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24일 박준영 변호사(오른쪽)가 2000년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에서 당시 15살 소년이었던 최근호(가명·30)씨가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수형생활을 했다며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접수시키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뒤안길
최근호를 만난 건 지난 2년여 동안 모두 세 번이다. 불행한 가정사를 겪은 탓에 술은 절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사실 외에 그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쉽게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말수도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15년 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가 꾸역꾸역 살아낸 세월을 따라가다 보니, 학교 밖 가난한 청소년에게 누명을 덧씌울지도 모를 형사사법 체계의 사각지대를 마주할 수 있었다.
경찰 조사를 받을 당시, 근호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만 15살 소년이었다. 경찰은 보호자가 경찰서로 달려오기 전에 그로부터 ‘증거의 왕’으로 대접받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 뒤 검찰 기소와 법원 판결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국내외 법심리학자들은 정신지체장애인이나 미성년자들이 허위 자백·진술에 취약하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약간의 권위가 있는 사람의 말도 쉽게 수긍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란다 원칙’을 기억하지 못한다.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진술거부권을 알려주었다고 돼 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만 15살짜리가 과연 ‘피의자 권리’를 이해하고 제대로 행사할 수 있었을까. 피의자 권리가 형식적으로 고지되는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는 무관심하다.
영국의 경우 어린이나 청소년이 가해자로 지목된 경우에도, 피해자와 똑같이 그 나이 또래 특성에 맞게 조사가 이루어진다. 미국에선 피의자 권리를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백을 했다는 테스트 결과가 나오면, 법정에서 해당 자백을 증거로 사용하지 않는다.
정신지체장애인·미성년자는
허위자백·진술에 취약한 경향
권위 있는 사람 말에 쉽게 수긍
‘피의자 권리’도 행사 어려워 이제 공은 다시 대법원으로
검찰 항고 기각해 재심 확정 시
유무죄 다투는 사건심리 시작
그 길이 또 까마득하지 않을지 근호가 옥살이를 하던 2007년 개정된 형사소송법 244조 5항은 “검사, 사법경찰관은 피의자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의사 전달 능력이 미약하거나 연령·성별·국적 등을 고려해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요한 경우 직권 또는 피의자·법정대리인의 신청에 따라 신뢰관계에 있는 자를 동석하게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현실에서 자주 무력화된다. 법률적 지식이 없는 부모들의 경우 선처를 바라며 혐의를 부인하는 자녀들에게 사실관계를 추궁해 허위 진술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적어도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이들에겐 재판 단계가 아닌 수사 단계에서부터 국선변호인을 붙여줄 필요가 있다. 잘못된 수사와 재판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은 재심이다. 우리나라에서 재심에 이르는 길은 유독 멀고도 험난하다. 무죄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이 드는 증거만으로는 재심 사유가 안 된다. 유죄 판결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할 만큼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무죄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증거를 찾아내는 건 올곧이 재심 청구자의 몫이다. 경찰의 가혹행위 의혹도 스스로 밝혀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근호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올해 2월10일이었다. 광주고등법원 재판부가 그에 대한 심문을 한 날이다. “하지도 않은 범죄를 했다고 자백한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판사가 거듭 물었다. 법정문을 나서던 박준영 변호사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근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재심 청구 2년2개월 만인 지난 6월 광주고법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제 공은 다시 대법원으로 넘겨졌다. 대법원이 검찰의 항고를 기각해 재심 결정이 확정되면, 유무죄를 다투는 사건 심리가 시작된다. 까마득한 앞날을 생각하자, 강기훈(유서대필 사건 피해자)씨가 떠올랐다. 근호가 말문을 영영 닫게 될까봐 두려워졌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허위자백·진술에 취약한 경향
권위 있는 사람 말에 쉽게 수긍
‘피의자 권리’도 행사 어려워 이제 공은 다시 대법원으로
검찰 항고 기각해 재심 확정 시
유무죄 다투는 사건심리 시작
그 길이 또 까마득하지 않을지 근호가 옥살이를 하던 2007년 개정된 형사소송법 244조 5항은 “검사, 사법경찰관은 피의자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의사 전달 능력이 미약하거나 연령·성별·국적 등을 고려해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요한 경우 직권 또는 피의자·법정대리인의 신청에 따라 신뢰관계에 있는 자를 동석하게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현실에서 자주 무력화된다. 법률적 지식이 없는 부모들의 경우 선처를 바라며 혐의를 부인하는 자녀들에게 사실관계를 추궁해 허위 진술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적어도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이들에겐 재판 단계가 아닌 수사 단계에서부터 국선변호인을 붙여줄 필요가 있다. 잘못된 수사와 재판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은 재심이다. 우리나라에서 재심에 이르는 길은 유독 멀고도 험난하다. 무죄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이 드는 증거만으로는 재심 사유가 안 된다. 유죄 판결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할 만큼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무죄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증거를 찾아내는 건 올곧이 재심 청구자의 몫이다. 경찰의 가혹행위 의혹도 스스로 밝혀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근호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올해 2월10일이었다. 광주고등법원 재판부가 그에 대한 심문을 한 날이다. “하지도 않은 범죄를 했다고 자백한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판사가 거듭 물었다. 법정문을 나서던 박준영 변호사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근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재심 청구 2년2개월 만인 지난 6월 광주고법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제 공은 다시 대법원으로 넘겨졌다. 대법원이 검찰의 항고를 기각해 재심 결정이 확정되면, 유무죄를 다투는 사건 심리가 시작된다. 까마득한 앞날을 생각하자, 강기훈(유서대필 사건 피해자)씨가 떠올랐다. 근호가 말문을 영영 닫게 될까봐 두려워졌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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