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근교의 한 병원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수많은 인명을 구한 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김동수(왼쪽)씨가 김선현 차의과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장에게 그림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김씨는 지난 14일 열린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해양경찰 관계자가 위증을 했다”고 항의하며 자해를 했다. 김씨의 가슴과 배에 상처가 남아 있다. 김선현 교수 제공
[토요판] 뉴스분석 왜?
‘자해’ 세월호 화물기사 김동수씨
‘자해’ 세월호 화물기사 김동수씨
▶ “억울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파란 바지의 의인’이라고 불렸던 김동수씨는 지난 14일 세월호 청문회에서 이렇게 외치며 자해했습니다. 3일간 청문회 가운데 언론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그의 행동은 단순한 ‘울분’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참사 이후 누적돼온 ‘트라우마’의 영향이었습니다. 정부가 구하지 못한 승객을 20여명이나 구해 찬사를 받았던 그는 이제 “잊혀지고 있다”며 고립감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세상에 보내는 ‘절규’를 들려드립니다.
“한 놈만 미안하다고 해라. 한 놈만. 변명하지 마라.”
지난 14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청문회 방청석 뒤쪽에 앉아 있던 생존 화물기사 김동수(50)씨는 이렇게 혼잣말을 계속했다. 증인으로 나온 해양경찰 관계자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등 책임 회피성 발언을 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 김형숙(47)씨는 남편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봐 가슴을 졸였다. 그는 이미 지난 3월19일에도 제주도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은 바 있었다.
김씨의 가슴에 불을 댕긴 건 증인으로 나온 해경 123정의 승조원 박상욱씨의 발언이었다. 당시 청문회장에선 123정이 조타실에서 세월호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을 구조한 뒤, 박씨와 다른 선원 조준기씨가 세월호에 남아 있었던 동영상이 상영됐다. “123정이 당신과 조씨를 남기고 떠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진 위원의 질문에 박씨는 “123정이 조류에 밀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억눌려왔던 김씨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솔직히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저 억울합니다. 위증입니다, 위증!” 김씨는 왼손으로 윗옷을 들어 올린 뒤 가방에 있던 가위(근육운동을 자주 하는 김씨는 몸에 운동용 테이프를 붙이기 위해 가위를 늘 갖고 다녔다고 한다)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 긴장하고 있던 아내 김씨마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우리 남편이 20명이나 구했는데… 왜 이래야 하냐고….” 아내 김씨가 흐느꼈다.
“김씨의 행동은 ‘트라우마 환자’에게 나타나는 ‘플래시백’(재현) 현상입니다.” 지난 4월부터 한달에 한번 남짓 김씨가 살고 있는 제주를 방문해 미술치료를 하고 있는 김선현 차의과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장은 김씨의 이런 행동이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비슷한 남성을 보면 당시 상황이 떠올라 깜짝 놀라 실신하는 것처럼, 승조원의 발언을 들은 김씨에게 당시 상황이 재현됐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사 후 600여일이 지나는 동안 ‘파란 바지의 의인’이라 불렸던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이들이 밤마다 쫓아왔다
입원 나흘째인 지난 17일, 병실에서 만난 김씨는 수척한 모습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보도됐던 사진과 지난 3월 한차례 자해 시도 이후 보도됐던 모습보다 더 야위어 있었다. 피곤한 표정의 그는 남편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눈물짓던 아내와는 달리 인터뷰 초반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독한 정신과 약 탓에 말투도 어눌했다. 그는 아내의 말을 들으며 종종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사 전날, 김씨는 4년 전 빚을 내 장만한 4.5t 트럭에 화물을 싣고 제주로 가는 세월호에 올랐다. 세월호는 김씨가 자주 이용하던 배였다. 다음날, 김씨는 아침 7시40분에 일어나 밥을 먹고 아내와 통화한 뒤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고 있었다. 8시46분께부터 갑자기 배가 기우는 것을 느꼈다. “이제 끝났다”고 직감한 김씨는 동료 기사들에게 구명조끼를 입으라고 한 뒤 선미 갑판으로 나갔다. 배의 구조를 잘 알고 있던 그는 멀리서 헬기가 오고 있는 것을 보고, 4층 우현 쪽 출입문으로 내려왔다. 9시38분,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봤다. 근처에 있던 소방호스를 늘어뜨려 구명조끼를 입고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을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직전까지 구조작업은 계속됐다. “학생들을 구하려던 생각밖에 없었다.” 지난해 7월23일,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그가 했던 얘기다.
‘화물차 빚만 갚으면 두 딸과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삶은 이날부터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의 기억 속엔 그가 구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구하지 못한 사람들만 남아버렸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나갔기 때문에 노인들이나 아이들은 그가 내렸던 생명줄인 소방호스를 잡지 못했다. 7살짜리 어린이, 물에 떠 있는 학생과 아저씨….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그를 괴롭혔다. “버스를 타면 창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뛰어내리라고 하려고 하고, 창밖에 있는 학생들을 보면 배 안에 있던 학생들이 생각나요. 죽은 학생들에게 미안해서 따뜻한 물로 샤워조차 하지 못했어요. 배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내가 끝까지 남아서 학생들을 도왔다면 이런 참사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 죽을죄를 지은 것 같아요.” 김씨의 아내는 “밤만 되면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나를 쫓아온다’고 울면서 남편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남편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김씨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에 의지해 밤 11시쯤 겨우 잠이 들어도 새벽 2시가 되면 깼다고 한다.
김씨의 억눌린 마음은 바깥으로 자주 표출됐다. 운전대를 잡을 때도 다른 운전자들과 시비가 붙기 일쑤였고, 마라톤대회 관계자가 물을 나눠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를 내기도 했다. 화살은 그의 곁을 지키던 가족들에게도 돌아왔다. 지난달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본 둘째 딸이 시험 결과가 좋지 않다고 울자 김씨는 “나 때문에 시험 못 봤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며 “세월호 때 죽은 아이들은 시험도 못 봤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 트라우마 환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죄책감 탓에 생긴 분노다. 김씨가 화를 낼 때마다 가족들은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김씨의 아내는 “딸들이 아버지의 기분을 맞추려고 애써 웃음을 지을 때마다 안쓰럽고 미안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때 20여명 생명 구한
김동수는 왜 청문회서 분노했나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쫓아온다’
죄책감 잠 못들던 600일의 밤
트라우마 앓으며 가족도 생채기 “나는 편하게 살면 안 되는 사람”
집에서도 가장 추운 방 지내
정부 외면과 삐딱한 시선에 상처
아내 “남편과 수면제 먹을까…”
온전한 치료와 국가 관심 절실 고장난 세탁기도 바꾸지 못한… 김씨는 청문회장에서 “나라가 구조하지 않은 세월호에서 살아온 게 죄입니까”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그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부와 고통을 호소하는 그의 모습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었다. 지난해 5월,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화물차 때문에 밥줄이 끊긴 기사들에게 신규차량 구입 명목으로 정부 보증 대출 7000만원과 생활자금 2000만원이 지원됐다. 이를 두고 화물차 기사들이 보상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씨는 일반인 희생자들이 있는 인천과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들이 있는 안산,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 팽목항을 찾아 ‘오해’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다. 지난 6월에야 주위의 도움 없이 우여곡절 끝에 의상자로 지정됐는데, 그 무렵 4년 전 구입했던 중고차를 바꾸자 “성금을 받아 새 차를 뽑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고장난 세탁기를 바꾸는 데도 눈치가 보여 한달을 손빨래를 하고 빨래방을 돌아다녔다”고 김씨의 아내가 말했다. 의상자로 지정된 이후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데도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의사상자 등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의료급여·교육보호·취업보호 역시 정부의 책임으로 돼 있는데, 관계기관에선 ‘떼쓰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만 같았다. 김씨의 아내는 “의인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차라리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말걸 그랬다. 그냥 죽은 듯이 사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고 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듣기만 했던 그가 처음 입을 연 것은 특조위와 청문회 진행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진상규명을 바라는 만큼 특조위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그는 특조위에도 소외감을 느끼는 듯했다. 김씨는 “(사람들을 구하고 해경 배에 탔을 때) 배 안에 200~300명이 있다고 말했더니, 해경이 ‘걱정하지 마라. 특공대가 있으니 다 구할 거다’라고 말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시 현장에서 자신이 본 것들을 자세히 설명하며 “체육관에 갔더니 노란 옷을 입은 해수부(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해수부 장관은 이제 옷 벗어 국회의원으로 돌아갔고 해경도 자리를 바꿔서 (증인석에) 앉아 있는데… (직책을) 자진 반납하든가 국가에서 자르든가 해야지 왜 저렇게 됐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답답해했다. 김씨는 자신이 현장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음에도 특조위가 청문회를 한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고, 사전에 자신의 증언을 듣지 않았다는 점에 불만을 드러냈다. 김씨의 아내는 “청문회를 연다면 사전에 생존자들에게 공문이라도 보낼 수 있지 않았느냐”며 “청문회 사실을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알게 됐고, 방청권도 특조위에 전화를 걸어 겨우 구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특조위가 나의 증언을 녹취해놓고 이를 바탕으로 증인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한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며 “내가 (증인들이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면) 바로 답할 수 있는데, 위원들이 각본대로만 읽고 있는 것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특조위 관계자는 “생존자 모두에게 포스터를 발송했다”고 밝혔다. 김씨가 어떤 이유에선지 이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특조위 관계자는 “제주도를 방문해 화물차 기사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지만 김씨를 만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전으로 돌아가려면
김씨와 그의 가족들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만 해도 김씨는 짬이 날 때마다 둘째 딸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딸바보’였고, 쉰이 다 된 나이여도 마라톤 동호회에서 항상 선두권 기록을 내는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세번씩 제주도와 육지를 오가며 화물을 날라 생계를 책임지던 부지런한 가장이었다. 그는 지난 10월 새로 이사간 집에서 ‘가장 추운 방’을 자신의 방으로 골랐다. 그는 이제 “나는 편하게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 그런 남편을, 아빠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미어진다. 김씨의 아내는 “딸들이 시집만 갔어도 남편과 같이 수면제 먹고 영원히 잠들 생각도 했다”고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가족들이 지고 있는 부담을) 국가가 나눴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김씨의 아내는 자신들이 바라는 것은 ‘의인 대접’이 아니라고 여러번 강조했다. 트라우마에 대한 온전한 치료와 이를 위한 국가와 사람들의 관심을 바란다고 했다. 김씨는 “마음이 망가지고 의지조차 없는 상태”라며 “병원에서 때마다 ‘약 먹고 오세요’ 하는 것 말고, 억눌려 있는 걸 꺼낼 수 있는 체계적인 치료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김선현 원장은 “대형 재난이 터졌을 때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컨트롤타워가 기능을 갖췄으면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국가에서 보호받지 못했다는, 소외됐다는 느낌이 트라우마를 키운 상태다. 지금이라도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씨의 아내는 피해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요청했다. 특조위는 ‘피해자군별 세월호 참사 피해자 지원 실태조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지난 4일에야 용역 수행자가 선정됐다. 정부와의 예산·시행령 갈등으로 특조위가 본궤도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많이 지체된 탓인데, 그사이 김씨의 치료를 위한 ‘골든타임’이 지나간 건 아닌지 모르겠다.
김씨와 김씨의 아내는 ‘왜 아직도 못 헤어나오고 있느냐’는 말을 듣는 게 가장 큰 상처가 된다고 말했다. 600여일 전 그날과 지금이 달라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병실에서 50번째 생일을 맞았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입원 때문에 제주도에서 올라온 두 딸은 몰래 케이크를 사와 병실에서 잔치를 했다. 김씨의 둘째 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씨가 엷게 웃고 있는 생일잔치 사진을 올린 뒤, “(아버지에게) 좋은 말만 해주시고 이해해주세요”라고 적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김동수는 왜 청문회서 분노했나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쫓아온다’
죄책감 잠 못들던 600일의 밤
트라우마 앓으며 가족도 생채기 “나는 편하게 살면 안 되는 사람”
집에서도 가장 추운 방 지내
정부 외면과 삐딱한 시선에 상처
아내 “남편과 수면제 먹을까…”
온전한 치료와 국가 관심 절실 고장난 세탁기도 바꾸지 못한… 김씨는 청문회장에서 “나라가 구조하지 않은 세월호에서 살아온 게 죄입니까”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그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부와 고통을 호소하는 그의 모습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었다. 지난해 5월,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화물차 때문에 밥줄이 끊긴 기사들에게 신규차량 구입 명목으로 정부 보증 대출 7000만원과 생활자금 2000만원이 지원됐다. 이를 두고 화물차 기사들이 보상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씨는 일반인 희생자들이 있는 인천과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들이 있는 안산,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 팽목항을 찾아 ‘오해’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다. 지난 6월에야 주위의 도움 없이 우여곡절 끝에 의상자로 지정됐는데, 그 무렵 4년 전 구입했던 중고차를 바꾸자 “성금을 받아 새 차를 뽑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고장난 세탁기를 바꾸는 데도 눈치가 보여 한달을 손빨래를 하고 빨래방을 돌아다녔다”고 김씨의 아내가 말했다. 의상자로 지정된 이후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데도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의사상자 등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의료급여·교육보호·취업보호 역시 정부의 책임으로 돼 있는데, 관계기관에선 ‘떼쓰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만 같았다. 김씨의 아내는 “의인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차라리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말걸 그랬다. 그냥 죽은 듯이 사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고 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듣기만 했던 그가 처음 입을 연 것은 특조위와 청문회 진행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진상규명을 바라는 만큼 특조위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그는 특조위에도 소외감을 느끼는 듯했다. 김씨는 “(사람들을 구하고 해경 배에 탔을 때) 배 안에 200~300명이 있다고 말했더니, 해경이 ‘걱정하지 마라. 특공대가 있으니 다 구할 거다’라고 말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시 현장에서 자신이 본 것들을 자세히 설명하며 “체육관에 갔더니 노란 옷을 입은 해수부(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해수부 장관은 이제 옷 벗어 국회의원으로 돌아갔고 해경도 자리를 바꿔서 (증인석에) 앉아 있는데… (직책을) 자진 반납하든가 국가에서 자르든가 해야지 왜 저렇게 됐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답답해했다. 김씨는 자신이 현장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음에도 특조위가 청문회를 한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고, 사전에 자신의 증언을 듣지 않았다는 점에 불만을 드러냈다. 김씨의 아내는 “청문회를 연다면 사전에 생존자들에게 공문이라도 보낼 수 있지 않았느냐”며 “청문회 사실을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알게 됐고, 방청권도 특조위에 전화를 걸어 겨우 구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특조위가 나의 증언을 녹취해놓고 이를 바탕으로 증인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한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며 “내가 (증인들이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면) 바로 답할 수 있는데, 위원들이 각본대로만 읽고 있는 것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특조위 관계자는 “생존자 모두에게 포스터를 발송했다”고 밝혔다. 김씨가 어떤 이유에선지 이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특조위 관계자는 “제주도를 방문해 화물차 기사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지만 김씨를 만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공포(나올 수 있었는데)> 당시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구조에 온 힘을 다하였던 김동수씨는 자신의 눈으로 본 마지막 희생자들의 모습을 표현하면서 구조에 힘썼지만 구해내지 못한 사상자에 대한 죄책감에 힘들어하였다. 뭉크의 절규 도안을 완전히 붙이지 않은 이유는 창문만 열렸다면 살아나올 수 있던 사람들인데 그러지 못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였다. 김씨는 세월호 창문에서 나오지 못하는 일반인과 학생들이 절규하는 장면이 매일 떠오르고 정신과에서 짧은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는 동안은 털어놓지 못하던 자신의 속내를 털어내었다. 김선현 교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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