일 사건 수사 책임자인 황교안 후보자를 교체할 것을 주장했다. 황 후보자는 당시 이에 대해 “당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고, 그에 따른 결과가 나왔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검찰 안에서도 궁색한 변명이라는 말이 나왔다. 2002년 수사 때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면 불법감청 기기들을 증거로 확보할 수 있었는데도 압수수색도 없이 소극적으로 수사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황 후보자가 언제, 어떤 계기로 공안검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경기고 재학 시절 학도호국단장을 맡을 정도로 국가관이 남달랐다는 증언은 있다. 그와 고교 동창인 노회찬 전 의원(전 정의당 대표)은 “나는 유신 반대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고, 그는 학도호국단장이었다. (황 후보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치관이 변한 게 없다. 나랑은 많이 달랐다”고 <미디어오늘>(5월22일치 인터넷판) 인터뷰에서 말했다. ‘황 후보자가 초임 검사 시절 고교 동창들이 공안사건에 휘말렸을 때 많은 도움을 줬다’는 최근의 언론보도에 대해 노 전 의원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노 전 의원은 도청 녹취록 폭로로 황 후보자가 지휘했던 수사팀에 의해 2007년 불구속 기소돼 2013년 대법원 유죄 선고로 의원직을 잃었다.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이었던 황 후보자는 이 무렵 노 전 의원에게 10만원의 정치후원금을 낸 뒤 이듬해 9만원을 소득공제 받았다. 이를 두고 검찰 안팎에서 기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황 후보자는 그러나 엑스파일 수사 당시 공개적인 자리에서 노 전 의원을 원망하는 듯한 말을 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언론 브리핑 때 ‘경기고 동문들이 (녹취록 내용을 폭로한) 노회찬 욕을 많이 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경기고 선배인 안강민 전 대검중수부장(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등이 노 전 의원이 폭로한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황 후보자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이들은 그의 총리 후보 지명에 엇갈린 반응을 내놓았다. 연수원 13기 동기인 한 변호사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정권의 이해에 따라 통합진보당 해산 작업을 성공시켰다. 총리가 되면 대통령을 잘 보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의 고교 동문인 한 지방법원장도 “보수 성향이 강하지만, 야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등의 무리수는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 개신교계는 ‘황교안 지키기 운동’ 이종걸 원내대표와 노회찬 전 의원은 그의 총리 임명에 반대했다. 그를 ‘김기춘(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바타’로 표현한 이 원내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40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지만, 그가 총리 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법무장관에 만족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노 전 의원은 “총리에 공안통을 임명하겠다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총리 자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박 대통령과 황 후보자를 싸잡아 비판했다. 황 후보자의 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론도 둘로 갈라졌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지난 21~22일 <머니투데이> 의뢰로 긴급 여론조사를 한 결과, ‘잘한 인사’(40.0%)와 ‘잘못한 인사’(36.5%) 의견이 오차범위 안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보수 개신교계는 온라인에서 ‘황 후보자 지키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불교계는 그의 종교적 편향을 이유로 후보 사퇴를 주장하고 있다. 극단적 편가르기는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한다. 황 후보자는 10년 전 언론 브리핑 때 ‘국익’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다. 공안검사는 국익을 위해 희생할 각오로 일한다고. 그는 지금도 ‘국익’을 생각하고 있을까.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막기 위해 희생할 각오는 돼 있을까.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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