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청암선생 기념사업회, 이인석 회장
이인석 <옥천신문> 초대 대표.
생가 복원, 기념관 건립 등 추진
시민 참여 언론학교, 언론문화제도 89년 ‘옥천신문’ 만들어 대표 지내
“우린 청암 진가 너무 몰랐다…
옥천 대표 인물로 세울터” “너무 늦었어요. 우리나라에 이런 언론인은 또 없을 겁니다. 그 엄혹했던 시절에 언론을 바로 세우고, 민주화를 이끌었던 송 선생을 옥천의 대표 브랜드로 내세우고 싶어요.” 기념사업회 이 회장의 바람이다. 이 회장은 1989년 지역에서 <옥천신문>을 창간해 대표를 맡았다. 창간 첫해 이 회장은 당시 <한겨레> 송건호 사장을 옥천으로 초청해 특강을 부탁했다. “(특강 때) 곧고 카랑카랑한 선생의 말씀과 바른 언론에 대한 열정 등을 잊을 수 없어요. 그런 분을 여러 차례 모셔 지역 언론을 일깨우고 좋은 기도 받았어야 했는데 지나고 보면 너무 아쉬워요. 우리가 그분의 진가를 너무 몰랐어요.” 기념사업회는 다음달 21일 송 선생의 기일을 맞아 옥천군 군북면 비야대정로2길 37-1(증약리 331-4) 생가에 ‘참 언론인 송건호 선생 생가터’라는 표지석을 세울 참이다. 이곳은 선생이 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후 서울에서 고교·대학을 나온 송 선생은 1953년 <대한통신> 기자로 시작해, <조선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동아일보> 등을 두루 거쳤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회장,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 등에 이어 1988년 <한겨레> 초대 대표를 지냈다. 그는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한국현대사론> 등 저서 20권을 남겼다. 한국기자협회는 1999년 그를 ‘20세기 최고 언론인’으로 꼽았다. 2001년 발족한 ‘청암언론문화재단’은 송건호 언론상 운영 등 청암의 언론정신을 기리기 위한 여러 사업을 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내년부터 생가를 알리는 거리 이정표, 안내판 등을 설치하고, 생가 복원, 기념관 건립 등도 중장기 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송 선생의 생가는 터 1021㎡, 건물 76.03㎡ 규모인데, 터만 유족이 소유하고 있다. “생가 복원 문제는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 있어요. 얽히고설킨 부분이 있지만 반드시 풀어내야죠. 이미 유족은 터를 기부채납할 수 있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어요.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지어 한국 언론의 사표인 선생의 뜻을 청소년 등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네요.” 기념사업회의 꿈은 정론직필 한길을 갔던 송 선생을 널리 알리고 옥천을 언론 성지로 만드는 것이다. 먼저 중단된 언론문화제를 부활할 생각이다. 옥천 주민 33명은 2000년 8월15일 정지용 시인 동상 앞에서 ‘<조선일보> 바로 보기 옥천시민모임’(조선 바보)을 꾸리고, 이후 전국으로 ‘안티 조선’ 운동을 확산시켰다. 옥천은 이 운동으로 전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2003년부터 해마다 언론문화제를 열기도 했다. “우리의 동력이 모자라 언론문화제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요. 송 선생 기념사업과 함께 언론문화제를 부활하고, 송 선생을 중심으로 옥천을 언론의 성지로 만들려 합니다.” 기자·피디 등 언론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함께 참여하는 언론학교도 만들 생각이다. 이런 학습이 올바른 언론관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다. “지금 이 시국을 보세요. 그나마 제 길 가려는 언론이 몇 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잖아요. 송 선생이 그때 <한겨레>를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역으로 보면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해서 이 지경이 되기도 했죠. 정말 언론이 중요합니다. 좋은 언론은 시민의 참여가 만듭니다.” 기념사업회는 청암언론문화재단, 유족, 옥천군 등과 유기적으로 협의해나갈 계획이다. “송 선생은 지금 옥천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어요. 언론인으로서 민주화 지사로서 저술가로서 그의 가치를 잘 몰라요. 먼저 출발한 청암재단 등과 함께 선생의 얼을 좇아보려 해요.” 옥천/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사진 <옥천신문>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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