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북 70년, 책읽기 70년]
⑩ 1980년대 무협의 시대
⑩ 1980년대 무협의 시대
고백건대, 청소년기 내 독서의 대부분은 무협소설과 만화가 차지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건만 ‘고백’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이들 독서는 왠지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대개 무협지와 만화 따위를 읽는 것은 지성과 교양을 함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갉아먹는 ‘저열한’ 취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호환, 마마’ 취급을 받던 무협지와 만화는 진정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없었던 걸까?
1980년대의 많은 이들이 만화와 무협지, 할리퀸 문고와 하이틴로맨스를 비롯하여 미스 마플과 푸아로, 셜록 홈스와 괴도 루팡이 활약하는 추리소설을 탐독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를 통해 연애와 에로스를 배웠으며, 선/악을 분별하는 감성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를테면 분단시대의 역사를 다루어 100만부 이상이 팔린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중요하다. 하지만 이현세의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1987)와 <남벌>(1994), 허영만의 <오! 한강>(1987)과 같은 만화책이 대중에게 아로새긴 근현대사의 역사상도 못지않은 의미가 있다.
그 시절 어떤 이들은 해적 출판된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올훼스의 창>을 통해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혁명사를 습득했고, 김혜린의 <북해의 별>(1983)의 주인공 ‘유리핀 멤피스 대후’에게서 진정한 혁명가의 자세를 배우기도 했다. 무협소설과 만화에서부터 현재의 환상문학과 공상과학(SF)물에 이르기까지의 장르문학은 진지한 관심을 받을 만한 하나의 당당한 문화이다.
■ ‘광주 항쟁’과 ‘무협지적’ 세계관의 형성
1980년대는 무엇보다 ‘무협의 시대’였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1980년대는 시대 자체가 ‘무협지적’이었다. 유하의 시 <무림일기>(1988)는 1980년대가 “꽃잎도 혈편으로 흐드러졌고 봄비도 피비린내나는 살점으로 튀었던” ‘하남의 대혈겁’(광주)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무협의 언어로 명민하게 포착한 바 있다. 정의로운 자 그 피바람을 보고 어찌 사파(군사정권)와 타협할 수 있었겠는가? 이후 야만적 압제 속에 억울한 죽음이 이어졌다.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생회관 옥상에서, 대강당 지붕에서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싸웠던 그 시절은 모더니티의 세계가 아니라 그대로 ‘무협지적 세계’였다.
애초에 ‘협’(俠)은 ‘사람’ 인(人)과 ‘겨드랑이에 낄’ 협(夾)자가 더해진 글자다. 그것은 그 모양만으로도 약한 사람을 끼고도는 행위이자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협’은 약자를 위한 정의로운 일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거는, ‘초월’과 ‘영원 지향’의 정신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협’의 정신은 독재정부 타도와 혁명을 꿈꾸었던 1980년대 운동 세대들의 정신구조와도 닮아 있다. 이를테면 미문화원과 민정당사 점거 등 이른바 선도투쟁을 했던 학생들의 영웅적 행위는 ‘강호의 도’를 회복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일종의 ‘협’의 실현이었다.
무협지가 직접적으로 시대와 얽히는 필화 사건도 있었다. 연세대생 박영창은 1980년 가을 <무림파천황>이라는 창작 무협지를 발표했다. 절정의 무공을 익힌 주인공이 부모의 원수를 갚고 혼란한 강호를 평정한다는 무협소설의 정석을 따른 작품이다. 그가 활동하던 학회의 한 선배가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고, 박영창도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소설 가운데 정파와 사파가 벌이는 대결구도를 변증법적 대립과 모순으로 설명한 부분, ‘강북무림’이 ‘강남무림’을 향해 ‘남진’을 주장한 부분 등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죄목으로 그는 2년여의 실형을 살았다. 무협지 안쪽의 ‘사파’들이 현실로 튀어 나와 횡행하던 시대의 삽화라 할 만하다.
피를 부르는 군사정권 폭압
이에 맞선 젊은이들의 투쟁
80년대는 ‘무협지적 세계’ 아닐까
미문화원 방화·민정당사 점거
‘강호의 도’ 꿈꾸는 협객과 닮아 유하 ‘무림일기’ 박영창 ‘무림파천황’
무협의 언어로 된 시·소설 출현
김영하 데뷔작 ‘무협학생운동’
전두·노갈에 맞선 연희방 무사
5월광주~6월항쟁 무협지로 재현 ‘현대판 홍길동’ 장총찬에 열광
김용 ‘영웅문’은 800만부나 팔려 ■ 협객들을 위한 송가, 김영하의 ‘무협학생운동’ 1980년대의 시대 상황을 무협으로 재현한 흥미로운 작품도 존재한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김영하의 데뷔작인 <무협학생운동>(아침, 1992)이 그것이다. 이 소설은 1980년 5월 광주로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의 80년대 학생운동사를 무협소설 형식으로 극화하고 있다.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다 1987년 6월 이후 ‘영원한 이름’이 된 이한열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가벼워 보이는 무협의 형식을 차용하여,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다루는 성공적인 서사 전략을 선보인다. 소설에서는 강호를 지배하는 악의 무리로 독두마왕 전두, 노갈, 보안 마귀, 안기 마귀가 있으며, 그 수하에 일마두 삼청교대, 이마두 암살 공자, 삼마두 공작왕, 사마두 도청자, 오마두 임시 동행자, 그리고 백건단 등이 자리한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 류와 초아는 연희방 출신의 정파무사들로 각각 초민선사와 강철대사라는 무림의 고수들을 만나 새로운 방파를 만든다. 초민선사와 초아의 방파는 서역에서 변증창과 유물검을 이어받은 민민방이며 강철대사와 류의 방파는 일성천존의 주사신공을 받드는 자민방이다. 작가는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부의 폭압적인 권력기구를 무협지적 명명으로 형상화하고, 이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의 흐름을 자민투와 민민투의 엔엘(NL)/시에이(CA) 노선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이 소설은 복잡한 현실의 다양한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아쉬움도 남지만, 당대를 명료하게 요약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1990년대 이후 ‘80년대적인 것’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비판이 대두했다. 1980년대의 일부 투사들은 이후 제도 속에서 권력화했으며, 요즘 486/586들은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지독한 욕설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사악한’ 권력에 저항한 무수한 협객들의 순수한 ‘의협’의 시절이 모두 모독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속류화된 ‘협’의 서사, ‘인간시장’
1980년대 초반의 인기소설 김홍신의 <인간시장>(1권, 1981)도 무협지적 시대상과 감수성의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은 현실에서의 억압이 강화될수록 그것을 상상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문화형식을 필요로 했다. 절대고수 ‘장총찬’이 악을 철저히 응징하는 활약상을 그린 <인간시장>은 이러한 대중적인 감수성에 부응하여 밀리언셀러가 되는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흔히 이 소설을 ‘현대판 홍길동의 활약’이라고 일컫는다. 태평성대의 대중들은 홍길동을 기다리지 않는다.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득세하는 부정한 사회에서 홍길동은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80년대 초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도 조세형’ 사건 때 많은 이들은 고관대작의 집에서 나온 물방울 다이아에 분개했고, 도둑질한 물건들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준 조세형을 의적이라 수군댔다. 그가 탈출했을 때에는 은근히 잡히지 않기를 기대한 이도 많았다. 이처럼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의적을 갈망하는 시대적 감수성이 <인간시장> 인기의 배경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장총찬’은 사회의 구조적 악에 도전했던 홍길동에 필적할 만할까? 소설은 순진한 시골처녀들을 꼬여 매춘굴에 파는 ‘인간시장’ 조직, 광신적인 교리로 치부하는 사이비 교단 등의 각종 사회악을 해결하는 장총찬이라는 초절정 고수의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본, 프랑스, 인도 등을 누비는 이 현대판 무협활극의 주인공은 비판적으로 보자면 당대의 진정한 악의 근원들과 맞선다기보다는 5공화국의 구호였던 ‘정의사회 구현’을 혼자 힘으로 실현하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그 시절 우리들은 장총찬의 통쾌한 사이비 ‘협’에 열광하며 사회적 정의감을 충족했는지도 모른다.
한기호의 <베스트셀러 30년>을 보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은 장총찬의 파노라마식 활약상을 통해 대리만족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인간시장>은 어떻게 읽힌 걸까? 무공 수위에 대한 관심이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인간시장>을 다 읽어버려 아쉬움이 남은 죄수들은 자연스럽게 황석영의 <장길산>을 읽었다고 한다. 이어서 교도소 방마다 “장총찬과 장길산 형님이 맞짱뜨면 누가 이길까” 같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또한 역사소설과 대중소설의 영역을 관통하는 당대의 시대적 감수성의 핵심에 ‘협’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작은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 80년대를 강타한 정통무협, ‘영웅문’
1986년 한국의 무협소설 독서의 역사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홍콩을 무대로 무협소설을 발표하던 김용의 <영웅문>이 고려원에서 발간된 것이다. 이른바 김용의 ‘사조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는 1957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하여 무협작가 김용을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들이다. 고려원은 이 3부작을 축약해 소설 <영웅문>(1부 몽고의 별, 2부 영웅의 별, 3부 중원의 별, 총 18권)으로 펴냈다.
이 작품은 남송 시기부터 원을 거쳐 명의 건국 직전까지의 긴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한족과 이민족 간 대립과 투쟁이라는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정파와 사파의 대립, 협객과 미녀들의 로맨스로 소설적 재미를 키웠다.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한 편의 방대한 대하역사소설로 역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한편으로 ‘신필’로 불리는 김용의 문체와 탄탄한 서사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욱 극대화했다. 소설은 8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고 전한다.
일찍이 비평가 김현은 1960년대 무협소설을 중산층의 현실도피와 허무의식의 산물로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서구 성장소설의 구조와 비슷한 무협소설의 서사구조적 특징을 고평하는 통찰을 선보였다. 파란만장한 수업시대와 편력시대를 거쳐 원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괴테적인 빌헬름 마이스터와 온갖 시련을 겪으며 기연을 만나 비급을 연마하여 무림의 절대지존이 되는 무협의 서사는 흡사한 측면을 지닌다. 이를테면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은 우둔한 자질 때문에 고난 속에 더디게 성취를 이루면서도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협사로 성숙해간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 무공을 사용하지 않으며,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의로운 인물 ‘곽정’을 통해서 올바른 삶의 길을 계도받은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대중에게 사랑받아왔던 무협지와 만화에 이제 그에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 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인문한국(HK)교수
1980년대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선도투쟁이 잇달았다. 85년 5월 서울 시내 대학생 73명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공개 사죄 등을 요구하며 서울 미국 문화원을 기습점거했다가 3일간의 단식농성을 끝내고 문화원 건물을 나서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에 맞선 젊은이들의 투쟁
80년대는 ‘무협지적 세계’ 아닐까
미문화원 방화·민정당사 점거
‘강호의 도’ 꿈꾸는 협객과 닮아 유하 ‘무림일기’ 박영창 ‘무림파천황’
무협의 언어로 된 시·소설 출현
김영하 데뷔작 ‘무협학생운동’
전두·노갈에 맞선 연희방 무사
5월광주~6월항쟁 무협지로 재현 ‘현대판 홍길동’ 장총찬에 열광
김용 ‘영웅문’은 800만부나 팔려 ■ 협객들을 위한 송가, 김영하의 ‘무협학생운동’ 1980년대의 시대 상황을 무협으로 재현한 흥미로운 작품도 존재한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김영하의 데뷔작인 <무협학생운동>(아침, 1992)이 그것이다. 이 소설은 1980년 5월 광주로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의 80년대 학생운동사를 무협소설 형식으로 극화하고 있다.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다 1987년 6월 이후 ‘영원한 이름’이 된 이한열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가벼워 보이는 무협의 형식을 차용하여,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다루는 성공적인 서사 전략을 선보인다. 소설에서는 강호를 지배하는 악의 무리로 독두마왕 전두, 노갈, 보안 마귀, 안기 마귀가 있으며, 그 수하에 일마두 삼청교대, 이마두 암살 공자, 삼마두 공작왕, 사마두 도청자, 오마두 임시 동행자, 그리고 백건단 등이 자리한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 류와 초아는 연희방 출신의 정파무사들로 각각 초민선사와 강철대사라는 무림의 고수들을 만나 새로운 방파를 만든다. 초민선사와 초아의 방파는 서역에서 변증창과 유물검을 이어받은 민민방이며 강철대사와 류의 방파는 일성천존의 주사신공을 받드는 자민방이다. 작가는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부의 폭압적인 권력기구를 무협지적 명명으로 형상화하고, 이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의 흐름을 자민투와 민민투의 엔엘(NL)/시에이(CA) 노선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이 소설은 복잡한 현실의 다양한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아쉬움도 남지만, 당대를 명료하게 요약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1990년대 이후 ‘80년대적인 것’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비판이 대두했다. 1980년대의 일부 투사들은 이후 제도 속에서 권력화했으며, 요즘 486/586들은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지독한 욕설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사악한’ 권력에 저항한 무수한 협객들의 순수한 ‘의협’의 시절이 모두 모독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80년대의 시대상황에 맞물려 인기를 끌었던 무협지와 소설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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