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옥사에 마련된 ‘재일동포 양심수-고난과 희망의 길’ 전시실을 찾은 재일동포 양심수 이철씨가 전시물 앞에서 2010년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재심 선고문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십자가가 달린 붉은색·검은색 묵주.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당시 서울구치소) 등에서 1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이철(68)씨와 그의 아내 민향숙(65)씨를 지켜준 물건이다. 당시 재일동포 출신 유학생이던 이씨는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혼을 넉달여 앞둔 때였다. “수중에 유일하게 갖고 있던” 묵주를 나눠 갖고, 남편 이씨는 “식민지배와 분단의 아픔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수감 시절을 견뎠다. 민씨가 전해준 묵주 십자가에는 ‘향, 사랑’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는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허위 조작된 사건임을 밝혀냈고, 이씨는 지난해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꼭 40년 만의 일이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이씨와 같은 재일동포 양심수들의 역사를 담은 전시실 ‘재일동포 양심수-고난과 희망의 길’이 문을 열었다. 이들이 거쳐간 2~3평 좁은 감방에 마련한 전시실에는 이씨 부부의 쓰라린 13년 세월이 담긴 묵주를 비롯해 석방운동에 나섰던 일본인들의 흔적이 담긴 노트, 이후 무죄판결 기록 등이 함께 전시됐다. 이종수·김원중·강정헌씨 등 이씨와 함께 억울한 옥살이를 버틴 재일동포 양심수들은 이날 전시실을 찾아 수감 직후부터 자신들을 위한 구명활동에 나서준 일본 구원회 활동가들과 당시의 기억을 나눴다.
전시실은 이철씨의 제안으로 설치됐다. “3~4년 전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왔다가 아이들이 선생님께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듣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나도 간첩으로 몰려 여기에 있었어요’라고 말하니 모두들 깜짝 놀라더라고요. ‘이대로 10년, 20년 지나면 고통스런 역사가 잊혀진다’는 생각에 작은 비석이라도 놓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함세웅 신부님과 서대문구청의 도움으로 전시실이 마련됐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1970~1980년대 비교적 자유로웠던 일본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한국에 왔다는 이유 등으로 간첩으로 몰린 재일 한국인 출신 유학생들 다수가 거쳐갔다. 160여명으로 추산되는 피해자들 가운데는 단지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한국행을 택했던 이들이 다수 포함됐다. 이날 전시 소개글을 쓴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는 재일동포 양심수의 삶을 다룬 저서에서 이들을 가리켜 ‘조국이 버린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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