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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나무는 보고 가면서 우리들에겐 눈길 한번 안 주나

등록 2016-09-02 21:22수정 2016-09-02 21:31

[토요판] 커버스토리
인천상륙작전, 두 개의 기억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2014년 개봉한 <국제시장>의 프리퀄 같은 영화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자랑스런 군인들은 이후 제대를 해 국제시장에서 가족을 위해 뼈가 빠져라 일하는 한 아버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과도한 애국심을 고취하는 이 두 ‘국뽕영화’의 공통점은 씨제이(CJ)가 제작을 했다는 것 외에도 박근혜 정부의 노골적인 편애를 받은 영화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박 대통령은 국정화 교과서부터 최근의 사드 배치까지 자신의 퇴행적 국정운영을 나라 사랑과 안보 논리로 희석하는 데 이 두 영화를 적절히 이용했다. 그러나 노골적 선동 뒤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일환으로 이뤄진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도 숨겨진 진실 가운데 하나다. 폭격 이후 66년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월미도 실향민의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면, 영화와 그 영화에 대한 대통령의 상찬으로부터 외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고향을 빼앗긴 이범기(84)씨가 지난달 30일 낮 인천 월미공원 앞에서 1950년 9월10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 미군의 월미도 폭격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노인의 메마른 눈가 주름 위로 물기가 어른거렸다.

지난달 28일 오후, 인천시 중구 북성동에 위치한 월미공원. 이범기(84) 할아버지는 부모님 생각이 날 때마다 이곳을 찾는다. 지금은 공원인 이곳 월미도가 그의 고향이다. 1950년, 18살 소년은 쫓기듯 월미도를 빠져나왔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9월10일이었다. 그날 월미도는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66년이 지났지만 그날은 어제만 같다.

“새벽 6시께였지. 갑자기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렸어. 놀라서 집 밖으로 나가보니 전투기 2개 편대가 날아와서 마을을 폭격하더라고. 집집마다 이미 불바다가 돼 있었어. 자다가 그냥 포탄에 맞고 죽은 사람이 많았어. 아직 안 죽은 사람들은 뭐 하나 챙길 겨를도 없이 속옷 바람으로 부랴부랴 동리 앞 뻘밭으로 대피했고. 그런데 전투기들이 거기다 대고서도 기총소사를 하더라고요. 나는 뻘을 몸에 바르고 죽은 체 누워 있다가 겨우 살아났어. 폭격으로 마을은 순식간에 전소됐어. 점심께까지 이어진 폭격 끝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신이라도 수습한다고 집을 뒤졌어요. 이곳저곳에서 곡소리가 났어요. 그 처참한 걸 어찌 말로 다 할까….”

그는 마른 숨을 길게 쉬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월미도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강제이주된 주민들은 66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월미도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가 2008년 처음 열린 이래 인천상륙작전 기념식과 위령제는 작전일인 매년 9월15일에 월미공원 내 다른 장소에서 각각 진행됐다.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은 “재연행사에서 비행기로 축포를 쏠 때마다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을 우롱하는 것 같아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사진은 2010년 열린 ‘60주기 위령제’ 모습과 2014년 열린 ‘제64회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의 재연 모습(왼쪽부터). 인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인천/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월미도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가 2008년 처음 열린 이래 인천상륙작전 기념식과 위령제는 작전일인 매년 9월15일에 월미공원 내 다른 장소에서 각각 진행됐다.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은 “재연행사에서 비행기로 축포를 쏠 때마다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을 우롱하는 것 같아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사진은 2010년 열린 ‘60주기 위령제’ 모습과 2014년 열린 ‘제64회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의 재연 모습(왼쪽부터). 인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인천/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월미도 동쪽 지역을 전소하라”

과도한 애국심을 부추긴다는 뜻에서 ‘국뽕 영화’란 지적을 받는 <인천상륙작전>이 누적관객수 700만명에 근접하는 요즘, 이 할아버지는 되레 한숨이 늘었다. 인천상륙작전 직전 해군 첩보대와 비정규 정보부대인 켈로(KLO)의 활약상만을 다룬 영화에는 할아버지와 같은 월미도 실향민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한겨레> 8월13일치 11면)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그 작전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그 관심에서도 쫓겨나 있다. 올해 상륙작전 기념일(15일)은 공교롭게도 추석과 같은 날이다. 월미도 실향민들에게 올 추석이 더 서러운 이유다. 그들은 왜 자기 땅에서 유배된 것일까?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인천상륙작전의 일환으로 이뤄진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월미도 주민 100여명이 희생된 사실을 진실규명했다. 이른바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만 10명이다. 실종자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사망자는 1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진실화해위는 추산했다. 당시 공습은 월미도 점령을 위한 미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진행됐다. 북한군이 주둔하던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미군이 반드시 무력화해야 할 인천의 관문이었다.

진실화해위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에서 찾아낸 당시 미 제1해병비행단의 ‘항공공격보고서’(Air Attack Reports)를 보면, 월미도에 대한 첫 폭격은 1950년 9월10일 새벽에 이뤄졌다. 제33해병비행전대 소속 함재전투기대대인 제214·323해병전투비행대대 소속의 전투기 43대가 동원된 이날의 폭격은 새벽부터 점심때까지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사전 경고는 없었다.

1차 폭격을 위해 전투기 14대가 항공모함 시실리(SICILY)와 바딩 스트레이트(Badoeng Strait)에서 각각 이륙한 시각은 오전 6시께였다. 임무는 ‘월미도 동쪽 지역을 네이팜탄으로 철저하게 집중폭격하여 모든 시설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집중폭격’(Saturation Bombing)은 “적이 있는 일정 지역을 목표로 설정하여 집중적·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것”을 말한다. 6시50분, 월미도 상공에 도착한 선행 편대(8대)는 켈러 소령의 지휘하에 비행기마다 2개씩 16기의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로켓포를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플록 소령은 폭발로 불타고 있는 건물 등에 기총소사를 했다. 앤더슨 중령의 통제 아래 6000피트 상공에서 35도 각도로 강하한 또 다른 편대(6대)는 수평저공비행으로 약 500피트(약 152미터) 상공에서 월미도 동쪽 지역에 네이팜탄 2기씩 도합 12기를 내리꽂았다. 그렇게 1차 폭격은 40여분 동안 진행됐다.

폭격에 사용된 네이팜탄은 알루미늄·비누·팜유·휘발유 등을 섞어 젤리 모양으로 만든 네이팜을 연료로 하는 유지소이탄(油脂燒夷彈)의 일종이다. 3000℃의 고열로 반경 30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소이력(燒夷力·태워버리는 힘)이 매우 큰 무기다.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비행기에서 투하하는 방법으로 사용됐다. 투하 지역을 초토화해 생명체를 말살하고 생존한 생명체에게도 심각한 후유장애를 초래한다. 한국전쟁, 베트남전, 이라크전 때도 미군이 네이팜탄을 사용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재는 비인도적인 무기로서 사용이 금지됐다.

1차 폭격이 끝난 지 5분 만에 다시 2차 폭격이 이뤄졌다. 아침 7시 두 항공모함을 이륙한 전투기 15대는 7시40분부터 8시25분까지 월미도 동쪽 지역을 재공습했다. 214대대 소속 가버 대위는 네이팜탄으로 섬 동쪽 뚝길 남쪽에 있는 창고 하나를 명중해 폭발시키고 다른 창고 두 곳을 파괴했다. 7000피트 상공에서 500피트까지 급강하한 323대대 소속 전투기 9대는 수풀진 곳을 조준하여 공격했다. 해당 대대 전투기 조종사는 “화염으로 볼 때 폭격은 부근의 모든 것을 정확히 파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했다”며 “현재 (월미도) 지역의 80%가 파괴됐다”고 보고했다.

3차 폭격은 약 3시간 뒤인 오전 11시15분부터 시작돼 낮 12시30분까지 이어졌다. 대대장인 리시드가 이끄는 214대대 전투기 8대와 323대대 소속 전투기 6대가 동원됐다. 3차 폭격의 임무는 ‘목표물을 폭파하고 해당 지역에 기총소사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폭격 관측 내용에는 “각 비행기의 네이팜탄 투하와 기총소사는 할당된 지역인 뚝방길 접합 지점 북쪽 지역에 가해졌다”며 “(3차 폭격으로) 목표 지역의 90%가 파괴되었다”고 쓰여 있다.

‘국뽕영화’ <인천상륙작전> 흥행 속
영화에는 안 나오는 월미도 폭격 사건
상륙작전 직전 미군 무차별 폭격으로
100여명의 민간인 숨지고 강제 이주
2008년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이뤄져

당시 미군 폭격기록엔 “월미도 동쪽
집중폭격으로 전소하라”는 내용 나와
150m 상공에서 민간인 기총소사한
내용도 목격자 증언과 정확히 일치
정부 “법적 근거 없다”며 보상 외면

‘월미도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가 2008년 처음 열린 이래 인천상륙작전 기념식과 위령제는 작전일인 매년 9월15일에 월미공원 내 다른 장소에서 각각 진행됐다.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은 “재연행사에서 비행기로 축포를 쏠 때마다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을 우롱하는 것 같아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사진은 2010년 열린 ‘60주기 위령제’ 모습과 2014년 열린 ‘제64회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의 재연 모습(왼쪽부터). 인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인천/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월미도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가 2008년 처음 열린 이래 인천상륙작전 기념식과 위령제는 작전일인 매년 9월15일에 월미공원 내 다른 장소에서 각각 진행됐다.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은 “재연행사에서 비행기로 축포를 쏠 때마다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을 우롱하는 것 같아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사진은 2010년 열린 ‘60주기 위령제’ 모습과 2014년 열린 ‘제64회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의 재연 모습(왼쪽부터). 인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인천/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민간인 구별 않고 무차별 기총소사

폭격 기록은 당시 상황을 목격한 윤정여(88) 할머니의 증언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2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윤 할머니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폭격이 잠시 멈추었을 때 월미도 뚝방길 북쪽 모래사장이 있는 부근에서 밥을 먹으려고 주민들이 모여 있었는데 비행기가 총을 쏴서 아주 많이 죽었어. 오후에 나룻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난을 가는 중에 시체들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더라고. 우리 살던 동네는 기둥 하나 없이 폭삭 무너져 내렸어. 10~20m 떨어진 곳에 있던 옛 미군 막사는 폭격을 피해갔더라고. 마을에만 폭격을 한 거여.” 월미도로 갓 시집온 문정숙씨는 이때 허벅지에 총을 맞고 과다출혈로 숨졌다고 한다.

무차별적 폭격 양상은 미군이 펴낸 공간사(公刊史)에서도 확인된다. 미 해군연구소에서 내는 잡지() 1956년 3월호에는 미군 해병 소령 로버트 A. 맥멀런과 대위 니컬러스 A. 캔조나가 쓴 ‘월미도, 키를 돌리다’(Wolmi-Do, Turning the Key)라는 글이 실려 있다. 두 사람은 ‘성공한 작전’ 월미도 폭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9월10일 해병 전투기가 아침 내내 바다에서부터 줄지어 날아와 대형을 이루었고, 작은 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폭격했다. 거의 6시간 동안 총알과 폭탄과 불의 비가 떨어졌다. 월미도의 대부분이 불에 타오를 때까지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불의 비’는 10일 하루만 내렸던 것이 아니었다. 첫날 폭격 이후 귀함한 전투기를 태운 호위 항모는 일본 사세보로 귀환했다. 태풍 때문에 일시 대피하기 위해서였다. 항모부대의 전투기들은 12일과 13일, 월미도와 인천으로 다시 출격해 10일과 유사한 공중폭격을 반복했다. 13~14일에는 10척의 군함이 월미도 720m 거리까지 다가가 월미도 서쪽 언덕의 요새에 함포사격을 가했다. 이틀 동안의 함포사격으로 지하벙커 등이 무너지며 월미도를 수비하던 400명의 북한군 중 100여명이 죽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다룬 월미도 관련 내용의 한 대목이다. 이날 집 안에 동생과 숨죽여 숨어 있던 이대도 할아버지는 동생 이대수씨가 포탄에 맞아 숨지는 장면을 눈앞에서 봤다. 형의 나이 17살이었다.

그렇다면 미군은 월미도에 민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당시 미군은 월미도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었고 1949년 일본으로 철수할 때까지 인천항을 이용했다. 상륙작전 실행 때는 전쟁 전에 인천항 및 월미도에 근무했던 군인들이 작전 정보부서에 파견돼 지역 정보를 제공했다. 미군의 정보부서가 월미도 폭격 이전에 민간인 거주지의 존재를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진실화해위가 판단한 근거들이다. 특히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가 된 한국 해군의 첩보작전(X-Ray)도 월미도를 타깃으로 한 것이었다. 월미도 내 적의 방어병력 위치 정보와 실제 상주 인원, 월미도의 지형지물 등의 파악이 주요 임무였다.

월미도 점령 이후 미군의 전투결과보고서에는 당시 북한군 병력이 약 400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미 해군 정보장교 클라크 대위는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쓴 보고서에서 당시 월미도의 북한군 수를 1000여명으로 잡고 있다. 이 차이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진실화해위는 당시 월미도에 거주하던 주민과 노무자의 수가 대략 600명에 달한 점을 근거로 미군이 월미도에 있던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당시 폭격작전의 형식이 월미도의 모든 민가를 적의 시설로 간주할 때나 가능한 ‘무차별 집중폭격’이었던 사실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폭격 과정에서 민간인을 식별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낮다. 앞의 항공공격보고서를 보면 당시 전투기들은 약 500피트(약 152미터) 상공에서 대단히 낮게 비행하면서 폭격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종사들이 육안으로도 민간인을 식별할 수 있는 높이였다. 항공공격보고서는 당시 날씨를 ‘CA’(Clean Air)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미군은 북한군과 민간인을 식별할 수 있는 근접한 거리를 비행하면서도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은 채 무차별 기총소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폭격보고서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확인된다. 323대대의 제2차 폭격보고서에는 ‘군대는 안 보인다’는 관찰 결과 다음에 ‘해안선과 방파제를 따라 기총소사하라’는 명령을 받아 폭격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이 지난달 28일 인천 중구 월미공원에 세워진 ‘월미도 연표’를 보면서 폭격사건 희생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인천/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이 지난달 28일 인천 중구 월미공원에 세워진 ‘월미도 연표’를 보면서 폭격사건 희생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인천/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2001년이 귀향의 적기였지만…

점심께까지 이어진 첫날 폭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마을로 갔다. 그러나 그 일조차 쉽지가 않았다. 모두 타버려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청인 정아무개씨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은 끔찍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모친이 ‘새까맣게 탄 사체가 많아서 부친의 시신을 찾기 어려웠는데 여러 사체의 입을 벌려 보다 금이빨을 보고 부친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하시더라.”

당시 15살이던 임인자 할머니는 “내 동네 친구 이성례 3남매도 폭격으로 죽었다. 포탄이 떨어져 사방에 불이 붙자 서로 껴안고 타 죽었다. 할머니를 구하러 월미도로 간 아버지로부터 이 얘기를 들었다”고 2007년 10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진술했다.

주민들에게 가혹하긴 북한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범기 할아버지는 회고했다. “폭격으로 가족과 집을 잃은 그날 저녁에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의 강압으로 무너진 기지를 복구하는 데 동원됐다. 낮에는 미군에 시달리고 밤에는 인민군에 시달렸다.”

하루아침에 살던 집이 풍비박산된 주민들은 노숙을 해야 했다. 유경례(당시 27살) 할머니는 2007년 3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집단 무덤’으로 변한 당시 월미도를 묘사했다.

“저녁때 마을로 돌아와보니 시아버지가 머리에 파편 2개가 박힌 채로 숨져 있었다. 타버린 집터를 치우고 타고 남은 옷을 입은 채로 아무 데나 쓰러져 잤다. 다음날은 폭격이 없어서 집집마다 시신을 마을 서쪽 산기슭에 가매장했다. 그 다음날 다시 폭격이 시작되자 주민들이 모두 월미도를 급히 떠났다.” 가매장한 묘는 이후 주둔한 미군이 불도저로 밀어버려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만 월미도에 남았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그들도 인천 시내와 영종도 등지로 피난갈 수밖에 없었다. 이범기 할아버지도 가족을 따라 9월15일 월미도를 떠났다.

“인천 시내에 지금의 대한제분 공장이 있던 자리로 피난을 갔어. 거기가 염부들이 쓰는 관사가 있었거든. 거기 있던 사람들은 이미 떠난 빈집에서 지냈지.”

전쟁은 잔인했고 가난은 가혹했다. 맨몸뚱어리로 스스로를 건사해야 했다. 낮에는 국군이 동원하는 부역에 끌려다니느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입 하나 덜 생각에 그는 군대에 자원했다. “월미도 폭격을 목격한 탓인지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동부전선에서도 별로 무섭지 않더라고.” 이 할아버지는 총상을 입고 1954년 7월 하사로 제대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수세에 몰렸던 미군은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그날 이후 월미도 주민 500여명의 삶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작전 이후 월미도가 미군기지가 되면서 40여 가구의 주민들이 고향을 빼앗겼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2년 주민들은 모임을 만들어 인천시청 등에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진정을 냈다. 당시 표양문 시장은 주민들에게 ‘지켜질 리 없는 약속’을 했다. “지금은 미군이 저렇게 주둔하고 있으니 도리가 없지 않으냐. 걱정 말라. 미군이 철수하면 다 들어가게 해주겠다.”(주민 5명이 면담 때 들은 내용이라며 진실화해위에 진술) 주민들은 1963년에도 진정을 냈지만 ‘실향’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다.

폭격으로 가옥과 어선 등 전 재산이 불타버린 주민들은 월미도 입구에서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고향 마을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미군은 마을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미군부대가 떠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1971년 미군부대가 월미도에서 철수했지만, 토지대장이 없다는 이유로 주민들의 귀향은 불허됐다. 1970년대엔 박정희 정권의 개발계획에 따라 판자촌까지 철거당했다. 이후 각지로 흩어져 살아온 원주민들은 여전히 월미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2001년 국방부로부터 월미도 땅 42만㎡를 430여억원에 사들인 인천시는 이곳에 공원을 조성했다. 그때도 주민들의 귀향은 고려되지 않았다. 두 기관이 의지만 있었다면 주민들이 ‘내쫓긴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적기였다. 무심한 세월은 또 흘러갔다. 2008년 진실화해위는 미군이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한 것은 국제법 등에 위반된 작전이라며, 한국과 미국 정부가 협의해 희생자와 쫓겨난 피해 주민들에게 합당한 피해 보상과 귀향 대책을 취하도록 권고했다. 국가기관 차원에서 이뤄진 최초의 진실규명이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법적 근거 등이 없다는 이유로 권고를 외면했다.

폭격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가족과 재산 잃고 모진 가난 시달려
고향은 미군이 주둔하면서 출입금지
월미도 입구서 판자촌 이루고 살아
전쟁 후 인천시 등 상대로 귀향 요구

인천시, 2001년 국방부로부터 땅 매입
원주민 귀향 염원 뒤로하고 공원화
2012년 특별법 발의됐지만 자동폐기
2013년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패소
원주민들 “인천시가 제발 나서달라”

지난달 18일 월미도 방문 박대통령
농성장 안 보이는 서문 통해서 출입
20일은 영화 관람으로 ‘띄우기’ 동참
고령·지병으로 원주민들 세상 떠나
고향에 살고 싶다는 소망은 언제나

월미도 실향민인 이범기씨가 지난달 30일 낮 인천 월미공원 정문 옆에 있는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 농성장 앞에서 강제이주된 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달 18일 월미공원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농성장이 있는 정문이 아닌 서문을 이용해 공원에 도착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월미도 실향민인 이범기씨가 지난달 30일 낮 인천 월미공원 정문 옆에 있는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 농성장 앞에서 강제이주된 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달 18일 월미공원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농성장이 있는 정문이 아닌 서문을 이용해 공원에 도착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국방부가 전향적 판단 내려야”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문병호 의원이 월미도 사건의 진상규명과 민간인 희생자·유족 보상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법을 발의했다. 이 특별법도 회기 내 처리되지 못해 자동폐기됐다. 당시 국방부는 특별법에 대한 검토보고에서 진실화해위의 2008년 진실규명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국방부는 “월미도 지역 첩보수집 활동을 실시한 미군 대위의 정보보고에 월미도의 민간인 활동 관련 보고는 없다”며 “당시 한국군 첩보수집대장의 증언에서도 민간인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없었다는 뜻이다.

지난달 28일 월미공원에서 <한겨레>와 만난 한인덕(73·여)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장은 이에 대해 “폭격을 목격한 부녀자들은 그럼 북한군이었다는 말이냐. 주민들의 고통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국방부의 태도에 말이 안 나온다”고 개탄했다.

월미도 원주민들을 한숨짓게 한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2013년 11월, 서울고등법원 제19민사부는 대책위가 대한민국과 인천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해서 ‘근거 없다’는 이유로 항소기각 결정했다. 민사소송에서도 패소한 대책위는 인천시가 적극적인 보상과 귀향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시청은 위령제 지원(500만원) 외에 별도의 대책 마련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지방정부가 풀기에는 여러가지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국방부가 전향적인 판단을 내려 보상 등의 절차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국방부와 지자체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대책위 활동을 하던 연로한 주민들은 잇달아 세상을 떠나고 있다. 2004년 80여명으로 꾸려진 대책위에는 현재 30여명만 생존해 있고 그중 10여명은 거동마저 불편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에 지쳐 포기한 이들도 있다. 한 위원장은 “한국전쟁 당시 집단희생 사건 가운데 고향을 통째로 잃어버린 건 우리밖에 없다”며 “1953년 정전협정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월미도가 고향인 한 위원장의 남편은 2004년 대책위가 월미공원 앞에 만든 농성장을 10년 가까이 지켜오다 치매와 합병증으로 지난해 세상을 등졌다.

지난달 18일 박근혜 대통령이 월미공원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인천상륙작전의 포격에도 살아남은 ‘평화의 나무’와 해군첩보부대 영령을 기리는 ‘충혼탑’ 등을 둘러봤다. 이날 박 대통령은 정문이 아닌 서문을 통해 월미공원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이 정문이 아닌 다른 출입구를 이용해 행사장에 도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대개 경호상 필요에 따라 이뤄진다. 서문으로 들어온 박 대통령은 공원을 떠날 때는 정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가족도 잃고 고향도 잃은 억울한 월미도 원주민들에 대한 피해보상과 귀향대책을 수립하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월미도 원주민들의 한과 눈물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피해간 월미공원 정문 오른쪽엔 대책위가 꾸린 농성장과 그들의 요구를 담은 펼침막이 걸려 있다. 정문으로 공원에 들어올 경우 자연스럽게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이날의 ‘브이아이피(VIP) 의전’ 동선은 대통령이 농성장과 펼침막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청와대의 심기 의전(?)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한 위원장은 2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박 대통령이 월미도 ‘평화의 나무’를 보고 가셨다는데 우리가 월미도의 나무만도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폭격에 살아남은 나무는 보고 가면서 폭격으로 고향을 잃은 우리들에게는 눈길 한번 안 주니 이 정부는 우리를 개돼지 취급하는 게 아니고 뭐겠냐”며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달 20일, 박 대통령은 일반 시민들 및 대통령 비서실 소속 수석비서관 4명, 청와대 행정인턴 15명과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했다. 영화에 대한 논란에도 아랑곳없이 청와대는 이날 논평까지 내며 ‘대통령의 영화 띄우기’를 지원했다.

“박 대통령의 이번 ‘인천상륙작전’ 관람은 누란의 위기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의 정신을 한번 더 되새기고, 최근 북한의 핵 위협 등 안보 문제와 관련해 국민이 분열하지 않고 단합된 모습으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

청와대는 공식 트위터 계정에도 박 대통령의 관람 사진과 함께 “폭염의 절정인 이번 주말 여러분들도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라는 멘션을 달았다. 역사적 사실을 ‘먹기 좋게 편집한’ 상업영화를 ‘전 국민이 봐야 할 애국영화’로 정치가 앞장서 홍보하고 있다.

청와대의 행보는 보수진영의 ‘반공영화 밀어주기’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관람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자유총연맹은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집단 관람한 뒤 “사드배치는 제2의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내용의 토크쇼를 열기도 했다.

정부·여당과 보수단체의 과도한 영화 띄우기에 월미도 실향민들의 상처는 더욱 덧나고 있다. 지난달 25일, 인천지역 시민단체들과 월미도 원주민들은 “인천시민 희생을 가져온 인천상륙작전의 역사를 상업적 소재로 사용하거나 정치적, 이념적 행사로 악용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인천시청 현관 앞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쟁의 역사를 치유하지는 못할망정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인천상륙작전 역사와 월미도 미군 포격사건 역사를 왜곡한 영화 제작자는 월미도 원주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오는 11일 월미공원에서는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제’가 열린다. 2008년부터 열린 위령제에 인천시와 중구는 각각 500만원씩 모두 1000만원의 예산을 지원한다. 앞서 9일 열리는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은 해군과 인천시가 낸 예산 15억원으로 준비되고 있다.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올해는 기념식장 좌석도 1700석에서 2500석으로 늘렸다고 한다. 인천시는 월미도 원주민들을 기념식에 공식 초청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남한의 피난민들은 대부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귀향이 차단된 월미도 원주민들은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도 모자라 지역 공동체마저 파괴된 채 실향의 고통 속에 놓여 있다. 한 위원장은 “길 가다 발을 밟아도 사과하는 게 사람 사는 도리인데 하물며 국가의 전투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책임지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 옆에 있던 이범기 할아버지는 고향 쪽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고향에 살고 싶다는 이들의 소박한 바람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인천/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hani.co.kr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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