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만장일치’가 크게 늘면서 사회적 사건에 대한 사법부 판단의 획일화가 우려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월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에 대해 선고를 하는 모습. 김성광 기자 flysg2@gmail.com
올 전원합의체 선고 21건 중 8건이 ‘만장일치’
대법관들 ‘보수·엘리트’ 획일화
사회적 사건, 다양한 목소리 사라져
전원합의체 회부 사건 늘었지만
판결내용 법리적 논증 소홀 지적
대법관들 ‘보수·엘리트’ 획일화
사회적 사건, 다양한 목소리 사라져
전원합의체 회부 사건 늘었지만
판결내용 법리적 논증 소홀 지적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소수의견이 사라지고 있다. ‘정책법원’ 역할을 강조하는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사건 수를 늘리는 데만 집중하고 정작 다양한 가치관을 반영하는 역할에는 소홀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30일 올해 선고된 전원합의체 사건 21건을 살펴보면, 대법관 13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결론난 게 8건(38.1%)이다. 상반기에 13건 중 만장일치는 4건뿐이었지만, 7~8월 선고 8건 가운데 4건에서 만장일치 결론이 나왔다. 2013년에는 18건(같은 쟁점의 여러 사건은 1건으로 집계) 중 8건(44.4%)이 만장일치였다가 지난해는 14건 가운데 3건(21.4%)으로 줄었으나, 올해 다시 증가하고 있다.
과거 전국교직원노조 시국선언 사건의 경우 1차 시국선언은 8 대 5 의견으로, 2차는 7 대 6 의견으로 유죄 결론이 났다.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매각 사건도 6 대 5로 결론나는 등 대법관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대학 기성회비 반환 의무가 없다는 판결에서 7 대 6으로 의견이 갈린 것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에서 일부 혐의에만 의견이 8 대 5로 나뉜 것을 제외하면 정치·사회적 영향이나 논란이 큰 사건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온 경우가 드물다.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에서 국정원 직원 전자우편 파일을 증거로 쓰지 말고 다시 심리하라는 판결(7월16일), 형사사건 변호사 성공보수 무효 판결(7월23일)은 소수의견이 하나도 없었다. 추징금을 냈다면 추가로 세금 납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 등 법리적 판단에서도 만장일치가 여럿 나왔다.
큰 쟁점이 있는 사안들에서 이렇게 일방적 결론이 나오는 것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는 대법관 구성이 보수적이면서도 무색무취한 엘리트 법관 일색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부장판사는 “지금 대법관들 중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한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는 “반대의견의 논리가 탄탄해 다수의견이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면 이해되지만, 일부러 만장일치를 만들기 위해 설득했다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활성화한다며 대법관 4명으로 소위원회를 만들어, 주심에게 배당하기 전에 전원합의체 회부 사건을 미리 ‘발굴’하고 있다. 하지만 전원합의체 사건이 늘어난 만큼 판결 내용이 질적으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압도적 다수의견 수에 비해 법리적 논증은 소홀하다는 것이다.
원세훈 전 원장 사건에서 서울고법 항소심은 국정원 직원 전자우편 첨부파일 문서에 대해 ‘작성 사실을 당사자가 부인하지만 다른 객관적 정황이 뒷받침되므로 예외적으로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며 그 이유를 상세히 논증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기존 판례를 언급하며 ‘예외적으로 증거로 인정되는 경우가 아니다’라고 간단히 판단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증거인정에 관한 형사소송법 개정 요구가 있는 만큼 최소한 어떤 경우에 예외적으로 증거로 쓸 수 있는지 구체적 기준이라도 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이 판결은 사실상 당사자가 부인하면 무조건 증거로 인정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형사사건 성공보수 판결도 취지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법리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는다. 과거 사실에 대한 당부를 따지는 법원이 ‘지금까지는 유효하지만 앞으로 체결되는 계약만 무효’라고 밝힌 것은 판결 이후 혼란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작 해당 사건 당사자는 구제를 못 받게 됐다. 다른 주요 사건은 공개변론으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지만 유독 이 사건은 쟁점도 미리 알리지 않고 비밀작업 하듯 선고해 문제를 공론화할 기회를 차단한 모양새다. 지난 27일 이기택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도 이 판결이 도마에 올랐는데,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은 “아무리 봐도 입법 영역이다. 개별 사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법리를 적용해 내리는 판결이라기보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 내리듯이 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은 상고 사건 대부분을 상고법원을 신설해 처리하고 소수 중요 사건만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대법원은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을 반영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원합의체에서 심판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획일적 성향이 이어진다면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온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는 이기택 후보자 청문회에서 “대법관 구성 자체가 다양성을 대표해야 한다. 형사 성공보수 판결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만큼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 대법원이 획일적 대법관 구성으로 과연 국민들에게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으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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