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전산원 경력을 딛고서 세계적 수준의 우수 논문을 발표한 노시춘 남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교수가 26일 오전 천안에 있는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 서울역 이동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노시춘 남서울대 컴퓨터학과 교수 ‘인생역전기’
“제 삶이 특별히 성공한 삶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미래에는 현실이 되리라고 믿는 희망을 갖는 것, 모든 평범한 샐러리맨들이 사는 방식 아닌가요?”
노시춘(56·남서울대 컴퓨터학과) 교수는 자신이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체신부 전산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35년, 분명 그는 ‘평범한’ 월급쟁이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정보보안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학술논문으로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대학교수로 초빙됐다.
가난한 탓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돈을 벌어야 했던 20대. 그는 그 시절을 ‘꿈을 꾸고 꿈을 버릴 수 없었지만 꿈을 실행할 수 없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래서 81년 방송통신대학이 처음 생겼을 때 접수 첫날 원서를 들고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갔다. 고교 성적이 안 좋아 원하던 학과가 아닌 농학과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학 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말단 공무원이 공부할 시간을 따로 내기란 쉽지 않았다. 틈틈이 상사 눈을 피해 책을 보다가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대학을 졸업하는 데만 7년이 걸렸다. “7년을 그렇게 하니 차츰 요령이 붙더라고요. 점심을 5분 만에 후다닥 먹고 책을 보거나 출장을 오가는 동안 차 안에서 책을 보는 그런 요령이요.”
석사는 꼭 전문 분야로 따고 싶었다. 전산 직종과 연관해 고려대학교에서 경영정보학을 전공했다. “동기 12명 가운데 11명이 고대 출신이더라고요. 힘들었어요. 나이 어린 동기들과 교수들의 텃세를 감당하기가.”
그는 지금도 한국 사회의 학맥과 인맥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부적응자’라며 웃었다.
99년 그는 한국통신(케이티)이 보안시스템을 구축할 당시 초기 멤버로 일하게 됐다. 이때 처음으로 정보보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강국인지는 몰라도 정보보호 분야에서는 최약소국이더군요.” 박사 과정을 밟으며 그는 회사 실무에 이론을 접목해 바이러스 백신과 네트워크 인프라 방화벽을 동시에 가동해 종합적인 방역시스템을 구축하는 원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전철을 연구실 삼아 출퇴근하는 왕복 3시간을 이용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논문을 썼습니다. 공부에 빠져 내릴 역을 지나쳐 한 바퀴 빙 돌았는데도 몰랐던 적도 있어요.”
‘주경야독’의 성과는 훌륭했다. 그가 쓴 논문이 2003년과 2004년 연이어 국제과학논문색인(SCI)급 논문에 채택된 것이다. 국제과학논문색인급 논문은 과학기술 분야 국제 논문 중 최우수 논문 등급으로, 해마다 발표되는 전체 국제 논문 중 15%만이 통과된다. 이런 성과로 그는 3월 박사학위를 딴 뒤 남서울대로부터 초빙교수직 제안을 받았다. “교수 임용 때 학장이 묻더군요. ‘흔히 말하는 정식 코스를 밟지 않았고 나이도 많은데 잘 할 수 있겠느냐’고요. 제 일생을 압축한 듯한 질문이었어요. ‘지금까지 실력으로만 승부해 왔다’고 대답했죠.” 대학에 자리잡은 뒤 그는 행복하다. 무엇보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연구실이 있어서 좋고, 나이나 학벌을 묻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평범한 샐러리맨인데 노벨화학상을 받은 일본의 다나카 고이치라는 사람이 있지요? 제 모델은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인생개척자 명단에 이름 한 줄 올릴 정도는 되지 않나요?” 그는 아직도 자신은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소박한 진리를 믿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며 웃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주경야독’의 성과는 훌륭했다. 그가 쓴 논문이 2003년과 2004년 연이어 국제과학논문색인(SCI)급 논문에 채택된 것이다. 국제과학논문색인급 논문은 과학기술 분야 국제 논문 중 최우수 논문 등급으로, 해마다 발표되는 전체 국제 논문 중 15%만이 통과된다. 이런 성과로 그는 3월 박사학위를 딴 뒤 남서울대로부터 초빙교수직 제안을 받았다. “교수 임용 때 학장이 묻더군요. ‘흔히 말하는 정식 코스를 밟지 않았고 나이도 많은데 잘 할 수 있겠느냐’고요. 제 일생을 압축한 듯한 질문이었어요. ‘지금까지 실력으로만 승부해 왔다’고 대답했죠.” 대학에 자리잡은 뒤 그는 행복하다. 무엇보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연구실이 있어서 좋고, 나이나 학벌을 묻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평범한 샐러리맨인데 노벨화학상을 받은 일본의 다나카 고이치라는 사람이 있지요? 제 모델은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인생개척자 명단에 이름 한 줄 올릴 정도는 되지 않나요?” 그는 아직도 자신은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소박한 진리를 믿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며 웃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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