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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만주벌 달리던 독립운동 기개 이어 유라시아 뚫어야죠”

등록 2015-07-06 19:23수정 2015-07-06 21:27

세계탐험문화연구소 대표 김현국 씨.
세계탐험문화연구소 대표 김현국 씨.
[짬] 세계탐험문화연구소 대표 김현국 씨
짙은 눈썹에 거친 수염, 야성이 넘쳤다. 체구는 단단했고, 눈빛은 강렬했다. 지난 3일 광주에서 만난 탐험가 김현국(46·사진)씨는 거리낌 없는 호방한 말투로 자신의 도전을 들려줬다.

그가 전남대 산학협력관에서 운영중인 회사 ‘당신의 탐험’에는 방문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품들이 가득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지도들, 트랜스유라시아의 노정을 담은 일정표, 비디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이 어우러져 마치 베이스캠프나 야전 상황실 같은 느낌이다. 그는 탐험기획을 한다고 쓰인 명함을 건넸다. 오토바이와 함께 찍은 사진과 러시아 모스크바의 주소지도 적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연구기관인 세계탐험문화연구소, 사단법인 국제여행자도움센터, 개인회사인 당신의 탐험 등 3곳을 운영하고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 속으로 질주하는 것을 사랑해요.”

대학 때 일본·인도·네팔 무전여행 시작
하바롭스크에서 홀로 극한 생존 체험
졸업 뒤 국산 오토바이로 시베리아 횡단

대학생 모아 ‘새 실크로드 개척’ 구상
작년 ‘아시안 하이웨이’ 단독 횡단 성공
“북한 설득해 유라시아 교역 서둘러야”

그는 20대 청년 시절 미지의 땅 시베리아에 꽂혔다. 전남대 법대 87학번인 그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직선제를 쟁취하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양김’의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하자 환멸을 느끼고 입대했다. “군대 내무반에서 북방외교로 소련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이 번쩍 뜨였어요. 소년 시절 큰아버지가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했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더 센 걸 해야지’라고 수없이 다짐했거든요.”

답답했던 그는 제대 뒤 일본과 인도, 네팔을 무전여행하며 비로소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났다. 1995년엔 무턱대고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날아갔다. 그때 아는 러시아어라곤 세 마디가 전부였다. “하라쇼(좋아요), 투알레트(화장실), 가스티니차(호텔).” 그는 석 달 동안 흑룡강(헤이룽강·아무르강)에 빠져 죽을 위기를 맞기도 하고,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배고픔에 허덕이면서 극한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는 오토바이를 구해 다시 하바롭스크로 들어갔다. 26살의 그는 무모하게도 125㏄ 국산 오토바이로 시베리아 횡단에 도전했다. 아예 길조차 없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1만1000㎞를 달렸다. 하바롭스크~치타 구간의 진탕길에선 타고 가는 시간보다 메고 가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는 98년 러시아 변호사가 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소련연방 체제가 무너진 모스크바의 생활은 더 혹독했다. 살아남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학업은 저만큼 멀어져 갔다. 그는 2000여곳까지 늘어난 시내 스시 전문점에 쌀을 대는 사업으로 제법 목돈을 만졌다. 생활이 나아지자 ‘방랑벽’이 되살아났다.

이듬해 그는 ‘새로운 실크로드(N-SilkRoad) 사업’을 펼치고자 귀국했다. 첨단 기술과 정보 능력을 갖춘 새로운 젊은이(디지털 유목민)들이 동서, 인종, 문화, 국적의 차이를 넘어 변화에 도전하도록 하려는 구상이었다. 그는 각국의 대학생 300여명을 모아 터키 이스탄불에서 일본 교토까지 도보와 자전거, 말, 낙타 등으로 이동하며 환경·빈곤·질병 등 지구적 문제들의 해법을 모색하는 ‘길 위의 공동체’를 꿈꿨다. 전남대와 계명대에 동아리를 만들고, 노키아·혼다 등 기업들의 협찬 약속도 얻었다. 사전답사까지 했던 이 사업은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터지며 물거품이 됐다.

희망이 깨지자 고비가 왔다. 그는 2004년 이후 러시아를 오가며 구상을 다듬었으나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사업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졌고, 급기야 사무실 임대료가 밀리는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깊이 좌절했고 의욕을 상실했다. 2009년 가수 김원중씨가 그를 위해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라는 곡도 만들어 응원해줬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2010년 트랜스시베리아 횡단 고속도로가 뚫리고, 2014년 한-러 무비자 협정이 발효돼 3개월간 체류가 가능해진 점이 그나마 위안을 주었다. 그는 당장 트랜스유라시아 오토바이(650㏄) 단독 횡단을 실행에 옮겼다. 지난해 6~11월 ‘아시안 하이웨이 6번’(AH6)을 통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반환점으로 한국~유럽 10개 나라를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꿈, 시베리아 그 미래와의 만남’이라는 제목을 걸고, 지구의 동맥을 따라 하루 평균 400여㎞씩 2만5000㎞를 이동했다. 이동 도중 항공·철도·선박·도로 등 물류수단별로 경쟁력을 비교했다. 또 이동의 장벽들을 찾고, 곡물과 가스, 석유 등 자원을 교류하는 방안을 타진했다.

“헬멧의 무게는 목을 짓눌렀다. 무릎, 발목, 손목 등 온몸이 쉴 새 없는 진동 때문에 탈진해갔다. 쏜살같이 달리는 트레일러가 만드는 강력한 바람 벽에 밀려날 때면 수없이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그는 가까스로 반환점을 돌아 시베리아를 거쳐 돌아온 뒤 한동안 몸을 추슬러야 했다. 세월호 참사로 깊은 슬픔에 잠긴 국민들에게 강연이나 전시를 하기가 망설여졌다. 올해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도전이 국민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덕분에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됐다. 지금 그는 내년 또는 내후년에는 트레일러를 몰고 유라시아를 횡단해 수출국가 한국의 앞길을 열겠다는 계획을 짜고 있다.

“좁은 한반도만 길이 막혀 있다. 다국적 자본들이 세계 곳곳의 오지까지 파고들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10년 전이나 20년 전 구상을 되풀이하고 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비록 지금은 막혀 있지만, 북한을 끊임없이 설득하면 아시안 하이웨이를 통한 유라시아 교역로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사진 세계탐험문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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