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산내사건의 2차 학살 시기인 1950년 7월3~5일 골령골에선 1800명의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군경에 의해 총살당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토요판] 커버스토리 / 두 사진과 산내학살 유족 문양자
산내학살, 유해는…
산내학살, 유해는…
대전 산내학살사건은 1992년 2월 월간 <말>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학살 과정에 가담했던 경찰 관계자의 고백이 담긴 기사였다. 이어 1999년 12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가 공개되고 2000년 이후 관련 시민단체들이 꾸준히 이를 문제제기하면서 공론화됐다. 2005년 출범한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그러나 극히 일부의 유해만 발굴했을 뿐, 진실화해위 활동이 종료된 2010년 이후 국가 공권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유해발굴 작업은 사실상 중단됐다. 정부는 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통해 국군 전사자 유해만 발굴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에서 극히 일부만 발굴
2010년 이후 정부 차원에선 중단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통해
국군 전사자 것만 발굴하는 중 정부 무관심 속에 유해 계속 유실
골령골 유해매장 추정지 중 한 곳은
땅주인에 의해 밭으로 개간돼버려
구청에선 사유지 관여 못한단 입장
학살지인 골령골 현장 관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실상 방치 수준에 가깝다. 진실화해위가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관할인 대전 동구청에 ‘유해 매장지’ 안내판 설치를 위한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동구청은 “땅값이 떨어지고 민원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 유해는 계속 유실되고 있다. 최근엔 골령골 내 유해매장 추정지인 산기슭 중 하나가 이곳이 유해 매장지인 줄 몰랐던 땅 주인에 의해 밭으로 개간돼버렸다. 유족회 등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지난달 말부터 구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항의했지만 구청 쪽은 이달 초 “사유지를 (농경지로) 개간하는 문제까지 구청이 관여할 수 없다”는 답만 내놨다.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 유해 매장 추정지는 전국에 전부 168곳이 있지만, 이 중 13곳만 발굴이 이뤄졌다. 발굴된 유해를 충북대에 임시보관하기 위해 정부가 충북대와 맺은 협약은 내년 7월 만료된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강창일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및 추모사업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해 상임위에 계류돼 있지만 법안 통과는 난망하다.
김종현(78)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골령골의 유해 매장지는 전부 민간인 소유여서 유해를 발굴하려면 땅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학살 당시에도 국가 땅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 땅 주인이 반대한다고 발굴을 못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국가가 나서 유해 발굴을 가능하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박선주(68·충북대 명예교수) 단장은 “국가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보면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자에 대한 유해 발굴도 인권 차원에서 함께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두개의 수레바퀴가 같이 돌아가야 진정한 사회통합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박기용 기자
2010년 이후 정부 차원에선 중단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통해
국군 전사자 것만 발굴하는 중 정부 무관심 속에 유해 계속 유실
골령골 유해매장 추정지 중 한 곳은
땅주인에 의해 밭으로 개간돼버려
구청에선 사유지 관여 못한단 입장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지난 2월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사건 희생자 유해 매장지에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유골들이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온전한 형태로 발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전/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민간인 학살 유해 매장 현황 (한국전쟁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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