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의 ‘소녀상지킴이’ 회원들이 12일 오후 성남시청 앞 광장의 ‘소녀상’에 헌화한 뒤, 전날 밤 고인이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달선·김외한 할머니를 추모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성남시 제공
“아픈 것, 슬픈 것 다 잊어버리시고 고이 잠드세요. 내가 해결할게.”
12일 오후 5시20분께 경북 포항시민장례식장 1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이용수(87)씨가 김달선(90)씨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영정을 손으로 한번 쓰다듬은 이씨는 국화 한 송이를 영정 앞에 놓아두고는 혼잣말을 했다. “이제 50명 남았네….”
지난 11일 밤 9시15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달선씨가 경북 포항의 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같은 날 저녁 8시40분께에는 위안부 피해자 김외한(81)씨도 경기도 광주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두명이 숨지면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50명으로 줄었다.
김달선씨는 1925년 포항에서 3남3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18살이었던 1943년 어머니를 따라 포항 흥해시장에서 청어를 팔다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갔다. 미얀마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었다. 해방 이후 1945년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미얀마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몸이 아파 고향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산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1947년 포항에 돌아갔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오빠와 남동생들을 모두 잃었다.
이후 김달선씨는 채소와 생선을 팔며 혼자 살다가, 49살이 되던 해인 1974년 남편(당시 50살)을 만나 함께 살았다. 1996년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2006년 결혼식을 올리긴 했지만, “나는 혼인신고를 할 사람이 못 된다”며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193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김외한씨는 1945년 2월 일본 홋카이도로 끌려갔다. 불과 11살 때였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위안부 생활을 견뎌낸 김외한씨는 징용을 다녀온 남편(89)과 결혼한 뒤 경북 안동에서 살아왔다. 슬하에 4남1녀를 둔 김외한씨는 1998년 남편의 권유로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고인은 생존 위안부 할머니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렸다. 건강이 나빠진 고인은 2012년 나눔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외한씨는 눈을 감기 전 수개월째 병상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기다리며 투병해왔다고 나눔의 집은 전했다. 고인은 생전 “그 죽일 놈들이 어린애를 데려다가 무자비하게 능욕했어. 그놈들은 사람도 아녀. 어렸을 적 함께 놀던 친구들은 모두 끌려가서 죽고 나 혼자만 살아 돌아왔어”라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요구했다.
김달선씨의 빈소는 포항시민장례식장에, 김외한씨의 빈소는 경북 안동의료원에 차려졌다. 발인은 모두 13일로 예정돼 있다.
광주 포항/김기성 김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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