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사는 직장인 서진원(48)씨는 지난 10일 서울행 케이티엑스(KTX) 기차표를 예매했다. 12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민중총궐기 대회에 고등학교 2학년생인 딸과 함께 참석하기 위해서다. 서씨는 “‘이게 과연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지금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딸과 역사의 현장에 함께 서서, 이 정부에 국민의 힘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경기도에서 사회과 교사로 일하는 윤아무개(36)씨도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참가한다. 윤씨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이럴려고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사회과 교사가 됐나’하는 자괴감과 함께 훗날 아이들에게 2016년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옛 제자들과 대학 동문들을 집회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에서 하룻밤 자고 오려 했는데, 이미 예약이 다 찬 숙박시설이 많아 예약을 아직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과 5일저녁서울광화문 일대에서 진행된 모이자!분노하자!내려와라!박근혜 1,2차범국민행동 행사에 참석한 노인, 가족, 학생 등 다양한 모습의 참석자들의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강창광 기자, 신소영 기자 bong9@hani.co.kr
12일 전국 각지의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로 향한다. 정치, 법, 경제, 사회 등 우리 사회 전 부문에 걸친 부패와 모순을 드러낸 ‘국정농단 파문’에 저마다의 ‘분노’와 ‘자괴감’을 안고 광장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분당에서 자영업을 하는 손아무개(53)씨는 19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손씨는 ”시위가 거의 매일 열리다시피 한 그 시절에도 시위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5일 생애 처음으로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가족들과 함께였다. 그는 12일에도 촛불을 들 계획이다. 손씨는 ”대통령과 사적 관계에 있는 최순실 한 사람에게 국가가 농락당하고, 정책이 뒤바뀌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집회에 나선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30대 이아무개씨는 ”국민을 무시하는 정권을 더는 참을 수 없어, 주말마다 천안에서 올라와 집회에 참여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나라가 망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최순실 파문은 특히 학생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20)씨의 고교 재학시절 출석 특혜 의혹을 비롯해 대학교 입학과 학점 특혜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다. 서울 강북지역의 한 고등학교 2학년인 김삼건(17)군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참여가 큰 힘이 될 것 같아 촛불을 든다“고 말했다. 인천 ㅊ고등학교 3학년인 이아무개(18)군은 ”입시 준비를 하면서 나만 열심히 노력하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정유라씨가 권력을 등에 업고 이른바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 해 온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졌다“며 ”지금이라도 당장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지만 17일 수능 탓에 앉아서 공부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다. 수능 끝나면 집회에 참석해 제 목소리를 내겠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다는 부채감에 거리로 나서는 이들도 있다. 김세환(57·자영업)씨는 ”그동안 박 대통령을 지지하고 대통령으로 뽑은 탓에 나라가 이렇게 엉망이 된 것 같다“며 ”‘대통령 하야’를 외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40대 초반 회사원인 김아무개씨도 ”그동안 새누리당만 찍어왔던 보수적인 부모님도 ‘이제는 참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나라를 이끌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며 ”이번 집회에는 가족, 친구들과 함께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최순실 사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에 다니는 임광순(32)씨는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추상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구체적인 요구를 함께 외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역사교육의 문제는 곧 민주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철회하라고 외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철도노동자의 가족인 이아무개(36·회사원)씨도 “이번 파문으로 철도파업이 묻혀 아쉽다는 생각도 들지만, 박근혜 게이트와 성과연봉제는 무관치 않다고 본다”며 “정치권에게만 맡겨서는 철도파업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 직접 나서서 많은 이들이 변화를 염원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욱 박태우 김양중 이창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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