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이한열과 <엘(L)의 운동화>
이한열 운동화’ 복원을 다룬 소설 <엘(L)의 운동화>
우리 시대의 바스러진 것들과 복원해야 할 것들
이한열 운동화’ 복원을 다룬 소설 <엘(L)의 운동화>
우리 시대의 바스러진 것들과 복원해야 할 것들
1987년 그 여름은 맵고 숨 막혔다. 경찰의 최루탄이 연세대 대학생 이한열을 직격했다. 그가 열사가 된 6월9일(사망은 7월5일), 그의 운동화는 짝을 잃고 혼자가 됐다. 2016년 이 여름도 맵고 숨 막힌다. 도시의 미세먼지가 허파를 파고들고 심장을 육박한다. 이한열이 열사가 되고 29년이 가득 차는 동안, 그의 외톨이 운동화는 살점을 잃고 부서져 수술대에 올랐다. 최루가스와 미세먼지의 숨막힘은 성분이 다르나, 29년 전과 29년 뒤의 숨막힘은 같은 눈물을 짜내고 같은 구토를 부른다. 1년 전 28주기에 맞춰 복원 전문가 김겸은 시간이 갉아먹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했다. 1년 뒤 29주기에 맞춰 소설가 김숨은 이한열의 운동화 복원을 그린 <엘(L)의 운동화>를 출간(민음사)했다. 김겸의 손이 이한열의 운동화를 살려낼 때, 김숨의 연필은 ‘이한열의 운동화 복원’을 되살렸다. 소설은 실제와 겹치면서 겹치지 않는다. L은 이한열이면서 이한열이 아니다. L의 운동화는 이한열의 운동화지만 아니기도 하다. 소설 속 복원가 ‘나’는 현실의 김겸을 모델로 했지만 김겸과 다르다. 두 개의 복원을 포개고 떼 내며 이한열의 29주기를 읽는다. 이한열과 L을 포갤 때, 1987년과 2016년은 간극을 좁혀 ‘역사의 진보’를 불신하는 뿌연 거리에서 만난다. 김겸과 ‘나’를 떼어 낼 때, 복원돼야 할 이한열의 정신과 여전히 그 짐을 벗지 못하는 L의 고통이 퇴행하는 시대에 결박돼 몸부림친다.
▶ 유물번호 A007140007. 이한열기념관이 보존처리를 마친 뒤 부여한 번호입니다. 2015년 2월26일 보존처리를 위해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로 반출됐고, 세 달 뒤인 5월31일 복원 절차를 완료했으며, 같은 해 6월5일 기념관에 재입고됐습니다. 운동화 복원 과정과 그 과정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의미를 소설가 김숨이 로 재복원했습니다. 이한열이 열사가 된 지 만 29년이 되는 6월9일, 피격 장소에 설치되는 동판 제막식 때 열사의 어머니에게 전달됩니다.
그(김겸)의 복원은 응급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같았고, ‘나’의 복원은 아픈 아이 앞에서 쩔쩔매는 엄마 같았다.
이한열 따라가듯 소멸하던 운동화
이한열의 운동화라고 했다. 제작연도 1980년대. 크기 28㎝, 너비 10.5㎝, 무게 73.8g. 전체 흰색, 부분 장식, 바닥 남색. 피격 당시 착용. 입수처 유족. 입수일 2005년 6월9일. 기념관의 유물등록카드가 품은 언어는 건조하고 감정이 없었다. 주인이 건너지 못한 시간을 홀로 통과해온 운동화의 풍화를 그 문자와 숫자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운동화, 그 자체는 물질이었다. 김겸(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장)이 운동화의 물성을 분석했다. 폴리에스터우레탄, 합성피혁, 스펀지.
L의 운동화라고 했다. 아들의 이름을 딴 기념관에서 그의 어머니가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하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저 운동화가, 우리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라고 하니까, 우리 아들의 운동화인가 보다 해요…. 우리 아들의 운동화인가 보다…. 나는 솔직히 저 운동화가 우리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인지 잘 모르겠어요.”(<엘(L)의 운동화> 124쪽)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운동화. L도, 그의 운동화도, 그렇게 나이를 먹어갔다면 어땠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나이 먹지 못한 L의 운동화가 L을 따라가듯 소멸하고 있었다.
김겸은 손으로 꽉 쥐었다 놓은 젖은 모래를 떠올렸다. 모양을 지탱하던 손가락이 악력을 풀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으스러져 해체될 것 같았다. 운동화는 그(당시 복원 경력 19년차)가 한 차례도 본 적 없는 훼손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김겸은 손상 범위를 크게 다섯 가지로 파악했다. ① 중심구조물 파손에 따른 중심구조의 불안정 ② 휨, 구멍, 장식 탈락 등의 경미한 구조손상 ③ 박락(운동화 표피의 균열·탈락)·변색·긁힘·낙서 등에 따른 표면손상 ④ 부식·중합체 파손으로 일어난 화학적 퇴락 ⑤ 새 배설물과 먼지 등의 오염.
본체를 이루는 합성피혁에선 “먼지 오염과 표면 흰색 층의 열화(열·자외선·빛에 오래 노출돼 고분자가 파괴되는 현상)와 탈락”이 확인됐다. 손끝에선 “열화의 증상인 끈적임”(<보존처리보고서>)도 감지됐다. 밑창 상태가 가장 위중했다. 열화가 심각해 밑창이 가루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응급 상황’이란 판단 외에 다른 진단은 불가능했다.
나의 눈에 그의 운동화는 사망 선고가 내려진 육체 같았다. 운동화는 트럭 바퀴에 짓밟힌 것처럼 눌려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밑창이 위를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밑창으로 땅을 딛는 것이 신발의 존재 방식이었다. 뒤집어져 허공을 딛고 있는 그의 운동화는 죽어가는 육체가 아니라 이미 호흡을 빼앗긴 주검처럼 보였다.
굽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은 한때 운동화의 일부였다는 기억을 잃어버린 듯했다. 바짝 마른 카스텔라 조각 같기도 했고, 부식돼 주저앉는 스펀지 같기도 했으며, 몸에서 뜯겨나간 살점 같기도 했다. 운동화는 응축된 고체의 합으로서 몸을 이루지만, 그의 운동화는 흐르는 액체처럼 유실돼 증발할 듯싶었다. 부스러기들이 습자지에 떨어진 먹물처럼 떨어져 나가며 밑창을 갉아대고 있었다.
“28년이란 시간을 두고 발생한 부스러기들… 밑창에 금이 가고, 그 금이 세력을 확장하듯 사방으로 번지고, 번진 금들이 비명을 지르듯 벌어지면서 발생한…. 부스러기들이 금방이라도 날벌레 떼처럼 날아오를 것 같다.”(255쪽)
1년 전 김겸이 이한열 운동화 복원
1년 뒤 김숨이 ‘복원 과정’을 복원
열화로 가루처럼 바스러진 밑창
트럭 바퀴에 짓밟힌 듯한 운동화
짝 잃고 홀로 남아 만신창이 훼손 주사기가 자신을 찔러 오는데도
운동화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묶음, 구김, 접힘, 닳음 속에
22살 평범한 청년이 고스란히
운동화가 그를 삼키게 둬선 안돼
물질과 생명과 역사의 관계
2015년 2월23일 김겸은 이한열기념관장(이경란)으로부터 운동화 복원을 의뢰받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운동화는 밑창을 잃어갔다. 밑창 소재인 폴리에스터우레탄을 복원한 사례가 국내엔 없었다. 이한열의 피 묻은 옷과 유품들(피격 당시 입었던 상의·청바지·허리띠 등 24건)은 2013년 보존처리(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를 완료했다. 그때도 복원 전문가를 만나지 못한 운동화는 뒤집힌 몸으로 파손돼 갔다. 문화재 복원 쪽에서 전문가를 찾지 못한 기념관은 미술품 복원 분야로 눈을 돌렸다. 폴리에스터우레탄 복원은 김겸도 처음이었으나 그에겐 유사 고분자 복원 경험이 있었다. 동일 소재를 사용한 현대 예술작품들의 보존 과정도 지켜봐왔다.
물질도 말을 했다. 이한열의 운동화(2005년 기념관 기증)는 1986년 둘째 누나가 월급 받은 돈으로 사준 것이었다. 주인을 잃은 운동화는 누나의 집 장롱 안에서 18년을 머물렀다. 이삿짐을 쌀 때마다 누나는 동생의 운동화를 쓰다듬으며 울었다. 가늠할 수 없는 높이의 이야기들이 운동화에 쌓여갔다.
“그날 오후 5시. 시위를 마친 연세대 학생들이 도서관 앞 민주광장에서 정리집회를 가졌다. 투쟁위원장(신학과 84학번)이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에게 분실물을 찾아줬다. ‘자, 여기 운동화 한 짝(왼쪽)이 있네요. 신발이 벗겨질 정도로 열심히 투쟁했군요.’ 와~ 웃음이 번졌다. 신발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신발은) 결국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주인공은 그 시간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운동화프로젝트> 우상호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물질과 그 물질이 발화하는 이야기 사이에서 김겸은 물질과 생명과 역사의 관계를 곱씹었다.
“대학 시절 집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으세요?” 채 관장(이경란의 소설 속 인물)이 나에게 물었다. “집회가 끝나면 으레 주인을 잃고 바닥에 나뒹구는 신발이 몇 짝씩 나왔어요. 주인을 잃고 미아처럼 떠도는 신발 짝을 찾아 주는 의식은 말하자면 집회의 가장 마지막 순서였던 셈이에요. 대부분의 잃어버린 신발은 무사히 제 주인을 찾아갔고요.”(56~57쪽)
L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질 때 그의 오른발에서 운동화가 떨어졌다. 사회사업학과 84학번 여학생이 신발을 집었다. L이 맨발로 귀가할까 걱정한 그는 신발을 들고 병원으로 따라갔다. 금세 치료받고 걸어나올 줄 알았던 L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자정께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응급실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가 어머니에게 전한 운동화 한 짝이 L의 기념관 4층 전시실에 있다.
전시실 통유리창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던 때가 있었다. 햇빛에 L의 운동화가 그대로 노출됐다. 8년(2005~2013년) 동안 L의 운동화엔 태양열과 자외선이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가해졌을 것이다. 미술품 소장가들에게 상식인 말이 있다. 사람에게 최적인 장소가 미술 작품에도 최적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므로 인간의 생활환경이 그들에게도 최적의 환경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L의 운동화인 것이다. L의 운동화가 형체를 잃을 만큼 손상됐다는 뜻은 운동화가 바스러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버티며 인간 역시 마모돼왔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것은 L의 운동화가 겪어온 시간이다.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 L처럼 그의 운동화가 뒤집힌 채 견뎌온 시간이다. L을 지키지 못한 우리가 거쳐온 시간이다. 우리가 거꾸로 처박힌 채 살아온 것인지, 고꾸라진 시대가 똑바로 선 적 없는 것인지, 밑창으로 허공을 밟고 있는 L의 운동화는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뒤집힌 세상이라면, 제대로 선 것은 다만 L의 운동화뿐인 것이다.
나는 나에게 질문했다.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가. 레플리카(복제품)를 만들 것인가.”(21쪽) 무엇을 복원하고 무엇을 복원하지 않을 것인가. 복원하되 어느 상태로 복원할 것인가. 복원도 수많은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내가 복원해야 할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100~101쪽)
운동화가 썩은 피를 울컥울컥
김겸은 선택했다. “현재의 심각한 밑창 손상이나 피혁의 변형 등은 사건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결과가 아닌 재료와 보관환경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므로 손상 과정이 가진 의미, 혹은 손상 과정을 보존할 의미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보고서>)
유물을 손상 상태대로 보존해야 할 경우가 있었다. 손상 과정이 후대에 전할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였다. 이한열 운동화의 손상은 보관 과정에서 발생했다. 김겸은 운동화를 ‘사건 순간의 모습’으로 되돌리되 28년 전의 모습이 아니라 28년을 건강하게 살았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28년 만에 재회한 아버지가 28년 전의 생김새로 있을 때 아들이 겪을 당혹을 이한열의 운동화는 배제할 것이었다.
운동화를 연구소로 옮겨온 김겸은 밑창 경화(재질강화) 작업부터 시작했다. 밑창 경화는 손상의 가속화를 막고 복원의 기초를 쌓는 일이었다. “복원작업 전 밑창의 상태로는 운동화를 돌려세우거나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부서질 수 있으므로 기본적인 밑창 경화 작업을 해야만 윗면과 안쪽의 정확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보고서>)
복원은 정확한 진단에서 출발한다. 복원 대상에 맞지 않는 접착제·용해제를 선택하면 조각들을 완전히 녹여버릴 수도 있었다. 김겸이 복원가로 성장하는 시간은 머릿속 시뮬레이션과 실제 작업의 오차를 좁혀 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운동화에서 탈락한 조각들을 굳히는 데 파라로이드(문화재·미술품 보존용 접착제)를 사용했다. 알갱이 형태의 파라로이드를 자일렌(용해제)에 녹여 주입했다. 액체가 된 파라로이드를 푸석푸석해진 조각에 흘려 넣어 물고기처럼 꿈틀대는 입자들을 붙잡았다.
운동화 밑창의 금과 구멍을 메우기 위해 선택한 도구는 주사기였다. 경화 다음 단계인 ‘메우기’(충전)는 밑창에 금 가고 구멍 난 곳을 화학약품으로 채우는 일이었다. 주사기에서 토해진 에폭시가 밑창의 구멍 속으로 스며들었다.
“만신창이인 자신을 주사기가 찔러 오는데도 L의 운동화는 비명은커녕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투석을 기다리는 신부전증 환자처럼 L의 운동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운동화에서 주사기를 거두고 구멍을 노려봤다. 구멍이 피를 토하기라도 할까봐. 지난 28년 동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머금고 있던 썩은 피를 울컥울컥….”(164~173쪽) L의 운동화 위로 L의 몸이 겹쳐지고 있었다.
김겸이 밑창 경화를 마치고 신발을 뒤집기까지 한 달 보름이 걸렸다. 겨우 운동화를 돌려가며 본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운동화의 상표는 ‘타이거’였다. 나이키나 아식스, 아디다스를 살 수 없었던 청소년·청년들이 ‘호랑이의 위용’으로 위안하며 타이거를 신었다. 신발 안쪽엔 ‘SIZE 270 T6×MO25-W/N’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270㎜의 신발을 신어야 이한열의 발은 평온했다.
매듭의 처리를 두고 김겸은 고민했다. 이한열은 운동화 끈을 독특하게 맸다. 맨 위쪽 구멍엔 끈을 넣지 않았다. 윗구멍을 비운 채 당긴 끈은 리본으로 맺어도 땅에 끌릴 만큼 길었다. 이한열은 남은 끈을 운동화 맨 아래쪽 끈 밑으로 밀어 넣어 위쪽으로 빼낸 뒤 다시 묶었다. 맨 위 구멍을 조이지 않아 이한열은 슬리퍼처럼 발을 쉽게 넣고 뺐을 것이다. 뒤축엔 구겨 신은 흔적이 선명했다.
“삶을 고스란히 담은, 묶음, 구김, 접힘, 닳음, 터짐, 낡음”(<운동화프로젝트> 11쪽) 속에 사치할 수 없는 22살의 평범한 청년이 있었다. 이한열의 성격과 일상이 담긴 매듭을 유지하며 김겸은 복원의 불편을 감내했다.
악몽과 냄새
밤 10시쯤 복원실 복도를 걸어가던 나는 멈칫했다. 나무에 다리를 꽂아 넣고 옴짝달싹 않는 녹슨 못처럼 이소연(나의 동료인 한국화 복원 전문가)이 작업대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작자 미상의 묵죽도(墨竹圖)를 복원 중이었다. 미색 한지를 이파리처럼 얇게 찢어 묵죽도의 손상 부위를 봉합했다. 이소연은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았다. 손으로 해야 하는 복원 작업에 손이 망가진 복원가가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L의 운동화를 본 그가 운동화 끈의 매듭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끈이 풀어지지 말라고 저렇게 묶은 거겠지요? 끈이 풀어져 운동화가 벗겨질까 봐요.”(199쪽)
그날은 유독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발달장애를 앓는 아들을 데리고 치료센터가 있는 경복궁역(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홍은동(서울 서대문구) 집까지 두 시간을 꼬박 걸었다. 아들이 오른쪽과 왼쪽 운동화를 서로 바꿔 신고 있었다는 사실을 엄마는 집에 도착한 뒤에야 알았다. 발이 아파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선 아들의 손목을 그가 잡아끌었다. 세검정(서울 종로구) 근처에선 풀어진 끈을 다시 단단히 매주기까지 했다. 그날부터 이소연은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그는 발에 맞지 않는 운동화를 아들에게 강요하며 끈을 조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다시 물었다. “저걸 풀 건가요? 끈을요?”
복원 경력 초기 김겸은 숱한 악몽에 시달렸다. 그가 완성한 복원물에 변형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이 일주일에 두세 차례 끔찍한 꿈을 불렀다. 그가 복원한 부처상이 일그러지고 목조 건축물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중요한 처치를 빼먹었다는 불안이 가위가 되어 그를 눌렀다. 누군가는 악몽을 복원가의 직업병이라고 했다.
복원가의 직업병은 화학약품으로부터도 왔다. 이한열 운동화를 복원할 때마다 짙은 유독약품 냄새가 김겸의 호흡 속으로 침투했다. 용해제 자일렌은 벤젠 계열의 발암물질이었다. 가스를 많이 마시면 신경계가 상했다. 복원 경력이 쌓일수록 김겸의 체질도 바뀌었다. 유독 가스가 그의 몸에 퇴적되면서 피부에 두드러기가 솟았다.
시취가 나의 작업실을 장악했다. L의 운동화가 냄새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합성수지인 운동화는 부패할 때도 화학약품 냄새를 풍겨야 했다. L의 운동화에선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물질이 소멸하는 과정은 인간이 소멸하는 과정과 닮았다.”(151쪽). L의 운동화가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진 덩어리”(182쪽)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김겸은 망설일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복원가들은 자신의 역할을 의사에 비유하곤 했다. 진단했다면 용기를 내야 했다. 지체했다간 시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숨이 끊어지려는 환자가 도착했을 때 의사는 진료의 의미를 생각하기 앞서 목숨을 잇는 일이 먼저라고 믿었다. “유물·유품이 가진 역사성을 생각할수록 복원가는 압박을 받는다. 사실을 넘어서는 의미 부여는 복원물을 프랑켄슈타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차갑게 진단하고 냉철하게 처리해야 한다.”(김겸 인터뷰)
1987년 6월 김겸도 거리에 있었다. 그 경험이 그에게 복원의 방향을 제시했다. 스토리가 풍부할수록 복원의 의미가 뚜렷해진다는 사실을 김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한열의 운동화여서 더 적극적으로” 복원에 임했다. “한열이의 운동화가 바스러지는 것을 보면서 1987년 우리들의 열정과 노력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이경란은 복원을 의뢰하며 말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통령을 직접 뽑자고 요구하는 데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것을 잘 모르게 되었지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지 선거로 뽑힌 이들은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이한열이 꿈꾸었던 ‘함께 사는 세상’은 점점 멀어지는 듯합니다. 이런 세태를 보여주듯 그의 운동화 바닥은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운동화프로젝트> 발간사)
한 복원가 선배는 나를 볼 때마다 “작품을 함부로 평가하려 들지 말라”고 했다. “복원실로 보내지는 순간 모든 작품은 평등해진다”고도 했다. L의 운동화 앞에서 나는 압박받고 있었다. “L의 운동화가 지니는 가치는 역사적 가치에 해당될 것이다. L의 운동화를 비롯해 유품들은 L의 상징물이다. 단순히 L이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시위 현장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L,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L.”(84쪽)
냄새는 그 사실이 피워 올리는 ‘환취’일 수도 있었다. L의 운동화 앞에서 나는 주저했다. 주저함은 “물질의 복원에서 비물질적 의미를 찾아가는 통과 절차”(김숨 인터뷰)였다. 그것은 “L을 애도하는 행위”(104쪽)이기도 했다. 채 관장은 말했다.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를 대신할 운동화를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든 살아서 증언하도록요.”(55쪽)
정치가 의도적으로 역사 바술 때
유물이 증거하는 역사는
왜곡하기 힘들다고 김겸은 믿었다
그냥 운동화 아니라 L의 운동화
‘나’의 주저는 복원 의미 찾는 과정 “이한열 대신 운동화가 증언케”
복원해야 할 것은 28년 전 아닌
28년을 홀로 버텨낸 현재 모습
살아있다면 2016년 그는 쉰한살
잃어버린 일상은 영영 회복 안돼
복원된 것과 복원되지 않은 것
김겸은 이한열 운동화의 밑창 패턴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운동화 제조사 삼화고무는 폐업하고 없었다. 타이거 운동화 소장자를 찾아냈으나 모델이 전혀 달랐다. 인터넷에서 긁어모은 전세계의 패턴 중에도 같은 모양은 없었다. 패턴 추적을 포기한 김겸은 수십 개의 조각을 핀셋으로 옮겨가며 결을 맞췄다. 어느 순간 밑창 바깥부터 조각 부스러기들이 등뼈처럼 자리를 잡았다. 조각 파편들이 지그소퍼즐(jigsaw puzzle)처럼 얽히고설키자 밑창이 마침내 형태를 드러냈다. 그것은 정구화였다.
나는 황당하게도 멸종동물의 화석을 떠올렸다. 내 속의 무엇이 잃어버린 패턴과 화석을 연결시켰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L의 무너진 운동화 밑창이 이한열의 잃어버린 흔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백악기 무척추동물의 흔적화석이 굽의 패턴을 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기적처럼 맞아떨어진 조각들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다. 토끼 같은 초식동물의 등뼈를 무참히 파손된 L의 운동화 밑창 위에 전시해 놓은 것 같다.”(207쪽) 가로줄을 가진 밑창 상단과 달리 굽은 세로줄이었다. 좌우로 스텝을 밟는 정구 선수들의 신발은 미끄럼을 제동하도록 굽에 세로줄을 새겼다. 오장육부를 조이던 썩는 냄새가 갑자기 사라졌다.
뒤집어진 채 오래 견딘 신발은 본체가 바닥에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김겸은 발사나무를 깎아 보형물을 만들었다. 발사나무는 손가락으로 누르면 쑥 들어갈 만큼 부드러웠다. 그 포근한 나무가 운동화에 깃들어 더는 무너지지 않게 틀을 잡아줄 것이었다. 이한열 운동화를 복원하면서 김겸은 “이 시대라서” 더 절실하게 작업했다.
복원은 기억을 보존하는 역할도 했다. 정치가 역사를 의도적으로 바술 때 유물이 증거하는 역사는 왜곡하기 힘들다고 김겸은 믿었다. “우리가 지켜냈다고 믿었던 가치가 후퇴하고 있을 때 유물을 신화화하려는 열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나는 다만 이한열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집 현관에 놓여 있을 법한 운동화로 돌려놓고 싶었다.”(김겸 인터뷰)
L의 운동화를 복원하며 나는 깨달았다. L의 운동화를 그의 죽음만큼 처참한 상태로 내버려둘 때 운동화는 L을 대신해 신화가 될 것이었다. L의 운동화가 L을 집어삼켜서는 안 되었다(110쪽).
시대의 죽음은 짝 잃은 신발로 전승됐다. 1987년 6월9일 집회에서 행방불명된 L의 왼쪽 신발 위로 ‘버려진 신발들’의 이미지가 중첩됐다. 궤도 자국이 선명한 미선이(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의 하얀 운동화(58쪽)가 겹쳐졌다. 폴란드 마이다네크 수용소에 전시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신발 5만7천점(268쪽)도 퇴적됐다. 한 짝만 구조된 세월호 희생자들의 운동화·슬리퍼들이 짝 없는 운동화·슬리퍼들과 섞여 무더기로 쌓였다.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됐고(222쪽), 기억도 신발에서 시작됐다(223쪽). 신화가 아닌 기억이 증언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매듭은 끝내 풀지 못했나요?” 이소연이 물었다. “L이 자신의 운동화에 묶어 놓은 매듭은 칼로 잘라 버릴 수도 없”(201쪽)을 것이라고 나는 답했다. 아들이 운동화를 벗지 못하도록 매듭을 동여맨 그가 그럴 것이었고, L의 운동화 매듭을 여전히 풀어주지 못하는 우리가 그럴 것이었다. 꽉 조인 운동화 속에서 아들의 두 발은 계속 상처 입을 것이었고, 28년째 운동화를 벗지 못한 L은 퇴행하는 시대를 기약 없이 짊어져야 할 것이었다.
죽지 않았다면 2016년 L은 쉰한 살이 된다. 그가 살아 있다면 L의 운동화는 언제 어떻게 닳아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를 거쳐 간 많은 신발들이 출퇴근길 지옥철에서 그를 지탱해줬을 것이다. 불어나는 뱃살을 빼려 주말마다 산에 오르는 그를 동행했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 손 붙잡고 저녁 바람을 맞는 그의 산책도 도왔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L의 운동화는 그런 일상을 알지 못할 것이다. 복원을 마친 이한열 혹은 L의 운동화가 되찾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이한열 운동화의 단계별 복원 과정. 열화 현상 등으로 밑창이 심각하게 훼손된 이한열 운동화 → 주사기를 이용해 밑창의 금과 구멍에 에폭시 충전 → 퍼즐처럼 아귀를 맞춰가는 밑창 부스러기들 → 발사나무로 깎은 본체 보형물 → 복원이 완료된 운동화(위에서부터). 김겸 제공
1년 뒤 김숨이 ‘복원 과정’을 복원
열화로 가루처럼 바스러진 밑창
트럭 바퀴에 짓밟힌 듯한 운동화
짝 잃고 홀로 남아 만신창이 훼손 주사기가 자신을 찔러 오는데도
운동화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묶음, 구김, 접힘, 닳음 속에
22살 평범한 청년이 고스란히
운동화가 그를 삼키게 둬선 안돼
이한열의 피 묻은 옷과 보존처리를 마친 운동화 앞에 선 복원 전문가 김겸 박사.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한열 열사 영정사진과 그의 사진 속 조끼(오른쪽).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떠준 조끼가 어린이 옷처럼 줄어들었다. 이한열기념관 제공
유물이 증거하는 역사는
왜곡하기 힘들다고 김겸은 믿었다
그냥 운동화 아니라 L의 운동화
‘나’의 주저는 복원 의미 찾는 과정 “이한열 대신 운동화가 증언케”
복원해야 할 것은 28년 전 아닌
28년을 홀로 버텨낸 현재 모습
살아있다면 2016년 그는 쉰한살
잃어버린 일상은 영영 회복 안돼
연세대 학생들이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화학공학과 깃발로 감싸안고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왼쪽). 화공과 학생회 창고에 묻혀 있던 깃발(아랫줄 오른쪽)이 28년 만에 발견돼 지난해 이한열기념관에 기증됐다.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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