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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유신·5공정권 손아귀안 오육의 ‘서울 형사지법’

등록 2005-10-21 19:57수정 2005-10-21 20:04

서울형사지법이 서초동 새 청사로 옮긴 뒤 처음으로 법정 안 사진촬영을 허용했던 1989년 8월17일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 4차공판에서 법정 안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문 목사(오른쪽)와 유원호씨. <한겨레> 자료사진
[사법부 미래] 과거정리에 달렸다 ③ 1972년∼87년 법원에서 무슨 일이?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사법부의 부끄러운 얼굴이다.”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많은 법조인들이 입을 모아 서울형사지법이 걸어온 ‘오욕의 역사’를 말한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서울지방법원을 형사지법과 민사지법으로 나누었다. 그 이유로 “사건의 신속한 처리와 법원 관할의 조정, 법원행정사무에 대한 감독체계의 효율적인 쇄신”을 들었다. 하지만 사실은 5·16 쿠데타 당시 군부세력의 구속영장 발부 요구를 거부한 김제형 서울지방법원장의 행정권을 박탈하려는 조처였다.

군사독재정권은 이와 함께 중앙정보부와 검찰을 통해 법원 길들이기에 나섰다. 중정 요원들이 ‘조정관’이라는 이름으로 법원에 상주하며 법원 판결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71년부터 2년 동안 형사지법에 근무했던 최영도 변호사는 “중정 요원이 재판장에게 와서 ‘판결 주문을 미리 알려달라’고 했다”며 “재판장이 웃으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니, ‘어차피 판사실을 도청해서 합의 내용을 알 수 있으니 순순히 알려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협박했다”고 말했다. 당시 판사실이 도청되고 있다는 것은 판사들 사이엔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박정희 정권, 1963년 형사-민사지법 분할 ‘쥐락펴락’
중정 조정관 상주시키며 온갖 회유·압박
잇단 ‘용감한’ 판결·사법파동에 정권의 보복
터져나온 개혁 봇물에 1995년 역사 뒤안길로

다른 판사도 “시국사건 기록을 보고 있을 때면 조정관이 판사실에 머물며 ‘그런 나쁜 놈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 ‘잘못하면 신상에 좋지 않을 거다’라며 협박을 했고, 무죄선고가 나면 주임검사는 법원 입회서기를 ‘무죄가 나도록 공판조서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잡아가 조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회유나 압력에도 71년 서울형사지법에서는 ‘용감한’ 판결들이 잇따랐다. 그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일어난 ‘김대중 후보 집 폭발물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김 후보의 15살짜리 조카에게 조준희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양헌 판사는 신민당사에 들어가 국회의원 선거 거부를 요구한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목요상 판사도 월간 <다리>지에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피고인 3명에게 역시 무죄를 선고했다.


형사지법 탄생의 ‘취지’에 반하는 이러한 판결들이 잇따르자, 군사정권은 검찰을 동원해 반격을 가했다. 같은 해 7월16일 서울지검은 반공법 위반 항소사건을 심리하면서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로 출장갔다가 변호사로부터 항공료, 숙박비 등을 제공받은 이범열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출장비로는 숙박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 관행대로 체재비를 받은 현직 부장판사를 구속하려고 검찰이 나선 것이다.

판사들은 이를 정권 차원의 보복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은 구속영장이 청구된 당일 집단사표를 내며 검찰의 사법권 침해 사례를 공개했고, 전국 각지의 150여명의 판사들도 사직서 제출에 동참했다. 이 사건이 이른바 1차 사법파동이다.

판사들의 집단 반발에 놀란 정권은 일단 사건을 백지화했다. 하지만 72년 10월유신을 계기로 사법부는 정권에 철저히 예속됐다. 유신헌법은 애초 대법원장이 가지고 있던 법관임면권을 대통령으로 넘겼다. 이어 73년 군사정권은 56명의 판사들을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들 가운데는 1차 사법파동을 주도했던 서울형사지법의 소장판사와, 군인과 군무원의 국가 상대 배상청구권을 제한한 국가배상법을 위헌이라고 판단한 9명의 대법원 판사(현재의 대법관)도 포함됐다.

당시 사법파동을 주도해 법원에서 쫓겨난 최영도 변호사는 “내가 근무하는 동안 검찰이나 중정의 압력은 있었지만 그 압력에 굴복해 판결이 왜곡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당시 형사지법 판사들은, ‘사표 내고 나가면 돈을 벌 수 있으니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하자’는 의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변호사법 개정을 통해 ‘경력 15년 미만의 판사가 개업할 경우, 퇴직 직전 2년 동안 근무한 법원의 본원 관할구역에서는 퇴직 뒤 3년 동안 사건을 맡지 못한다’고 못박았다. ‘전관예우’를 방지한다는 명분보다는, 판사들이 직을 걸고 소신있는 재판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없애버리려는 의도가 짙었다.

소신 있는 판사들을 한꺼번에 쫓아낸 정권은 이젠 서울형사지법원장과 수석부장판사를 통해 마음대로 시국 사건의 판결을 조정할 수 있었다. 소명이 부족한 시국사범의 영장은 수석부장판사에 의해 비밀리에 발부됐다.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은 중앙정보부나 검찰에서 보기에 유신관이 투철하거나 박정희씨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 적어도 검찰이나 중정에 협조를 잘해줄 것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었다”며 “어떤 형사수석부장은 법조인들로부터 ‘중앙정보부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적었다.

시국사건의 양형이 정해지고 영장 기각에 압력이 가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문당했다”는 ‘조작간첩 사건’ 피고인들의 호소에 귀를 막으며 중형이 선고됐다. 실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보관하고 있는 70~80년대 ‘조작 간첩사건’의 1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전체 82건 가운데 서울형사지법 사건이 절대다수인 62건을 차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안기부(중정), 치안본부, 보안사(기무사)에서 수사한 사건의 관할이 서울형사지법이었기 때문이다.

서울형사지법 폐지 논의가 정식으로 제기된 건 93년이었다. 김종훈 당시 서울서부지원 판사는 ‘개혁시대의 사법부의 과제’라는 글에서 “안기부, 검찰, 심지어는 기무사 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게 재판권을 행사했는가? 서울형사지방법원이 생긴 배경, 그 관할이 거듭 바뀌면서도 여전히 안기부, 대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의 대응기관으로의 모습이 남아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형사지법의 폐해를 지적했다. 뒤이어 서울민사지법 소장판사들의 사법부 개혁 요구가 터져나왔다. 이어 이를 수용하기 위해 출범한 사법발전위원회에서 힘겨운 논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오욕으로 얼룩진 서울형사지법은 94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긴급조치-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의 고백

‘법 아닌 법’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처벌해야 했던
난, 비겁한 기회주의자였다

“긴급조치 9호는 반민주적이고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악법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을 적용하여 형벌을 선고한다는 것은 양심있는 판사로서 차마 못할 일이었다.”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법 아닌 법’을 적용해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에 규정된 것이다.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은 국가안보나 공공의 안녕이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을 경우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는 개헌을 논의하는 것조차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하는, 입헌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긴급조치 코미디 시리즈’로 이어졌다.

긴급조치 1호는 1974년 1월8일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폐하자는 주장이나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이를 권유, 선전하거나 보도, 출판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지하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구속할 수 있고 15년 이하의 중형을 선고할 수 있게 했다. 국민의 신체와 언론의 자유를 송두리째 부정한 것이다.

75년 5월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학교장의 사전허가 없는 모든 집회나 시위 △집회·시위 또는 언론을 통해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또는 개폐를 주장하거나 이를 보도하는 행위, △그리고 긴급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까지 금지시켜 억압의 수준을 한껏 높였다. 유신헌법은 또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못박아 혹시 있을지 모를 사법적 논란마저 봉쇄했다.

변 전 재판관은 공개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잡혀온 이해학 목사 사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분위기에서 구속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자기 양심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종교인 또는 지식인으로서 순교자적인 사명의식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며 “그에 비해 내심 그런 분들을 존경하면서도 독재자의 앞잡이가 되어 형벌을 선고해야하는 나 자신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기회주의자요 비겁자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75년 야당의 반대에도 날치기 통과됐다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등에게 적용된 뒤 88년 폐지된 국가모독죄는 긴급조치와 쌍벽을 이루는 ‘비판금지법’이었다. 긴급조치가 국내의 비판을 막으려는 것이었다면, 외국에서 대한민국의 헌법기관을 모욕·비방할 때 7년 이하의 징역을 규정한 국가모독죄는 대외적 비판을 막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이런 ‘법 아닌 법’이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던 시기에 판사로 근무했던 한 변호사는 “유신이 단행돼 아예 법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재판을 안 할 수도 없었고 판사들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며 “그때 뭘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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