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혁씨가 2014년 9월23일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북한인권대회에서 존 케리 미국 국무부 장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토요판] 뉴스분석 왜?
‘북한 인권운동가’ 신동혁 이웃주민 인터뷰
‘북한 인권운동가’ 신동혁 이웃주민 인터뷰
▶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한 세계적인 북한인권운동가 신동혁씨의 거짓 증언 논란은 지난해 신씨가 ‘일부 오류’를 인정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국제사회는 그의 증언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던 신씨는 얼마 전부터 다시 공개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신씨와 한마을에 살았다는 북한이탈주민이 최근 신씨의 주장은 일부 오류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신동혁 논란 2라운드’가 시작되는 걸까요.
상상해본다. 법과 제도도 없는 어떤 야만적인 독재국가를. 독재자는 제한된 정보만 국민에게 제공하고 이를 이용해 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거대한 수용소에 가둔다. 수용소 안 사람들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간수의 눈에 잘못 보이면 불고문을 당한다. 쇳물을 부어 죽이기도 한다. 산 사람을 상대로 생체실험도 자행한다. 하루 12시간의 노동을 견뎌야 하고 실수하면 손가락이 잘리는 형벌에 처해진다. 노동을 해도 배급은 매우 적고 배고픔을 못 이긴 사람들은 제 자식을 잡아먹기도 한다. 간수들은 언제든 여성 재소자들을 성폭행할 수 있다. 수용소에는 전기담장이 있어 탈출이 불가능하거니와 시도만 해도 공개처형이다.
사실은 상상의 나라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곳’을 탈출한 사람들이 남한과 국제사회에 전한 실제 이야기다. 북한이라는 이름의 나라,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제사회는 북한이탈주민이 쏟아내는 증언에 경악했다. 유엔이 조사에 나서려 하지만, 북한은 응하지 않고 있다.
‘일부 오류’인가 ‘모두 거짓’인가
북한이탈주민 신동혁(34·아버지 주장 36)씨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악명 높은 북한의 14호 정치범 수용소(평안남도 개천시 외동리) 탈출자다. 최초의 일이었다. 북한에는 5~6곳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는데 이 중 인권 침해가 가장 심한 곳이 14호 수용소로 알려져 있다. 신씨는 탈북해 2006년 8월 남한에 들어온 뒤 증언집 <세상 밖으로 나오다>(2007)를 냈다. 이어 <워싱턴 포스트> 출신 미국 언론인 블레인 하든을 만나 2012년 <14호 수용소 탈출>을 냈다. 책은 24개국에 번역돼 출간됐다. 그의 증언은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북한 인권 보고서를 발간하고 국제사회가 가장 강도 높은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줬다.
북한은 신씨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고 있다. 북한은 2014년 10월 신씨의 아버지 신경섭(70)씨를 티브이 인터뷰 형식으로 내세워 신씨가 정치범 수용소 출신이 아니라고 밝혔다. 신경섭씨는 인터뷰에서 “신인근(신동혁의 본명)이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평안남도 북창군 봉창리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설명했다. 봉창리는 14호 정치범 수용소가 아닌 18호 수용소(일반 사회범 수용자 위주)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신씨의 아버지는 “내가 심장병을 앓았기에 (인근이가) 내가 살아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을 거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진술이 나오자 신씨는 지난해 3월 기존의 입장을 바꿨다. 1980년대 중반 14호 수용소의 일부 지역이 인근 18호로 편입되면서 소속이 바뀌었지만, 2001년 탈출에 실패한 뒤 14호에 2005년 2월 탈북 직전까지 재수감됐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14호 수용소를 나오긴 했으나, 인생의 대부분을 14호가 아닌 18호에서 보냈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신씨는 최초 주장을 번복한 이유에 대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감추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논란은 더 확대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국제사회는 신동혁씨가 경험한 수용소 내 인권 유린 실태에 관한 증언의 무게만큼은 거듭 인정했다. 신씨의 증언에 일부 오류가 있었던 것 정도로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신씨는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다가 지난달부터 다시 해외 증언 활동을 시작한 상태다.
하지만 최근 북한이탈주민 사회에서 신씨가 정치범 수용소 출신이 아니라는 추가 증언이 나오면서 다시 논란이 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씨와 18호 수용소의 한마을에서 살았던 북한이탈주민 ㄱ(54)씨는 최근 <한겨레>와 만나 신씨의 어린 시절과 가족사에 대해 자세하게 밝혔다. 신동혁씨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북한이탈주민이 언론에 신씨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ㄱ씨는 북한이 주장하는 신씨 관련 내용은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ㄱ씨는 신동혁씨의 집과 30여분 떨어진 거리에 살았고, 특히 그의 삼촌과는 같은 인민반(우리의 통반 개념. 인민반 동료는 이웃이자 감시하는 사이)에 있어 신씨 집안을 잘 안다고 설명했다. ㄱ씨는 1975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18호 수용소에 살았다.
신동혁씨는 자신의 책에서 수용소(책에는 14호·18호의 경험이 구분되어 있지 않음. 신씨의 책은 모두 14호에서 겪은 일로 설명)에서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12시간 이상의 강제노동을 하고 어린아이들도 탄광 노동에 동원된다. 일을 하다 다쳐서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책에 따르면, 신동혁씨는 2004년 재봉기 받침대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보위부 지도원의 지시로 손가락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곳에선 결혼도 아무나 할 수 없고 보위부의 지시로 ‘표창 결혼’을 할 수 있다. 짝은 보위부가 정해준다. 신씨는 불고문도 당했다. 어머니와 형이 수용소를 탈출하려다 걸렸는데 이 때문에 자신까지 수사받는 과정에서 고문당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형은 1996년 공개처형당했다. 그는 2005년 1월 전기담장을 넘어 14호 수용소를 탈출했다고 한다. 전기담장을 넘는 과정에서 몸에 큰 상처가 났다.
강제노동, 손가락 절단, 표창 결혼…
14호 정치범 수용소 폭로한 신동혁
일부 증언 오류 인정한 뒤에도
탈북자 사회서 거짓 논란 이어져
과장된 ‘증언 비즈니스’ 벌였나 한마을 살던 ㄱ씨 최초 증언
“18호 수용소(일반범죄) 출신이고
탈출한 게 아니라 신분해제된 것
백설희도 18호에 있었다”
신, “말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것” 동창생들도 탈북해 신동혁 반박 ㄱ씨는 신씨가 머물렀던 18호 수용소가 정치범 수용소는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그러나 2013년 통일연구원이 펴낸 ‘북한 정치범 수용소 보고서’를 보면, 정치범들도 뒤섞여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할도 국가안전보위부가 아닌 인민보안부(일종의 경찰조직)라고 한다. 14호는 급이 높은 정치범들이 수용되는 곳인 반면, 18호는 일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과 그 가족이 연좌제 형태로 수용된다고 한다. 북한은 신씨 집안이 국가재산취략행위죄를 저질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정치범죄인지는 불분명하다. 18호 역시 인권 유린이 자행되지만 14호에 비해서는 덜한 편이라고 한다. 일상적인 고문이 있거나 하지는 않다고 ㄱ씨는 설명했다. 할당된 노동량을 채우지 못하면 단체로 체벌을 받는 경우는 있으나, 신씨처럼 신체를 절단당하는 형벌이나 불고문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ㄱ씨 설명이다. 지도원이 수용자를 족쇄에 묶어 발로 차는 등의 폭행은 한다고 한다. 결혼을 할 때 보위부에 신고하는 건 맞지만 표창 결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ㄱ씨는 말했다. ㄱ씨는 신씨의 어머니와 형이 교수형을 당한 이유가 수용소 탈출 시도 때문이 아니라 살인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씨의 어머니와 형이 한 주민의 돈을 빼앗는 과정에서 살인을 했고 당시 마을에서 꽤 유명했던 사건이라고 한다. ㄱ씨의 설명은 북쪽의 주장과 일치한다. 신씨의 몸에 난 여러 상처는 전기담장을 넘다 다친 게 아니라 어렸을 때 뜨거운 물에 덴 상처라고 ㄱ씨는 설명했다. 앞서 신동혁씨는 “1980년대 중반 14호 수용소 일부 지역이 인근 18호로 편입되면서 소속이 14호에서 18호로 바뀌었고 그래서 일부 북한이탈주민들이 나를 18호에서 보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ㄱ씨는 1980년대에 수용자의 신분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인접한 18호의 터로 14구역이 확장되어 구역 규모가 커진 적은 있지만 14호 수용자 신분이 18호 수용자로 바뀌는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수용소의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ㄱ씨는 신동혁씨의 집안이 18호 수용소에 살았던 것은 맞지만 1990년대 말에 신분이 해제되었다고 말했다. 신씨도 수용소를 탈출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신분이 해제돼 나간 것이라고 ㄱ씨는 설명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18호 수용소는 한번 수용되면 영원히 격리되는 완전통제구역은 아니다. 당에 충성심을 보이는 등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추면 수용자 신분이 해제된다.
신동혁씨는 14호의 위치와 생활 방식 등을 매우 자세하게 책에 진술했는데, ㄱ씨는 18호와 14호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어 그러한 진술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18호의 높은 지대에 올라 살펴보면 14호를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한다. 통일연구원이 펴낸 보고서에 나온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으로는, 18호 수용자가 14호로 들어가 작업을 돕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이때 18호 수용자도 14호를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신동혁씨의 책 <세상 밖으로 나오다>에는 ‘백설희 이야기’가 나온다. 백설희는 북에서 고위직을 거친 유명 여성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때 국가장의위원을 했던 이 여성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 신세가 되었다고 신씨는 설명했다. 신씨는 2003년 10월 목장 2작업반에서 백설희와 함께 일했다고 기술했다. 2001년 1차 18호 수용소 탈출에 실패한 뒤 (자신이 태어났던) 14호 정치범 수용소에 재수감되었으며, 그곳에서 2003년 백설희와 함께 노동을 했다는 얘기다. 이는 신동혁씨가 14호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음을 방증하는 근거로 읽힌다. 그러나 ㄱ씨는 백설희는 18호 수용소에서 자신과 함께 일했던 자라고 주장했다. ㄱ씨는 특히 백설희 어머니와 친해 양말도 꿰매어주고 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ㄱ씨는 2009년 남한에 왔다. 그간 신씨의 주장을 오랫동안 지켜봐왔지만 공개적으로 나서서 신동혁씨 이야기를 반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8호가 됐든 14호가 됐든 북한이 수용소를 운영하며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신씨의 증언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여겼다고 한다. 지난해 ‘신동혁 거짓 증언 논란’이 크게 일자 블레인 하든이 ㄱ씨를 찾아와 자문을 구했을 때 ㄱ씨는 “신동혁의 책을 폐간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고 전했다.
정치범 수용소 탈출 주장도 의혹을 산다. 함경남도 요덕군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를 나온 ㄴ씨는 지난달 29일 <한겨레>와 만나 “14호 수용소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수용소 주변으로 전기담장이 3~4m 높이로 쳐져 있는 것 외에 일대에 큰 구덩이들이 있어 탈출이 불가하고, 또 3인1조 형태로 감시하고 있어 탈출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ㄴ씨는 “북에서도 고문 수사가 있긴 하지만 남한의 수사기관이 80년대에 했던 수준 정도”라고 밝혔다. 신동혁씨의 동창생 2명이 탈북해 최근 남한에 정착했는데, 이들 역시 “신동혁은 정치범 수용소 출신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장된 ‘증언 비즈니스’
신동혁씨의 주장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에 대해 남한과 국제사회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신씨가 설사 정치범 수용소 출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수용소(18호) 출신인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의 인권 유린 역시 북한은 책임을 져야 한다.
국책연구기관 통일연구원이 펴낸 북한 정치범 수용소 보고서를 보면, 북한은 소련의 정치범 수용소 굴라크(Gulag)를 모방해 1940년대 말부터 수용소를 운영해왔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수용소가 아닌 로동(노동)교화소로 부른다. 정치범 수용소는 대체로 거대한 마을 형태를 띤다. 전국에 걸쳐 15만~20만명이 수감되어 있고 수용자의 자식들까지 연좌제 형태로 사회와 격리된다.
정광일 북한 정치범수용소 피해자가족협회 대표는 30일 인터뷰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있는 그대로만 증언해도 북한은 국제사회의 지탄을 피할 수 없다. 북한이탈주민의 과장된 증언은 당장 눈길을 끌 수는 있지만 되레 (북한에 역공 빌미를 주고) 북한 인권운동에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종합편성채널 등에 출연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의 과장된 주장이 ‘증언 비즈니스’로 연결되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독일 통일 전 동독을 탈출한 주민들의 인권 유린 실상 증언들이 상당수 과장되었던 게 통일 뒤 확인되곤 했다. 같은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최대한 북한이탈주민의 말을 검증하고 국제사회도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동혁씨는 31일 <한겨레>에 편지를 보내 “추가 해명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맞고 틀리고는 앞으로 나의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지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신동혁씨가 국제사회를 농락한 것일까, 북한이 국제사회를 농락하고 있는 것일까. 극도로 폐쇄된 북한 사회를 놓고 답 없는 진실게임이 이어지고 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2014년 신동혁씨의 아버지(신경섭)가 북한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우리민족끼리>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14호 정치범 수용소 폭로한 신동혁
일부 증언 오류 인정한 뒤에도
탈북자 사회서 거짓 논란 이어져
과장된 ‘증언 비즈니스’ 벌였나 한마을 살던 ㄱ씨 최초 증언
“18호 수용소(일반범죄) 출신이고
탈출한 게 아니라 신분해제된 것
백설희도 18호에 있었다”
신, “말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것” 동창생들도 탈북해 신동혁 반박 ㄱ씨는 신씨가 머물렀던 18호 수용소가 정치범 수용소는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그러나 2013년 통일연구원이 펴낸 ‘북한 정치범 수용소 보고서’를 보면, 정치범들도 뒤섞여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할도 국가안전보위부가 아닌 인민보안부(일종의 경찰조직)라고 한다. 14호는 급이 높은 정치범들이 수용되는 곳인 반면, 18호는 일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과 그 가족이 연좌제 형태로 수용된다고 한다. 북한은 신씨 집안이 국가재산취략행위죄를 저질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정치범죄인지는 불분명하다. 18호 역시 인권 유린이 자행되지만 14호에 비해서는 덜한 편이라고 한다. 일상적인 고문이 있거나 하지는 않다고 ㄱ씨는 설명했다. 할당된 노동량을 채우지 못하면 단체로 체벌을 받는 경우는 있으나, 신씨처럼 신체를 절단당하는 형벌이나 불고문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ㄱ씨 설명이다. 지도원이 수용자를 족쇄에 묶어 발로 차는 등의 폭행은 한다고 한다. 결혼을 할 때 보위부에 신고하는 건 맞지만 표창 결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ㄱ씨는 말했다. ㄱ씨는 신씨의 어머니와 형이 교수형을 당한 이유가 수용소 탈출 시도 때문이 아니라 살인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씨의 어머니와 형이 한 주민의 돈을 빼앗는 과정에서 살인을 했고 당시 마을에서 꽤 유명했던 사건이라고 한다. ㄱ씨의 설명은 북쪽의 주장과 일치한다. 신씨의 몸에 난 여러 상처는 전기담장을 넘다 다친 게 아니라 어렸을 때 뜨거운 물에 덴 상처라고 ㄱ씨는 설명했다. 앞서 신동혁씨는 “1980년대 중반 14호 수용소 일부 지역이 인근 18호로 편입되면서 소속이 14호에서 18호로 바뀌었고 그래서 일부 북한이탈주민들이 나를 18호에서 보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ㄱ씨는 1980년대에 수용자의 신분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인접한 18호의 터로 14구역이 확장되어 구역 규모가 커진 적은 있지만 14호 수용자 신분이 18호 수용자로 바뀌는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수용소의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ㄱ씨는 신동혁씨의 집안이 18호 수용소에 살았던 것은 맞지만 1990년대 말에 신분이 해제되었다고 말했다. 신씨도 수용소를 탈출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신분이 해제돼 나간 것이라고 ㄱ씨는 설명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18호 수용소는 한번 수용되면 영원히 격리되는 완전통제구역은 아니다. 당에 충성심을 보이는 등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추면 수용자 신분이 해제된다.
북한의 14·18호 수용소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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