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2007년 보복폭행 사건에 대한 경찰 조사를 받으러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다.대기업 총수가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경찰서에 나와 조사를 받기는 당시가 처음이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베테랑>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베테랑> 보신 분들 많으시죠? 곧 보실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5일 개봉해 25일까지 930만명이 봤다고 합니다. 오는 주말이면 관객 천만명을 돌파할 듯합니다.
200억원 가까운 제작비가 투입된 <암살>, 믿고보는 톰 크루즈 주연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맞붙은 결과치곤 대단합니다. 감독의 연출력, 배우들의 연기력 등 여러 흥행 요인이 있겠지만 현실과 동떨어보이지 않는 영화 속 등장인물 덕도 클 겁니다. “안하무인 재벌 3세의 악행에서 ‘맷값 폭행사건’ ‘땅콩 회항’ 등 현실 속 ‘재벌 갑질’을 떠올리게 하고, 평범한 형사가 이에 맞서 끝까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모습이 통쾌함을 안겨준다”(
▶ 바로가기 : ‘암살’ ‘베테랑’ 여름 평정…영화 속 ‘정의 실현’에 열광했다 )는 겁니다.
■ ‘영화 속 내용과 등장인물은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제작자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관객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현실 속 인물을 바삐 떠올립니다. 그래야 영화 속 주인공이 악당을 소탕하는 장면에서 더 큰 통쾌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알고 보든 모르고 보든 베테랑을 보노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있습니다. 망나니 재벌 2세 조태오(유아인)가 1인 시위자를 사무실로 불러 폭행하고 돈을 건네는 장면입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인 서도철 형사(황정민)와 조태오가 얽히는 계기가 되는 사건입니다.
■ “한대당 백만원…3백만원”
최철원 전 엠앤엠 대표의 ‘맷값 폭행’은 2010년 11월 MBC 시사매거진 2580이 처음 보도했습니다.
최철원 전 대표에게 맞은 유아무개씨는 자신의 회사를 인수합병한 엠앤엠이 고용 승계를 거부하자 1인 시위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씨는 보도가 나가기 한달 전 차량 매각 문제로 엠앤엠 사무실을 찾았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최철원 전 대표는 직원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알루미늄 방망이로 유씨를 때렸습니다. 주먹과 발로도 때렸습니다. 1대당 100만원씩 주고 유씨를 때리다 유씨가 아파하자 1대당 300만원씩이라며 더 때렸습니다. 경찰이 수사한 결과, 최철원 전 대표는 유씨를 13대 때렸고 맷값이라며 1000만원짜리 수표 2장을 건넸습니다. ‘사비’도 아닌 회삿돈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사람을 때린다는 것. 최철원 전 대표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지만 누구도 쉽게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일을 했습니다. 베테랑을 만든 류승완 감독도 영화 속에서 차마 직접 때리고 돈을 주는 설정을 하진 않았습니다.
■ “내 아들 때린 놈이 누구야?”
알 만한 대기업 회장이 내뱉은 말입니다. 아들을 때린 사람을 색출하겠다며 ‘후보자’들을 산기슭 공사장 반지하 차고로 끌고가 ‘손을 본’ 뒤 꿇어 앉히고 내뱉은 말입니다. 아들이 맞은 주먹질을 주먹질로 되갚은 재벌 회장님 얘깁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은 2007년 4월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김 회장의 차남이 클럽 종업원들에게 폭행을 당했고 다음날 김 회장이 아들과 경호원, 직원들을 데리고 가 이를 갚아줬다”는, 단순하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지만 파장은 컸습니다.
무엇보다 그 유명한 회장님이 손수 아들이 맞은 주먹질을 되갚았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2007년 3월8일 저녁 김 회장은 자신의 경호과장 등을 시켜 아들을 때렸다는 종업원들을 불러 모읍니다. 주점에 도착한 김 회장은 “조용한 곳으로 가자”며 8명의 피해자들을 이끌고 서울 남쪽 청계산으로 향합니다. 피해자들이 탄 승합차를 자신과 아들, 직원들이 탄 승용차로 에워싼 채 청계산으로 향합니다.
청계산에서 8명을 집단 폭행한 김 회장은 아들을 직접 때린 가해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서울 북창동 주점으로 향합니다. 그는 경호원들을 시켜 주점을 통제한 뒤 주점 사장을 불러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오라”고 지시합니다. 사장이 말을 듣지 않자 그를 또 폭행합니다. 실제 아들을 때린 가해자를 데리고 오자 이번엔 아들에게 “네가 맞은 만큼 너도 때려봐라”고 시킵니다. 나머지 종업원들도 경호원들에게 마구잡이로 맞았습니다.
■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느냐””
김승연 회장이 연출한 ‘보복폭행’ 사건의 또 다른 핵심은 사건이 벌어진 뒤 일어난 경찰의 축소·은폐입니다. 영화 베테랑을 보면서 보복폭행 사건이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선 사건의 ‘관할권’을 두고 다툽니다. 베테랑 속 주인공 서도철 형사는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입니다. 그는 1인 시위를 하다 폭행당한 화물차 기사의 석연찮은 사연을 조사하려 하지만 관할 경찰서 형사들의 방해에 가까운 방관에 부딪힙니다. 이때 서도철이 매수된 동료들을 향해 내뱉는 말이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입니다. ‘가오’는 체면을 뜻하는 일본어에서 비롯된 비속어입니다.
망나니 조태오의 아버지 곁엔 경찰 출신 정 고문(김응수)이 있습니다. 그는 ‘뒤치다꺼리’ 담당입니다. 그의 활약 덕분인지 서도철 형사의 수사는 결정적일 때마다 벽에 막힙니다. 내부 감찰반이 나와 ‘괜한 짓 하지 마라’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축소·은폐’
다시 현실입니다.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이 있던 날인 2007년 3월8일,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112신고를 받고 김 회장이 있던 클럽에 출동했습니다. 물론 김 회장이 숨어 있던 방들을 제대로 뒤져보지 않았습니다. 이후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첩보를 입수해 조사를 시작했지만, 서울경찰청은 3월 말 “단순 폭행”이라는 이유로 사건을 남대문경찰서로 넘겼습니다. (“단순 폭행이라 사건을 넘겼다”는 경찰의 초기 해명도 결국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남대문경찰서는 한화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중구 일대를 관할하는 곳입니다.
남대문경찰서와 한화그룹의 인연은 또 있었습니다. 당시 한화그룹 고문이던 최기문 전 경찰청장과 장희곤 남대문경찰서장은 경북사대부고 선후배 사이였습니다. 최기문 전 경찰청장이 영화 베테랑 속 정 고문의 ‘롤모델’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최 전 청장은 보복폭행이 발생한 뒤 장희곤 서장은 물론이고 홍영기 당시 서울경찰청장, 김학배 서울경찰청 수사부장, 한기민 서울경찰청 형사부장에게 전화를 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애초부터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해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아닌 남대문경찰서에서 수사를 하게 한 겁니다.
■ “이러고도 감당할 수 있겠어요?”
폭행치사, 살인교사, 경찰 폭행, 마약…. 베테랑 속 안하무인 재벌 2세 조태오가 저지른 범죄들입니다. 조태오는 결국 경찰에 붙잡힙니다. 영화는 조태오가 붙잡히고 막을 내립니다.
조태오는 죗값을 제대로 치렀을까요? 조태오가 붙잡히는 과정을 통해 추측해본다면 쉽지 않을 겁니다. “날 감당할 수 있겠냐”고 하던 조태오가 가만 있을 리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최철원 전 대표와 김승연 회장은 죗값을 제대로 치렀을까요?
베테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김 회장과 최 전 대표 모두 구속돼 수사를 받았습니다. 재벌 총수에게 유죄 선고보다 더 무섭다는 구속수감이 된 것이지요.
■ “옆방 밴드가 시끄러워서” “아구 몇번 돌렸다”
김승연 회장은 재판 결과에 자신이 있었나 봅니다. 2007년 6월18일 열린 첫 공판. 김승연 회장은 피해자를 어느 정도 때렸냐는 질문에 “아구를 몇번 돌렸다”며 권투하는 시범을 보입니다. 왜 청계산까지 데리고 갔느냐는 질문엔 “검사님은 술집 안 가보셨죠?”라고 반문하며 “옆방 밴드가 시끄러워서 조용히 얘기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법정에 선 보통 피고인들이 내뱉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김승연 회장의 믿는 구석은 ‘빠방한’ 변호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부터 그룹 내 변호사,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을 총동원해 방어에 나섰습니다. 어느 정도 ‘약발’이 먹히기도 했나 봅니다. 검찰은 김 회장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습니다. 김 회장에게 적용된 혐의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의 상해(3년 이상 유기징역), 체포·감금(2년 이상 유기징역), 형법의 상해(7년 이하 징역) 등이었습니다. 혐의의 많고 적음이 형량과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의 질과 양에 견준다면 ‘봐주기 구형’이라는 비판을 충분히 들을 만합니다. 이 과정들은 표창원 교수가 <한겨레>에 쓴 ‘표창원의 죄와벌 <8>한화 김승연 회장, 의인과 악인 사이’(
▶바로 가기 : “내 아들 때린 놈이 누구야?” 재벌회장의 무차별 폭력)에 자세히 나옵니다.
■ 1년6월 실형→집행유예 3년
구속기소된 김승연 회장, 최철원 전 대표 모두 1심에선 실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둘 다 징역 1년6월형이 선고됐습니다. 그리고 둘 다 항소심에선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이 선고됐습니다. 얼마간의 사회봉사와 함께. 이 대목에서 ‘땅콩 회항’의 주인공 조현아 전 대항항공 부사장이 생각나는 건 당연합니다. 그도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됩니다.
최철원 전 대표의 ‘당일치기’ 항소심도 이례적이었습니다. 1심 한달 뒤 열린 항소심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 5부(재판장 양현주)는 공판 첫날 결심부터 선고까지 일사천리로 끝내고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최 전 대표를 풀어줍니다. “당일 선고가 형사소송법 원칙”이라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었습니다.
■ 관심이 사라진 이후의 일들
‘조태오가 붙잡힌 이후’의 일이 궁금한 이유 중 다른 하나는 그의 악행에 연루된 이들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거기에서 끝나버렸으니 현실을 되돌아보면서 끝맺겠습니다.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축소·은폐한 경찰 수뇌부 중 일부는 기소됐습니다. 장희곤 당시 서울 남대문경찰서장은 구속되기까지 했습니다. 장 서장 외에 최기문 전 경찰청장, 강대원 남대문경찰서 수사과장이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심 법원은 이들 모두에게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물론, 항소심은 역시 이들 모두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최기문 전 청장의 전화를 받고 사건을 남대문서로 옮기는데 관여한 홍영기 당시 서울경찰청장, 김학배 서울청 수사부장, 한기민 서울청 형사부장은 입건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맷값폭행’ 최철원 전 대표가 항소심에서 풀려나기 한달 전인 2011년 3월, 검찰은 최 전 대표에게 폭행당한 유아무개씨를 기소합니다. 1인 시위 과정에서 업무를 방해했다는 혐의였습니다. 검찰은 이 사실을 최철원 전 대표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공개했습니다. 유씨를 기소한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 박철 부장검사는 그해 9월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듬해 1월 대기업에 전무급 임원으로 입사합니다. 그 그룹은 SK였습니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