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수.
[현장] 이학수 삼성부회장 엑스파일 공판 출석해 증언
“박인회씨 앞에서는 도청테이프 녹취록을 짐짓 건성으로 넘기며 태연한 척 ‘삼성이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 정치자금을 준 내용은 ‘세풍사건’때 이미 조사받았다. 이런 자료는 주간지나 주말신문같은 찌라시에 밖에 더 나겠냐’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긴장했다.”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단독 장성원 판사 심리로 열린 ‘안기부 도청테이프 사건’ 재판에서 재미교포 박인회씨로부터 금품을 요구받은 것과 관련해 증인으로 출석한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의 주장이다. 이 부회장은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판사의 호명에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50여개의 의자를 꽉 채운 삼성 관계자와 취재진 등 방청객의 체온으로 317호 법정은 후끈했다. 1시간30분 넘게 이어진 이날 공판 내내 이씨는 차분했다. 주어와 서술어에 강세가 들어간 그의 경상도 말투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씨는 또 “도청테이프 녹취록과 관련된 내용을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씨는 “이 부회장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없다”며 “김 변호사를 만난 것도 이 부회장을 첫번째 만난 날”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 박씨의 변호인은 “김용철 변호사의 검찰에서의 진술조서에는 ‘박씨가 돈 얘기를 한 적은 없고 다만 500억원 공사를 수주하게 해달라고만 했다’고 돼있다”고 이 부회장에게 물었다. 이에 이 부회장은 “5억 얘기는 박인회에게 내가 확실히 들은 것이고, 박인회가 공사 수주를 원하는 것은 김용철 변호사에게 보고 받았다”고 말했다.“박인회라는 한 개인이 삼성을 겁먹게 한다는 게 가능한가, 그냥 ‘한마리 뱀’이 나온 정도 아닌가”라는 박인회씨 변호인의 질문도 웃음으로 받아넘긴 이씨가 약간이나마 흔들린 건 도청테이프 내용과 관련된 질문이 나왔을 때였다.
“도청내용 조작되었느냐” 판사 질문에 “내용 언급은 적절치 않다” 동문서답도
박인회씨의 변호인이 “<월간조선>등 언론에 보도된 도청테이프 내용이 조작된 것인가”라고 묻자 이씨는 “도청자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도청자료는 법정신에 따라 처리하는게 옳다”고 답했다. 변호사는 “도청 내용의 진위를 확인해달라는게 아니다. 도청내용이 처음 보도됐을 때 이학수씨와 홍석현씨 모두 내용을 부인했는데, 홍석현씨는 지금 대사직을 사퇴하지 않았냐”고 반복해서 물었다. 그래도 이 부회장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도청내용을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똑같이 답했다. 재판부까지 거들어 “내용을 묻는 것이 아니라, 도청테이프에 관해 처음 보도됐을 당시 내용을 부인한 적이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임을 설명했다. 그제서야 이씨는 “당시 <문화방송> 보도에 관해 공식 멘트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학수 부회장 “미국 갔을 때 이건희 회장 만났다” 인정
6시께 재판이 끝나자 이씨는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떠났다. 한편, 공판이 열리기 전 이 부회장은 기자들에게 “미국에 갔을 때 이건희 회장을 만났다”고 인정하면서도 그의 귀국 시기나 병세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 동관 14층에 법원장실이 있다. 그 법원장실 한쪽에 ‘동성상응(同聲相應)’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같은 소리끼리 서로 어울린다’는 뜻의 <주역>에 나오는 구절이다. 편액의 표현을 빌리자면, ‘엑스파일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정치·언론과 대기업 삼성이 끼리끼리 어울려 ‘같은 소리’를 내지 않았나 하는의혹을 던지고 있다. 또 그 커넥션이 내는 소리는 ‘협화음이 아니라 법과 원칙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결심공판은 다음달 8일 열린다. 그러나 결심 뒤 선고가 내려져도 재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박인회씨 등의 공갈미수죄 등 혐의 뿐이다.
<한겨레> 사회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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