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압수수색영장 하나로 애초 혐의와 무관한 방대한 양의 디지털 정보를 압수하는 수사 관행은 위법하다고 결정했다. 무분별한 디지털 증거 압수수색에 제동을 걸며 ‘영장주의의 사각지대’였던 분야에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2011년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은 대형 제약회사 이아무개 회장의 디지털 증거를 압수수색한 검찰의 절차가 위법했으므로 이를 전부 취소해야 한다고 결정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7일 밝혔다. 검찰은 이 회장이 배임 혐의 수사 과정에서 위법한 압수수색을 당했다며 수원지법에 낸 준항고가 받아들여져 압수수색 전부가 취소되자 이에 반발해 재항고했다.
대법원은 디지털 증거도 현장에서 혐의와 관련된 것만을 출력하거나 복사해 가져오는 게 원칙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 사정이 여의치 않거나 자료가 방대해 즉석에서 처리하기가 곤란하면 예외적으로 하드디스크를 수사기관에 가져가 복제(이미징)할 수 있다고 했다. 법원은 여기까지는 적법하다고 봤다.
그런데 수원지검 강력부 검사는 대검 디지털포렌식센터에서 이미징한 하드디스크를 돌려준 다음 이미징 자료를 자신의 외장 하드디스크에 다시 복제했다. 이어 애초 압수수색 대상인 배임 혐의와는 별개의 약사법 위반, 조세범처벌법 위반 단서를 발견했고, 이를 넘겨받은 특수부는 다시 압수수색영장을 받아 별건 수사에 착수했다. 최초의 이미징 과정은 이 회장 쪽이 참관하다가 자리를 떴으나, 이후 과정은 참관하지 못했다.
대법원은 “혐의사실 관련성에 대한 구분 없이 전자정보를 문서로 출력하거나 복제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영장주의에 반하는 압수”라고 밝혔다. 또 증거 분류·추출 과정에서 당사자 쪽 참여를 보장해야 하고, 영장 혐의와 다른 혐의의 단서를 발견하면 즉시 탐색을 중단하고 추가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어 일부 과정에서 적법 절차를 지켰어도 나머지 절차가 위법성이 있다면 압수수색 전부를 취소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형사소송법은 사무실과 집 등이 주요 대상이던 ‘전통적’ 압수수색의 경우 현장에서 혐의 관련 물품만 압수하고, 수사 뒤 피의자에게 돌려주게 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증거는 복제·전파 가능성이 높은데도 명확한 기준이 없어 논란이 돼왔다.
이번 결정은 1차 이미징까지는 예외적으로 인정하겠지만, 이후 혐의와 관련된 자료만 추출·압수해야 하고, 이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당사자 쪽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못박은 것이다. 대법원은 “전자정보 압수수색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 재산권 등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복제가 쉬워 적법절차를 지켜야 할 필요성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결정문에서 “저장매체 등이 외부로 반출되면 혐의와 무관한 정보가 수사기관에 의해 다른 범죄의 증거로 위법하게 사용될 수 있으므로, 혐의 관련성에 대한 구분 없이 이뤄지는 복제·탐색·출력을 막는 절차가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기업 수사는 디지털 정보가 방대해 수십명이 나눠 분석하는데, 이번 결정대로라면 변호인 수십명이 분석에 동참해야 한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이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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