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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너의 전역일이 360일 미뤄졌노라

등록 2015-12-18 21:33수정 2015-12-19 11:07

[토요판] 커버스토리
‘탈영, 유혹의 순간’ 논픽션 가작 3 뒤집힌 ‘상근예비역’

나는 더위를 무서워한다. 태어날 때부터 열이 많은 체질이라 초여름만 되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린다. 땀이 본격적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지루성 피부염과 간지러움으로 밤잠을 설친다. 특히 엉덩이와 사타구니, 배꼽 등이 가려워 미친다.

나는 미련하게도 대한민국 기상청 설립 이후 가장 더웠다는 1994년에 군대(인천 수도 포병여단)를 갔다. 당시 39도까지 올라갔던 날 시내 아스팔트에서 계란을 깨 후라이로 만든 대구엠비씨의 보도는 당시 더위가 어땠는지 설명해준다. 최악의 여름 날씨와 군복의 만남.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1994년의 여름은 직무교육의 일환으로 연병장을 쉴 새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당연히 온몸에 빨간 반점들이 온몸을 뒤덮었고, 밤만 되면 가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군의관은 임시방편으로 무좀약을 처방해주었다. 간지러움이 심해지면 근육통에 바르는 ‘맨솔래담’을 엉덩이에 발랐다. 이 약의 따갑고 화끈한 느낌이 간지러움을 조금 잡아주었으나 그 냄새로 인해 수많은 구박을 받았다.

상태는 점점 심각해져 진물이 나기 시작했고,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선풍기 밑에 엉덩이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간지러움과 선임병들의 눈치가 맞물려 사람이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말 그대로 군 고문관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가을이 오고 이등병에서 일병으로 승진했지만 피부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첫 휴가 때 피부 전문 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상태를 보고 놀랐다. 이런 상태로 군 생활이 가능하겠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처방해준 약을 한 보따리 안고 군으로 복귀하면서 생전 처음으로 탈영의 유혹을 느꼈다. 밤만 되면 통풍 잘되는 반바지가 있는 세상에서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는 꿈을 꾸었다.

더위와 최악의 피부병에 지쳐
피부약 안고 복귀하며 탈영 유혹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피부병도 낫게 한 조기전역 통고
한데 이건 또 무슨 운명 장난인가

 

낭보, 그리고 비보

11월이 되니 간지러움도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피부약 후유증으로 온몸에 힘이 빠지고, 입맛은 떨어져 점점 말라만 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포대장의 호출이 왔다. 아마도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상담하려는 눈치였다. 긴장된 마음으로 포대장과 면담을 나누는데 상상치도 못한 얘기가 나왔다.

“전 일병은 내년 너 입대한 3월22일에 정확히 전역을 한다.”

“네? 무슨 말씀인지요. 제가 왜 전역을 하나요? 의병제대인가요?”

“아니다. 상근예비역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군에서 1년 근무하고 고향으로 가서 동사무소 등에서 18개월을 근무하는 제도가 생겼는데 전 일병이 거기에 선정되었다.”

군 교회에서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니,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런 행운을 주셨나?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군을 전역할 시점이 4개월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탈영을 하지 않고도 합법적으로 군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소문은 온 포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물론 고향에서 18개월이나 근무를 해야 하고 이는 일반 군생활보다 4개월이나 긴 기간이었다. 그러나 잠은 집에서 자고 에어컨이 솔솔 나오는 구청에서 근무를 하는 조건이니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그 선정 과정은 알 수 없었지만, 이 지옥 같은 군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모든 것이 변했다. 심지어 피부조차 낫기 시작했다.

말년 병장들이 청소에서 나를 열외시켜 주고 침상에 같이 눕히는 등 나를 병장 대우 하기 시작하면서, 중간 선임병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두어 달 뒤면 전역이었다. 맞으면서도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제대 날짜가 다가오자, 호기롭게 보급받은 군용품들을 동기들에게 주기 시작했다. 동기 한 명은 울기까지 했다. 나는 조금만 참으면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이고 자주 면회 오겠다는 여유까지 부렸다. 꿈같은 하루하루였다. 그러나 로또처럼 찾아온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행운이 나의 발목을 잡고, 탈영과 자살을 결심하는 것으로 변할지 꿈에도 몰랐다.

제대를 두 달 남긴 어느 날(1995년 1월쯤으로 기억한다) 행정병으로 일하던 선임병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걸어왔다.

“전 일병, 지금 국회 상황이 심각한가봐. 현역 군인들을 상근예비역으로 전역시키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여론이 퍼지고 있어. 전역이 안 될 수도 있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당연히 나를 놀리기 위한 말로 받아들였다. 그전에도 동기들이 전쟁 나면 너의 전역은 취소라고 놀렸다.

그런데 운명처럼 비보가 날아왔다. 내무반으로 배달되어 온 국방일보 1면에 ‘부결’(否決)이라는 큰 글자가 내 눈을 때렸다. 안 좋은 예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써 국방일보를 읽지 않았다. 아니 혹시 모를 불안감에 읽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속으로 신문에 얼마나 많은 오보가 나는지 주문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주위를 살펴보니 내무반에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을 가도 주위의 동료들이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포대장이 나를 불렀다. 나의 손을 붙들고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제 국회에서 현역 군인들을 상근예비역으로 뽑는 제도가 국회에서 부결되었어. 상근예비역에 선정되지 못한 현역 군인들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고 해서, 갑자기 반대표가 많아진 모양이야. 위에서 연락 온 것을 받았는데 전 일병도 26개월을 다 근무해야 할 거 같다. 힘내자.”

전역 D-DAY 60일이 420일로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여기다 붙일 수 있을까. 너무 큰 쇼크로 귀에서 삐이익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알 수 없는 두통으로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자신들 마음대로 상근예비역으로 선정했다가 국회에서 그걸 다시 취소한 것이다. 부당한 결정에 항의하고자 부대 밖으로 뛰쳐나가 죽고 싶었다. 전방 부대처럼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여러분, 이게 상상이 됩니까?”

매일 눈물만 흘렸다. 졸지에 포대에서 심각한 관심사병이 되었다. 불침번과 야외근무에서 열외가 되었다. 배려해서가 아니라,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잠을 자고 있으면, 불침번들 사이에서 나를 잘 감시하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 동안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밥도 먹지 못했다. 먹으면 바로 토했고, 한숨만 쉬었다. 대대장, 포대장, 소대장 등 군 간부들의 면담이 이어졌다. 먼 미래의 장래를 위해 군생활을 다 마치면 더 좋다는 하나 마나 한 얘기들이다. 속에서 천불만 올랐다.

동기들은 나에게 받은 군 물품들을 몰래 가져다 놓았고, 거기다 자신들의 물건을 덤으로 주었다. 나를 괴롭히던 선임병들은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간부들은 고향에 전화를 해 나의 상태를 설명했다. 한동안 괜찮던 피부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절벽 위를 걷는 심정으로 버텼다.

그 뒤 6박7일의 위로휴가가 주어졌다. 고향에 도착 후 휴가를 즐길 생각도 못하고 술만 먹고 잠만 잤다. 복귀하는 기차 속 풍경이 참으로 슬펐다.

복귀 후 전역 날짜가 지나가니 차츰 적응이 됐다. 상병으로 진급을 했고, 병장들은 신병들이 들어올 때마다 웃으면서 나를 전역 경험자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난 후 진짜 만기 제대하는 날이 돌아왔다. 그날 후임병들에게 한마디 했다.

“세상에 가장 끔찍한 꿈이 군대를 두 번 가는 꿈입니다. 그런데 저는 전역을 두 번 경험했습니다. 한 번은 14개월 전에 했고 한 번은 오늘 합니다. 한번 상상해보세요. 60일 남았던 군생활이 420일로 늘어났습니다. 이런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무사히 제대했으니 여러분들도 어떤 힘든 일도 이겨내고 힘내서 건강히 전역하세요.”

이 말을 전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많은 박수를 받았다. 무사히 만기 전역을 했지만 당시 주위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죽거나 탈영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입대 동기들이 위로해주었고, 포대장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 나를 돌봐주었다. 지금도 빳빳한 군복을 입은 일·이등병들을 보면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고통스러웠던 피부병과 두 번의 전역 경험.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당시 많은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던 동기들과 포대장이 생각난다.

전진한/알권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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