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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부정투표함 지키러 무장탈영을 하자니…

등록 2015-12-18 21:38수정 2015-12-19 11:16

만화 갈무리.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토요판] 커버스토리
‘탈영, 유혹의 순간’ 논픽션 가작 2 방순대에서 보낸 한 철

학교의 권고로 휴학을 하고 난 뒤에 선택한 병역은 의무경찰이었다. ‘의령 경찰 총기난동 사건’의 대책으로 1983년 시작된 의무경찰 제도는 교통이나 경찰 행정을 보조하는 작은 경찰로 순경 채용 시 우대한다는 방침에 그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기들 몇명은 입대를 서두르기도 했다. 의경 가면 전경처럼 데모 진압 부대는 안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달의 논산훈련소와 이어진 부평 경찰학교 교육을 마친 뒤에 열다섯의 동기들과 함께 배치가 된 곳은 서울 외곽에 있는 경찰서였다. 의무경찰도 ‘방범순찰대’라는 부대에서 데모 진압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도착 다음날 ‘생애진술서’라는 걸 쓰면서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데모가 심해져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의무경찰은 전경보다도 복무기간이 삼개월이나 더 길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여기 죽으러 온 거 아니잖아”

내가 소속된 방순대 279중대는 좀 이상한 조직 구성을 하고 있었다. 120여명의 중대원 중에 최고 기수인 7기만 40명 이상이었다. 모두 제대가 일년 이상 남았지만 창설 부대원이라는 특권으로 처음부터 고참으로만 군대 생활을 시작한 존재들이었다. 그 기수의 기묘한 특권 의식은 그 아래 기수인 8기 밑으로는 모두 ‘아랫것’들로 치부하는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러다 보니 희망 없는 군대 생활을 해야 했던 중간 기수들은 자기 밑으로 ‘쫄따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상한 트집을 잡아 괴롭히는 걸 소일거리 삼아 살고 있었다.

최고 기수와 정확하게 2년의 짬밥 차이가 나는 우리 기수가 배치되자 이상한 기운이 흘렀다. 전원 다 대학을 다니다 왔고 경찰학교 성적도 나름 괜찮은 애들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고참들 사이에서는 ‘그 기수는 쪽수도 많으니, 기 좀 죽여야 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닌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최고 기수들의 나이와 우리 기수의 나이가 모두 똑같았다는 것이다. 걸핏하면 ‘야, 대학에서 데모나 하다 온 놈, 부모 잘 만나서 복받은 놈들’이라는 비아냥이 따라붙었다. 일명 ‘챙기는 기수’인 일경 계급들은 수시로 집합을 걸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내가 이러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야. 저 새끼들 때문에 나도 군대 생활 좆같아. 그래도 어쩌겠냐? 니들이 쫄따구로 들어온 게 죄지. 엎드려라” 퍽퍽퍽.

부대에는 세 가지 기본 근무가 있었다.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 부근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출발하는 전방 입소 대학생들이 벌이는 입소 반대 시위를 막고 감시하는 출동 하루, 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시국 재판의 소요와 법원 타격 투쟁을 막는 출동 하루, 상계동 대단지 철거민 소요 대비 출동 하루. 이렇게 세 가지 출동을 번갈아가며 하는 것이 279중대 출동의 기본 흐름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관내에 데모할 만한 대학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도 여대라는 것과, 데모할 일이 전혀 없는 사관학교라는 것이었다. 이만하면 당시에는 꽤나 편한 근무지였다.

이런저런 출동과 대기로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출동버스 안에서 고참들은 사소한 트집을 잡아 ‘깨스’를 걸었고(국에 건더기가 적었다거나, 다림질한 바지 줄이 제대로 안 섰다거나, 쫄따구가 버스에서 졸았다거나 하는 그런) 그런 날이면 버스 뒷자리나 옥상 한쪽에서 구타 세례가 이어지곤 했다. 물론 그 자리에 정작 깨스를 건 최고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기간 중에 5·3 인천투쟁이 있었고, 건대 항쟁이 있었고, 상계동에서는 철거하는 담벼락이 무너져 놀던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과, 끝내 방에서 나오지 않은 주민이 포클레인이 내려찍은 천장에 깔려 사망했다는 내용이 무전기를 타고 들려왔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 기수는 일경으로 진급했다.

5월 어느 날, 방 일경이 옥상에서 울고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차라리 맞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 기수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며 폭행을 당한 터였다. 중고참들은 방 일경 아래 기수를 집합시켜 놓고는 방 일경의 가슴을 대여섯차례 가격한 뒤에 그 배수로 다음 기수를 때리고 그다음 기수는 또 그 배수로 아래 기수를 때리라고 했다. 6대가 12대가 되고 이제 막 배치받은 신입들은 모두 24대를 맞아야 됐던 것이다. 이를 거부한 방 일경은 ‘그럼 니가 다 맞아’ 하는 고참의 외침과 함께 매타작을 당했다.

옥상 난간에서 방 일경은 한쪽 발을 걸쳐놓고 있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다 끝나는 거잖아? 안 그래도 데모 막을 때마다 학교 선배들 동기들 보기 죄스러웠는데, 이런 꼴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인간이란 게 이러고도 살아 있어야 하는 건가?”

나는 방 일경의 허리를 안으면서 함께 울었다.

“그래도 죽지는 마. 여기 죽으러 온 거 아니잖아.”

방 일경은 그 뒤 관리반에서 면담을 진행했고, 파출소 근무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그는 파출소 근무 중 관내에서 벌어진 대학 시위에 초동 출동했다가 다리에 화염병을 맞고 화상을 입어야 했다.)

의경 가면 데모진압 안한다는
소문은 가보니 사실과 달랐다
출동버스 안에선 연일 ‘깨스’
기수별로 이어진 구타 있던 날
방 일경은 옥상에 발을 걸쳤다

“지금 구로구청에서 난리 났다
가자, 가서 사람들을 구해야 해”
강 수경이 ‘무장탈영’을 말했다
우린 변기를 치고 울었고 다음날
구로구청에서 시민들이 끌려왔다

86년과 87년의 살풍경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별다른 출동 없이 시위 진압 훈련이나 하면서 보내던 날들이 계속됐다. 훈련을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왔는데 19기 고참 수경이 이층 침상으로 올라오란다. 수경은 지난번 외박 때 여자를 소개해주지 않았다고 며칠 전부터 갈구고 있었다. 침상에 올라가 앉았다.

“똑바로 앉아. 어이 이제 일경 달구 짬밥 좀 먹었다 이거지? 개기는 거야?”

“아닙니다.”

“가서 화장실 변기 좀 닦고 와. 보니까 노랗게 오줌 때 끼었던데 청소 그따위로 할 거야? 단 고무장갑 쓰지 말고, 맨손으로. 여기 10원짜리 하나 줄 테니까 이거로만 닦아. 이게 오줌 때 벗기는 데 최고거든.”

소변기 12개를 닦고 돌아오니, 이번에는 자기 팬티 두개를 내주며 빨아오란다. 그러면서 “쫄따구는 고참이 시키는 거는 다 해야지 안 그래?” 하면서 킬킬거린다. 팬티를 빨아서 가져다주자, 이번에는 추리닝을 내리며 성기를 꺼내었다.

“야, 인제 내 자지도 좀 빨어 봐. 빤쓰도 빨았으니까 이것도 못 빨 거 없잖아, 응?”

눈길을 천장에 고정하고 대꾸도 않고 있는데 얼굴로 손등이 날아왔다.

툭툭툭.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손등으로 구분 없이 갈기면서 그는 웃었다.

“나이도 똑같은 게 고참이라고 괴롭히니까 기분 나쁘지? 생일두 보니까 니가 나보다 한달이 빠르던데.”

“아, 닙, 니, 다.”

“에이, 뭐 얼굴에 다 써 있는데. 니 드런 인상에 다 써 있단 말이야 새끼야. 억울하면 너두 대학 다니지 말고 바로 오지 그랬어? 니들이 대학에서 데모하는 동안 내가 여기서 얼마나 좆뺑이쳤는 줄 알아? 이 씨발 새끼야.”

그는 감정의 동요 없이 십분 이상 그렇게 얼굴을 때렸다. 내무반에서는 아무도 기척을 하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지자 이번에는 눈물을 갖고 트집을 잡았다.

“그래, 솔직하게 덤벼봐, 씨발 좆같아서 못 맞겠다고. 그런 배짱도 없는 새끼가 개겨, 응?”

그때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7기 왕고 한명이 지나치듯 말했다.

“애, 그만해라, 너두 제대 얼마 남았다고 그러냐. 그러다 얘가 너 죽이고 탈영할지도 몰라 인마.”

나는 내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고참과 같은 고향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그날의 일이 선명히 떠오르는 트라우마가 시작되었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어이없는 발표가 나던 시절에 나는 월요일마다 치안본부로 주보를 보고하러 다니는 보안과 행정의경이 되었다. 담당 의경이 신병 기수 폭행 건에 연루되어 영창에 간 덕분에 찾아온 발령이었다.

279 중대원들은 여전히 시위 진압을 하러 다녔고, 87년 6월의 어느 날엔가는 한국은행 앞 분수대에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소대장마저 무전기를 빼앗기고 그 빼앗긴 무전기에서 ‘어, 여기 이 새끼도 대머리네’ 하던 군중의 목소리가 경찰서 상황실로 전파된 적도 있었다. 그날 자정까지 중대에 닭장차를 타고 복귀한 중대원들은 삼분의 일이 안 되었다. 나머지는 인가에서 교련복이나 추리닝을 얻어 입고, 택시를 얻어 타거나 시내버스로 들어왔고, 또 삼분의 일은 경찰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경찰서의 민간용 무기(엽총과 경기용 총)를 소개해 북한산 어느 무기고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다. 경찰서 상황실 근무 의경의 입에서는 비상계엄이 내려지고 서장이 곧 대위급 군인으로 올 수도 있다, 최루탄이 다 떨어져서 내일은 군인들이 실탄 들고 막을지도 모른다는 등 근거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돌던 하루였다.

남부군의 모습을 닮았던 그들

그해 여름, 전경이 쏜 에스와이(SY)-44 최루탄을 직격으로 머리에 맞은 청년이 끝내 숨졌다.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는 직선제 수용을 발표하면서 그렇게 한 시즌이 지나가고, 12월에는 처음으로 직접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동타격대에 근무하던 강 수경이 찾아왔다. 그는 봄이 오기 전에 제대를 할 예정이었다. 강 수경은 입초 근무를 서고 왔는지 손에는 총까지 들려 있었다.

“지금 구로구청에서 난리가 났다.”

“난리라니?”

“투개표 부정에 반발하는 시민들이 구로구청을 접수해 버렸어. 그런데 무전을 들어보니 곧 타격대가 출동할 거 같아. 그 사람들 다 죽을지도 몰라.”

어려서부터 광주의 소식을 듣고 자랐다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울먹이고 있었다.

“가자. 가서 그 사람들을 구해야 돼.”

“말도 안 돼. 우리가 어떻게 구한다는 거야.”

그가 한 말은 ‘무장탈영’이었다. 부정투표함을 지키러 가자는 거였다. 이쪽도 무기를 갖고 있으면 쉽게 진압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이 사람들이 살 수 있다는 거였다. 내무반 화장실에서 밤새 구청 상황을 무선으로 들으며 그는 울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주먹으로 변기를 치며 우는 것밖에는 없었다.

다음날부터인가, 구로구청에서 잡아왔다는 일단의 시민들이 우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그들은 흡사 토벌을 피해 겨울을 나야 하는 남부군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얼굴은 최루탄 가루더께가 앉아서 시뻘겋게 부풀었고 옷은 모두 소방호스의 물벼락을 맞아 젖은 채였다.

그렇게 새 대통령이 뽑혔고 그 뒤로 다섯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화장실에서 울던 친구는 개나리꽃 피는 봄에 제대해 복학했다가 러시아로 연극 공부를 한다며 떠나갔다. 다리에 화상으로 그을린 흉터를 갖고 있던 방 일경은 제대 후 신학교에 복학해 학업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 나는 그 19기 고참의 고향 동네 부근에서 근근이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강유홍/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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