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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5년 만에 다시 공개하는 ‘김재규의 첫 진술 육성 테이프’

등록 2016-11-18 16:48수정 2018-01-17 15:06

박정희의 사생활 철저하게 함구한 김재규
큰영애 문제만큼은 항소이유서에 구체적 언급

“피고인(김재규)은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 하길래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후 알고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여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 하게 해야 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도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총으로 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변호인이 쓴 ‘항소이유서’ 중 일부 내용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 대통령과 최태민의 관계, 10·26 이후 재판 과정에서 이를 언급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항소 이유서가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한겨레>는 2011년 10월 18일 ‘김재규 최초의 진술 육성 테이프’(사진)를 32년 만에 처음 세상에 공개했다. ’재야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 김정남 선생이 연재한, ‘10·26 32돌 특별기획-박정희 시대를 증언한다’를 통해서다. (▶관련 기사 : “박정희 쐈지만 그 무덤위에 설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최초 육성 진술이 담긴 녹음테이프. ‘김재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79-11-30’이란 류택형 변호사의 메모가 적혀 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최초 육성 진술이 담긴 녹음테이프. ‘김재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79-11-30’이란 류택형 변호사의 메모가 적혀 있다.
김재규 육성 진술 파일 1

김재규 육성 진술 파일 2

[녹취록 한글파일 다운받기]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다음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진술 육성 테이프와 김정남 선생의 회고록 가운데 일부를 발췌했다.

김재규 그때(1974년 건설부 장관 취임식) 당시에… 가슴에 딱 품고 몸 안에다가 총 메고 갔습니다. 만에 하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변호사 예.

김재규 그때는 혁명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하고 나하고 둘이 그냥 같이 없어지자, 그렇게 해서 없앤다, 생각이었습니다.

변호사 예~.

김재규 여기에 건설부 장관 차를 타고 가는 그 자리가 바로 나하고 대통령 끝내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재규의 육성 테이프는 재판에 앞서 1979년 11월30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찾아간 류택형 변호사와 맨 처음 대화한 내용을 녹음한 것이다. 법정 최후진술과 사형 전날의 유언 등 지금까지 이미 공개된 김재규의 녹취록과 비교할 수 없는 ‘10·26의 생생한 진상’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궁정동의 거사’ 6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 전두환의 보안사로 끌려가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은 김재규는 11월6일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발표 이후 군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류택형 변호사(당시 민주통일당 대변인 겸 인권위원장)는 무작정 교도소로 찾아가 김재규를 만나고 녹음까지 하는 데 성공했다

고문을 많이 당한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해 10·26의 진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녹음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김재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박정희 제거’를 계획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1979년 4월에도 궁정동 안가에서 결행을 모의했다가 박 대통령에 대한 경호 강화 때문에 미뤘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10월26일, 오후 6시 무렵 궁정동 안가에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이 도착하자 예정대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두 여인’으로 불리던 대학생과 가수가 동석해 흥을 돋웠다. 오후 7시40분께 김재규는 옆에 앉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똑똑히 모시라”고 질책한 뒤,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새끼”라며 먼저 한 발을, 다음으로 박정희를 향해 한 발을 쏘았다.

김재규 금년도 9월달에 부산에 계엄이 있지 않았습니까? (※1979년 10월16일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함)

변호사 그렇죠.

김재규 그 이후에 대통령하고 같이 식사를 했어요. 자유당 발언이 있어가지고. 내무장관 최인규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지휘한 혐의로 투옥된 뒤 사형됨)가 발포 명령을 해가지고는.

변호사 다 죽였지요.

김재규 ‘나는 그런 짓 안 한다. 나는 내가 직접 한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 물러가면 그만이지. 나를 사임까지 시키겠느냐?’ 이런 정도의 강경한 분입니다.

변호사 아! 발포 명령을 자기가 하겠다고 그래요?

김재규 내가 직접 발포 명령 한다.

변호사 박정희가?

김재규 예.

유신 말기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하는 일은 중앙정보부 궁정동 본관 및 부장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이 사용하는 구관의 가동·나동·다동(한옥)의 관리와 특히 대통령의 저녁 대소연 행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1974년 8월15일 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진 뒤, ‘황음’에 빠진 박정희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이들 안가에서 주연을 벌이고 주흥을 돋우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되는데, 대행사는 두 명 이상의 여인과 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등 권력자 3~4명이 참석해 벌이는 연회였고,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한 여인만을 불러서 즐기는 밀회를 말한다. 한 달에 대행사가 2~3회, 소행사가 7~8회, 도합 10회 안팎의 대소연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 여인을 공급하는 것도 의전과장의 몫이었다.

당시 의전과장 박선호가 서울 장충동에 있는 요정의 한 마담에게 소개받아 공급한 여인만도 100명을 넘는다. 이런 일에 신물이 난 박선호와 사무관 남효주가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말을 나눈 적도 있었다. 특히 박선호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 김재규에게 여러 번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그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10·26은 나동에서 대행사를 벌이다 일어난 사건인 만큼,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들이 대소연 행사에 대한 집중적인 신문을 펼쳤지만, 박선호의 답변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고, 인간적 타락상이 공개되는 것을 한사코 저지했다. 그는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꼭 “각하께서는 … 하셨습니다”라고 최상의 경의를 표했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았던 김재규가 변호인에게 구술해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박근혜)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김재규 나 하나, 나 지금 현재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요. … 누가 무슨 소리 하더라도 혁명은 성공했습니다.

변호사 알겠습니다. 예예.

김재규 이제는요, 아무리 물리적으로 막아도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오지.

변호사 그렇죠.

김재규 자유민주주의 안 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문제입니다.

김재규의 말대로, 그때 박정희와 3700만 국민의 자유민주주의는 숙명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마민중항쟁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때 박정희가 국민의 광범한 저항과 희생 끝에 물러났다면 오늘처럼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아주 영명했던 지도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박정희 향수’는 그쯤에서 박정희가 죽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향수는 역설적으로 김재규의 ‘10·26 혁명’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인기의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참 묘하게 흐른다.

종합정리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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