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렬 전 부장판사 페이스북 화면 캡쳐
신넘버 쓰리와 파파이스 녹음 ·녹화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 피곤이 몰려 와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글을 씁니다 . 상당히 깁니다 .
법원이 백남기 선생님에 대한 (부검을 위한 ) 검증영장을 발부했다고 합니다 . 그런데 , 그 영장의 내용이 아주 생소합니다 . 영장을 발부하면서 조건을 달았다고 합니다 .
그 조건이라는 것이 ① 부검장소는 유족 의사를 확인하고 서울대병원에서 부검을 원하면 서울대병원으로 변경할 것 ② 유족이 희망할 경우 유족 1~2명 , 유족 추천 의사 1~2명 , 변호사 1명의 참관을 허용할 것 ③ 부검 절차 영상을 촬영할 것 ④ 부검 실시 시기 , 방법 , 절차 , 경과에 관해 유족 측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것 등이라 합니다 . 영장을 발부하기는 하되 , 유족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라 합니다 .
아는 몇몇 전 ·현직 판사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 그 분들이나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 이렇게 조건이 붙은 영장을 본 적도 없고 , 발부해 본 경험도 없다고 합니다 . 의견을 모아 보았습니다 .
영장에 조건을 붙일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명백하지 않다 합니다 . 그래서 , 조건이 붙은 영장이 유효한지 , 무효인지에 대해서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 유효라는 분들은 법적으로 명백하게 금지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 반대로 무효라는 분들은 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 그리고 , 무효라고 보는 분들 중에서도 , 조건만 무효이기 때문에 조건이 안 붙은 영장으로 보아야 한다는 분도 계시고 , 전체적으로 무효라고 보는 분도 계셨습니다 .
그런데 , 많은 분들이 이런 의견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
첫째 , 법원의 기본적인 임무를 망각한 판단이라 합니다 . 법원의 기본적인 책무는 분쟁의 해결입니다 . 이 사건에서의 다툼내용은 과연 부검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 옳다면 영장을 발부하면 되고 , 아니면 기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 조건을 붙임으로써 이것도 아니고 ,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합니다 .
법률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다른데 , 이런 영장을 가지고 어떻게 분쟁이 해결되겠습니까 ? 오히려 분쟁이 더 조장되어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 , 법원의 기본적 책무를 망각한 영장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영장이 유효한 것이냐 , 무효인 것이냐의 문제는 탁상공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 지금 서울대병원 안팎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백 선생님의 시신을 지키고 계십니다 . 이 영장을 집행하려 하는 경우 충돌이 벌어질 것임은 명백합니다 .
만약 영장이 유효하다면 ? 집행을 막으려는 시민들의 행위는 공무집행방해죄를 구성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 수많은 사람들이 전과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영장이 무효라면 ? 그 영장에 따른 집행은 무효인 영장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위법한 공무집행입니다 . 위법한 공무집행에 대항하더라도 공무집행방해죄가 되지 않습니다 .
결국 이런 불명확한 영장 때문에 많은 분들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적법한 행동인지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 그래서 분쟁을 조장하는 영장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
특히나 , 조건만 무효여서 깨끗하게 발부된 유효한 영장이라면 ? 유족을 배려한답시고 조건을 붙인 것 같지만 , 아무 조건 없는 영장이 되어 버려서 , 오히려 유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헛수고를 한 것이 됩니다 .
둘째 , 부검을 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충돌의 책임을 비겁하게 백남기 선생님의 유족에게 떠 넘겨 버렸다 합니다 . 조건에 의하면 , 부검장소를 정하는데 유족의 의사를 확인하고 , 부검절차에 참여하는 사람을 정하는데 유족의 희망에 따르라 합니다 . 알려진 바와 같이 백 선생님의 유족들께서는 부검 자체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 그런 분들한테 부검장소와 부검절차에 참여할 사람을 정하라고 하는 것은 유족들의 의사를 존중하기는커녕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 영장을 발부하기에도 기각하기에도 부담을 느낀 나머지 , 유족들의 의사에 따라 부검을 실시하는 것처럼 포장을 해 버린 것이라 합니다 . 그래서 , 비겁하고 무책임한 영장이라고 합니다 .
셋째 , 조건 자체도 불명확하다 합니다 . 법적인 행위는 명료해야 합니다 . 그래야 제 2, 제 3의 다툼이 생기지 않습니다 . 조건에 의하면 , 유족에게 ‘충분한 ’ 정보를 제공하라 합니다 .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충분한 ’ 정보입니까 ? 설령 영장이 집행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제공되는 정보가 과연 충분한 것인지 , 충분하지 못한 것인지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 그런 기준을 제시해 주어야 할 임무를 가진 법원이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용어를 써서 더 큰 다툼이 벌어질 수 있게 해 버렸다고 합니다 .
왜 이런 영장이 발부되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 이 영장은 무효입니다 . 집행되어서는 안 되는 영장입니다 .
한 때 법원에 몸을 담았던 사람으로서 , 이런 영장을 맞이하시게 된 백 선생님과 유족분들께 법원을 대신하여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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