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개인들 모여 ‘주체’로
신선한 저항 평가도 있지만
‘순수한 이화인’ 내세워
소수의견 농성장 밖 퇴출도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이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교정에서 총장 사퇴를 요구하며 대규모 집회를 열어 ‘해방 이화 총장사퇴’를 외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이화여자대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10일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2차 시위’에 나섰다.
이대 재학생과 졸업생 1만여명(경찰추산 3500여명)은 이날 저녁 8시,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대 안 이화 캠퍼스 복합단지(ECC)에서 열린 2차 집회에서 평생교육 단과대 사업(평단사업)인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계획 등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등 독단적으로 학교 정책을 결정하고, 이대 캠퍼스에 1600여명의 경찰 병력을 투입시킨 데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최 총장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철저히 ‘개인’으로 움직여온 20대 이대생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미래라이프대 신설 철회를 이끌어내는 등 새로운 운동 방식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이번 문제를 ‘순수한 이화인’들의 일로 규정해 사회적 확장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2주간의 농성 과정에서 드러난 몇 가지 장면들을 통해 다시 만난 ‘세대’들의 모습을 돌아본다.
■ 차별에 찬성하는 20대들의 적극적 권리 투쟁
“학내 문제로 학생들끼리 이렇게 똘똘 뭉친 건 처음 봐요. 게다가 방학 기간 중이잖아요.” ?재학생 이아무개(23)씨는 학기 중 혼자 밥 먹고, 공부하는 게 익숙하다. 이씨뿐 아니라 학생식당엔 ‘혼밥’하는 학생이 태반이다. 이씨는 지난달 학내 커뮤니티 ‘이화이언’에 올라온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과정과 문제점’이란 글을 본 이후, 동료 학생들과 한목소리를 내게 됐다. 학교가 프라임·코어 사업에 참가할 때도 교수·학생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졸속 추진을 한다는 비판 여론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반발이 거세진 않았다. 경찰 투입이 이뤄지기 전까지만 해도 게시판은 주로 실업계 고졸 출신 재직자들을 받아들이면 ‘이대의 질과 격이 낮아져 경쟁력을 잃게 된다’는 내용으로 들끓었다.
이씨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본관 점거 농성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대신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농성을 위한 지원금으로 냈다. “어렵게 공부해서 들어온 대학인데, 학교 레벨이 낮아지는 건 문제잖아요. 내 권리를 지키자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학교 쪽이 대규모 경찰 병력까지 투입해 농성 학생들을 끌어내자 ‘이대를 지키자’는 졸업생들까지 대거 가세했다. 결국 지난 3일, 최경희 이대 총장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계획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 외부세력 대신 내부세력의 힘으로
이대생들은 최 총장의 항복 선언을 ‘순수한 이화인’들의 ‘승리’로 규정했다. 이들은 농성 초기부터 “정치색을 띤 어떠한 외부세력과도 무관하다”고 선언했다. 평단 사업에 반대하는 이대생들을 지지한다는 타 대학들의 연대 집회도 거절하고, 정치권이 내민 손도 잡지 않았다. “이대생들이 주체적으로 학내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것인데, 공연히 보수 언론의 프레임에 갇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것을 경계했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학생증’과 ‘졸업장’을 통해 ‘이화인’임을 입증한 이들끼리 ‘이화이언’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이번 농성·시위를 기획·집행했다. 졸업생 박아무개(28)씨는 “이대 출신의 변호사나 기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밝히고, 장기 농성에 대비해 법률적인 고민이나 언론의 보도 방향 등을 조언하는 내용의 글을 직접 남겼다”고 밝혔다. 총장 사퇴를 외치는 2차 시위가 열린 이날까지 이대생들은 스스로 총 10회의 모금 활동을 벌여 1억원의 ‘투쟁 지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문화비평가 최태섭씨는 “‘단과대학 사업 철회’라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외부세력을 배제하는 등 전략적 선택이 유효했을 수도 있다”면서도 “이 문제를 이대만의 문제로 국한시켜, 재학생과 동문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킨 ‘소비자 운동’에 그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화의 난’ 이후 불거진 동국대와 인하대 등의 평단 사업 철회 목소리가 각자의 캠퍼스 안에서만 메아리치는 것도 이런 현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 ‘느린 민주주의’ 속에 배제된 ‘소수의견’들
이대생들은 평단 사업 철회에서 총장 사퇴 주장으로 이어진 의사 결정이 모든 사람의 의견을 반영한 ‘느린 민주주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평단사업 반대’라는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운동권’으로 지명된 학생들을 투표에 부쳐 농성장 밖으로 쫓아냈다. 외부세력 개입의 기미라도 비치면 ‘목적 달성’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현실적 계산이 반영된 것이다. 지난 7일 자신을 ‘익명의 이화인’이라고 밝힌 한 학생은 “이화여대의 ‘순수성’에 대한 논의는 또다른 폭력으로 느껴진다”는 대자보를 붙이기도 했다. ‘이화이언’엔 이번 사태와 관련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도 ‘문제가 되면 글을 삭제하겠다’는 ‘자기검열식’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다수결’을 내세운 목적지향적 느린 민주주의 속에서 정작 ‘소수의견’은 목소리 낼 자리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 마스크·선글라스 뒤에 숨은 시위
이번에 농성에 참여한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를 착용해 얼굴을 가렸다. 기존 총학생회 주도의 시위와는 달리 주동자도 대표자도 없는 집회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들은 점거 농성의 모든 책임을 특정한 누군가에게 돌리기보다 ‘다 함께’ 짊어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동시에 이런 모습은 ‘이대 혐오’에 대한 피해의식이 반영된 몸짓이기도 하다. 누군가 무단으로 사진을 촬영해 온라인에 올리고, 일부 누리꾼들에 의해 신상이 공개돼 온갖 비난을 당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한 졸업생은 “이대생들은 대부분 이대에 입학한 이후부터 줄곧 이대 혐오를 겪다 보니 자연히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jjinpd@hani.co.kr[디스팩트 시즌3#14_이대 사태 낳은 교육부의 대통령발 졸속 행정]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