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보를 통해 이어진 코리안 디아스포라 여성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큰 흐름이 되어 한반도, 나아가 세계를 잇는 날을 꿈꿉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 여성운동을 개척해온 ‘사단법인 조각보’의 창립 5돌 기념식에서 김숙임 대표가 밝힌 포부다. 기념식은 지난 26일 저녁 서울 시민청 태평홀에서 디아스포라 여성 및 후원회원, 재외동포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2011년 8월 창립한 조각보는 전세계 한인 여성들이 아울러 만든 평화·통일운동단체다. ‘조각조각 난 헝겊을 이어 만든 보자기’를 뜻하는 조각보의 뜻 그대로 평범한 여성들이 주인이 되는 평화·통일운동을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와 북한 출신 여성은 물론이고 중국동포(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 여성들이 조각보를 통해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차이를 드러내며 공동의 가치를 찾는 등 평화·통일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을 들어왔다.
이번 기념식에서도 디아스포라 여성 7명의 말하기 대회인 ‘여기에 우리도 있다, 전해라’를 행사의 맨 앞자리에 놓았다. 말하기 대회에서는 중국동포, 북한동포, 고려인 각 2명과 ‘남녀북남’ 커플인 남한 출신 ‘가을 엄마’ 등이 살아온 이야기를 소개했다. 디아스포라 여성들은 동포의 땅이라고 찾아온 한국에서 외국인 취급, 값싼 노동자 대우를 당했을 때의 아픔을 털어놓고, 기꺼이 ‘언덕’이 되어준 조각보에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조각보가 지향하는 ‘일반인 디아스포라 여성 중심’ 운동은 일찍이 평화·통일운동을 주도했던 김 대표가 오랜 경험과 고심 끝에 찾아낸 결과물이다.
김 대표는 1990년대 초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 남북 여성 토론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홍보위원장으로 참여한 것을 비롯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여성위원장, 한국여성단체연합 평화통일위원장,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대표와 6·15여성본부 대표를 맡기도 했다. 한참 교류가 많을 때는 두 달에 한 번꼴로 북한을 방문해 매번 합의된 성명서를 발표할 정도였다. 이런 활동과 동시에 ‘소수의 여성단체 대표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도 깊어졌다. 그러다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직되자 일반인이 좀더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의 틀을 본격적으로 구상했다.
그는 “탈북 여성이나 조선족 여성들이 너무나 외로운 처지에 있는데 통일운동이 뭘 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부채의식도 조각보를 탄생시킨 큰 동력”이라고 덧붙였다.
“좌우의 진영논리를 떠나 좀더 발랄하게 통일운동을 해보자는 게 (조각보 탄생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의식이지요. 조각보가 추구하는 일상은 통일에 대한 정치적 과제가 아닌 말 그대로 일상을 화제로 삼는 것입니다. 남과 북에서, 중국과 우즈베키스탄, 사할린 등에서 김치 담근 이야기나 애 키운 이야기, 직장생활, 3․8여성의 날 등의 일상을 서로 나누며 이해하는 것이죠.”
최근 창립 5돌 맞아 ‘이야기 대회’
탈북·조선족 등 디아스포라 여성들
삶의 경험 나누며 이해의 폭 넓혀
조각조각 이은 조각보처럼 ‘연대’
통독 ‘괴델리츠 대화모델’서 착안
“디아스포라 삶이야기센터 추진”
그러다 김 대표는 통일독일의 ‘괴델리츠 대화모델’을 찾아냈다. 통일 전 동독에서 서독으로 망명했던 악셀 슈미트 괴델리츠 동서포럼 이사장이 통일 뒤 옛 동독 지역에 농장을 마련해 2박3일 동안 동·서독인을 초대해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편견을 좁히고 이해를 넓힌 프로그램이다.
김 대표는 이 대화모델을 ‘다시 만난 코리안 여성들의 삶 이야기’로 재창안했다. 150여년 전부터 이농과 독립운동, 징용 등으로 이 땅을 떠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후손들이 조선족·고려인·재일동포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되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이해는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돌아온 코리안 디아스포라 여성들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여성들의 삶 이야기’에서는 이런 디아스포라 여성들과 남한 여성들이 함께 며칠 밤을 새우며 살아온 일상을 털어놓는다. 북·중·러에서 태어나 자란 이야기, 탈북 과정과 3국에서의 삶, 그 와중에 일어난 이혼과 재혼, 남한에 재이주해 인생 후반을 사는 이야기 등 서로의 얘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동안 참여 여성들은 어느새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조각보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구술해가는 ‘평화의 사람책 도서관’, 음식 만드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평화의 부뚜막’ 등 다양한 행사를 개발해오고 있다.
김 대표는 기념식에서 “이제 지난 5년의 노력으로 ‘일반인이 일상을 얘기하는 낯선 평화·통일 여성운동’이 본궤도에 올랐다”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동안은 조각조각을 뭉쳐 의미있는 조각보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면, 앞으로는 조각보를 이용해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위한 ‘삶이야기센터’를 만들고, 다시 만난 코리안 여성들과 대륙을 함께 횡단하는 등 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글·사진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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