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일본의 압력으로 1896년 양력을 도입했다. 일제강점기엔 한국 고유 명절인 설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양력설인 신정만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설날은 천대했다. 민족 최대 명절로 꼽히는 설날이 공식 명칭을 되찾은 건 1989년이 되어서다.
하지만 이제는 신정과 설날 중 어느 날을 집안 명절로 보낼지 결정하는 것은 민족 감정 보단 사회·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2017년 첫째 날을 고향에서 맞는 이른바 ‘신정파’들은 신정을 명절로 쇠면 서로를 배려하면서 실속도 차릴 수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김철원(35)씨는 15년 만에 고향인 부산에서 새해를 맞았다. 김씨는 설날 때마다 부산행 기차표 예매하는데 전쟁을 치렀지만, 올해는 신정을 쇠기로 하면서 쉽게 표를 구했다. 김씨가 올해부터 신정을 고향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제안 덕분이다. 김씨는 “아무래도 결혼한 딸들이 설날보다 쉽게 친정에 올 수 있고, 아들은 설에 아내의 집에 갈 수 있다는 여러 장점 때문에 신정을 쇠자고 어머니가 먼저 제안하셨다”고 설명했다.
2005년 결혼 이후, 10여년 동안 1월1일 아침 차례상을 준비한 정효선(42)씨는 설날 때보다 경제적인 부담이 한결 줄어든다고 설명한다. 그는 “설에는 과일이나 채소 등 차례상 물가가 들썩이는데, 신정에는 그런 부담이 덜하다”라고 했다. 정씨는 또 “결혼한 직후엔 새해 첫 날에 차례를 지내는 것이 낯설었지만, 이제는 설날에 친정으로 가거나 가족들끼리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만족한다”고 설명했다.
설날엔 여행이나 취업 준비를 하고, 신정을 가족과 보내려는 20~30대들도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고향이 전북 정읍인 은수희(36)씨는 지난해 30일 퇴근 뒤, 곧바로 정읍행 버스에 올랐다. 은씨는 다가오는 설에 네팔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 이날 미리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은씨는 “휴가를 길게 내려면 아무래도 직장에 눈치가 보인다”면서 “설 연휴 기간에 2~3일 연차를 더해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대체 휴일까지 합쳐 설 연휴가 4일이다. 경북 영덕에 고향을 둔 취업준비생 오아무개(23)씨는 설날에 친척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피하고, 취업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미리 고향을 찾았다. 오씨는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서 취업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차표를 예매하느라 받는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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