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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가난하게 살고 싶어 선택한 이들끼리 기적처럼 삽니다”

등록 2015-12-29 19:09수정 2015-12-30 14:30

작가 김중미씨
작가 김중미씨
[짬] 송년 특집-나누는 사람들 작가 김중미씨
지난 22일 오후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기찻길옆 작은학교’를 찾았다. 아이들의 신발이 1층 출입구를 꽉 채우고 있었다. 들여다보니 초등생들이 둘러앉아 공부방 이모·삼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갔다. 공부방의 큰이모 김중미씨가 반갑게 맞는다. 인사를 나누고 차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큰이모와 작은이모, 삼촌들 사이에 들뜬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초등부 아이들이 방금 써낸 소망 카드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한다. 사랑스럽기도, 자랑스럽기도, 때론 안쓰럽기도 한 아이들의 존재가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장면이다. 김 작가는 1987년부터 ‘빈자들의 삶터’ 괭이부리마을에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1986년 천주교도시빈민회 가입해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정착
‘기찻길옆 작은학교’ 공부방 열어
2001년 강화 양도면에서도 운영

활동가 38명 중 22명 ‘부부 공동체’
“지원금 끊겨 인형극 못할까 걱정”

그는 동화작가다. 2001년 쓴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200만권 이상 팔렸다. 첫 작품의 성공 이후 <조커와 나><모두 깜언>등 꾸준히 작품을 펴냈다. 하지만 작가로서 살아온 기간은 괭이부리말 이모로 살아온 시간의 절반쯤에 불과하다.

김씨는 왜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걸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가난했지만 이웃들이 어울려 한집처럼 즐겁게 살았어요. 김장 날짜를 정해 같이 했구요. 그런 분위기에서 살았던 게 도움을 준 것 같아요.” 그리고 그의 어머니, 아버지다. “우리 가족에겐 현재가 중요했어요. 성공해라, 커서 뭐가 되라는 이야기를 부모님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어머니는 친구들과 다툼이 있을 때는 그 친구의 마음을 잘 이해하라는 말씀을 했지요.”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서 일했지만 그의 집은 가난했다. “미군 부대서 돈을 벌려면 뒷돈을 챙겨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걸 할 줄 모르셨거든요.”

그는 4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모두 세살 터울이다. 고교 졸업 뒤 바로 취업을 했다. 대학 진학 문제로 “부모님이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싫어” 미리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첫 일터인 대형병원 원무과 근무 때 경험이 그의 사회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열다섯살 소년이 공장에서 손가락 네개가 잘렸는데, 너무 많은 병원을 들렀다 오는 바람에 끝내 접합 수술을 받지 못했어요. 아이의 산재처리에라도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요.” 또 병원 근처에 있던 원풍모방 노조가 82년 국가폭력에 짓밟히는 과정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서 권익을 지키는 일”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86년 빈민운동을 위해 천주교도시빈민회에 가입한 그는 이듬해 인천의 만석동을 찾는다. 인천은 그가 태어났고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다. 얘기 도중 그는 옆의 30대 여성 활동가를 가리켰다. “그때 초등 3학년이던 저 친구가 제게 공부방을 열어달라고 했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네요.”

김씨는 2001년 강화 양도면으로 이사해 4년 뒤 이곳에도 공부방을 열었다. 일주일에 두번 만석동에 온다. 현재 만석동에 35명, 강화에 8명 정도의 아이들이 공부방을 다닌다. 공부방 회원이 되기 위해선 맞벌이나 한부모 가정이어야 하며, 학원에 다니지 않아야 한다. 괭이부리마을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오는 아이들도 10여명 정도 된다. 정규 교과목은 물론 미술이나 목공, 글쓰기, 평화 공부, 함께하는 놀이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공부방 활동의 하이라이트는 2007년부터 시작한 인형극 공연이다. 춘천인형극제 아마추어 부문에서 올해를 포함해 두번이나 대상을 받았다. 작품 구상에서 공연 준비까지 꼬박 6개월이 걸린다.

“우리들 말로 ‘기적’이라고 하죠. 상처 있는 아이들이 공연을 통해 기적을 만듭니다. 5학년 때 공연에 참여했던 아스퍼거 증후군(언어와 사회적응 발달이 지연되는 증상) 아이가 감정을 읽는 법을 배워가더군요.” 공연은 아이들이 “사람을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공연 끝나고 모두 글을 씁니다. 춤추는 누나가 무대에서 떨어 안아줬다, 대학생 형 누나들이 무대 뒤에서 고생이 많다, 고 씁니다. 그동안 받기만 하다가 주는 것도 생각하지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게 성장이지요.”

공부방 이모·삼촌은 만석동 30명, 강화 8명이다. 38명 가운데 22명이 커플이다. 공부방의 기본운영은 후원비로 충당한다. 이모·삼촌들은 따로 공제회를 만들어 공동체를 재정적으로 지탱한다. 커플이 모두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녁에만 활동하면 전체 수입의 최소 15%를 공제회에 내놓는다. 이 돈으로 수입이 없는 전업 활동가를 지원한다. “이곳이 좋고 가난하게 살고 싶어 선택하는 것이죠. 2000년 이후엔 외부 자원 봉사자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공부방을 다닌 친구들이거나 그들의 친구들이죠. 활동가 가운데 10명 정도가 여기 졸업생입니다.”

김씨 역시 88년 공부방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지금도 공부방 삼촌이다. 가난하게 살겠다는 부모의 의지가 두 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했다. “아이들이 중학교를 가면 친구들의 소비행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고민합니다. 하지만 고교에 가서는 반의 뒤처지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편도 가르지 않고 해서, 인기 있는 친구가 되지요.” 그는 큰딸이 취준생이던 시절, 엄마가 세속의 가치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대학 진학을 지원해주지 못한 걸 잠시 속상해하기도 했다고 했다. 큰딸은 올해부터 영화홍보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양극화가 극심해지기는 시기다. 빈자들의 삶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예전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죠. 서울 신림동 같은 곳을 보면 일터와 집이 연결되었어요. 근면·성실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숨고 개별화됩니다. 비정규직들이 노동 현장에서도 흩어져 있어요. 이 마을도 청년들은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어요. 더 무기력해진 것 같아요. 이제는 정신력 투철한 사람만 살아남아요.”

후원은 어떨까? “많을 때는 개인·단체 100곳에서 후원했는데, 20% 이상 줄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 한해 1천만원이 넘던 국고 지원금도 끊겼지요. 인형극은 올해 인천문화재단 지원을 받아 참가했는데, 내년은 어려울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활동가들의 저녁상 자리에 끼었다. 따뜻한 밥에 묵과 계란 고명을 섞고 국물을 붓는다. 반찬은 총각김치 하나다. 얼추 5분이 지났을까. 자리를 털고 바삐 일어난다. 중등부 아이들이 올 시간이다.

글·사진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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