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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노동자 짓밟고 ‘빨갱이’로 몰아”…노동배제 정책 시작됐다

등록 2017-01-01 23:48수정 2017-01-02 08:25

제왕경영 이병철 ‘무노조’ 엄포
휴가없이 하루 12시간 노동해

제일모직 공채 1기 나경일씨
4·19혁명 직후 노조 만들자
사쪽, 3일만에 공장폐쇄 강행
어용노조 만들어 이간질까지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국 규모 노동단체들 없애고
저임금·장시간 노동 밀어붙여
노동운동가는 간첩 누명 씌워

특히 제일모직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지녔던 선대 회장이 대구공장을 돌아보고 있다.1964.7.4
특히 제일모직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지녔던 선대 회장이 대구공장을 돌아보고 있다.1964.7.4
“제일모직 노동운동 당시에 출입했던 그 담당형사 둘이 찾아왔더라고요. ‘좀 가줘야겠다.’ 경찰서 정보과에 있으니까 여자 조합원 최○○씨도 들어오는 거예요. 하룻밤 새우고 아침에 자술서를 쓰라기에 따졌죠. ‘기껏해봤자 제일모직 노동조합 결성하다가 그해 연말에 그만두고 나왔는데 무슨 문제될 게 있냐’고 했죠. ‘여튼 위에 지침이 노동운동한 사람들은 일단 예비검속을 합니다’ 그러더라고요.”(2003년 8월9일 나경일 구술자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나경일(당시 31살)씨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대구 동부경찰서에 끌려왔다. 4·19혁명 직후 제일모직에서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조합원이었던 최씨는 한밤중에 집에 아이들만 홀로 둔 채 붙잡혀왔다. 경찰서 유치장은 초만원이었다. 교도소까지 연락했는데도 수용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그대로 정보과에서 사흘 밤낮을 보냈다. 다행히 나씨는 특무대에 있던 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 혁명재판을 간신히 면했다.

나경일씨 생전 모습
나경일씨 생전 모습

1957년 나씨는 제일모직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이병철이 자본금 1억환(약 2500만원)으로 대구 침산동에 제일모직 공장을 설립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당시 제일모직 근로환경은 열악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한 주씩 번갈아가며 12시간씩 주야간으로 일했다.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특근하고 연차나 생리휴가는 엄두도 못 냈다. 다른 방직회사들은 이미 8시간 3교대하던 시절이었다. 월급도 형편없었다. 대졸 출신 ‘사원’은 월급봉투가 두둑했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공원’은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3년간 공원으로 일했던 나씨는 “명목임금은 매년 조금씩 올랐지만 실질임금은 줄어드는 추세였다”고 말했다.

여성 종합원은 기숙사에 강제 수용됐다. 집이 아무리 가까워도 예외가 없었다. “일요일에도 (기숙사) 사감 허가 없이는 외출하지 못해요. 다 장시간 노동을 위해서죠. 근무시간 이후에 밖으로 내보내면 자기 볼일 보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결근할 경우가 생길 테고. 최대한 노동력을 짜내기 위해서 강제 수용한 거예요.” 지나친 노동강도 탓에 노동자들은 병이 났다. ‘방직공장 만기는 5년, 모직공장 만기는 3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모직공장엔 털먼지가 많아 호흡기 계통, 특히 폐결핵이 많이 생겼다. 병이 나면 쫓아내고 퇴직금도 주지 않았다. 산업재해보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병철은 인자 일본까지 와 있었어요. 미국에서 일본에 건너와 국내 정세 전망하고 있었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제일모직 대구공장에 노동조합 활동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하니까) 동경에서 어떤 지시가 오냐면(요). ‘안 돼. 내가 죽어도 그런 건 못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경영하는 기업에 절대로 노동조합 구성 이런 거 할 수 없어.’ 왕의 명령이 그렇게 떨어졌는데, 그 명령을 거스르면 목이 달아나는데 (노조 와해에) 결사적이죠.”(나경일 구술자료)

1960년 3월15일 장기집권에 눈먼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제일모직도 종업원을 3인조, 5인조로 묶어 투표소로 보냈다. 서로 감시하라는 의미였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솟구쳤다. 회사의 강압적인 통제방식에서 벗어나려면 “하나의 단결된 힘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노조가 필요하다는 의식이 싹튼 것이다. 대구의 3대 방직회사로 불리던 대구방직과 삼호방직, 내외방직에는 이미 노조가 있었다. 그러나 제일모직은 이병철의 무노조 경영원칙 때문에 노조가 없었다.

4·19 혁명을 계기로 노조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회사 쪽은 다급해졌다. 온갖 회유와 공갈, 협박이 이어졌다. 그러나 노조는 그해 5월 깃발을 올렸다. 회사의 탄압은 거셌다. 첫째, 직장폐쇄. 노조 설립 3일 만에 공장 출입문에 ‘공장 폐쇄한다’는 공고문을 붙이고 기숙사생은 24시간 안에 전부 나가라고 통보했다. 공장에 들어가지 못한 노동자 300여명이 잔디밭에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굶은 채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여성 노동자들이 쓰러졌다. 당황한 회사 임원이 중재에 나섰다. “최고경영자의 의사니까 어떻게 하든지 내가 해결해 보겠다. 시간 말미를 달라.” 그 말을 믿고 노동자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회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노조는 경북 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다. 노동위원회는 노조 손을 들어줬다.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일모직 대구공장을 방문했다.(왼쪽) 대통령이 된 뒤인 1965년 9월에도 이 공장을 다시 방문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오른쪽)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일모직 대구공장을 방문했다.(왼쪽) 대통령이 된 뒤인 1965년 9월에도 이 공장을 다시 방문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오른쪽)
둘째, 어용노조. 어용노조를 만들어 놓고는 “노조 간 분쟁으로 작업할 수 없다”며 일부 노동자를 휴직 조처했다. 여성 조합원 400여명이 어용노조 타도를 외치며 농성했다. 노동위원회도 부당노동행위라며 조업 재개를 명령했다. 그러나 회사는 대응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공장 사무실까지 점거하자 회사 쪽이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 200여명이 출동해 1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경찰과 육탄전을 벌였다. “(4·19) 사회 분위기 탓에 경찰이 무지막지하게는 못하더라고요. 회사에서 요청하니까 마지못해 오긴 왔는데. 뇌물을 안 먹은 관리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뿌렸거든요. 관리들은 완전히 종이지. 이병철이라카면 자다가도 쫓아나올 정도로 되어 있었다고요.”

이번엔 계엄군이 비상 사이렌을 울리며 들이닥쳤다. 노동자들이 상황을 설명했다. “회사가 아무 이유 없이 (공장을) 폐쇄해놓고 휴업계를 내놓았다. 이걸 해결하려고 노동위원회에 진정했다. 근데 회사 책임자가 어디 갔는지 행방불명이니까 나타나도록 기다리고 있다.” 계엄사령관이 경찰에 “당장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종업원들이 무슨 죄가 있나. 합법적으로 농성하는데.” 뜻밖의 지지에 노동자들은 힘을 얻었다. 계엄군 헌병은 회사 내에서 경비까지 맡아줬다. 농성은 평화롭게 이어졌다. 회사 쪽도 하는 수 없이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회사는 두 노조를 모두 해산하고 3일 내에 직장 폐쇄를 해제하기로 했다. 대신 조업을 개시하고 40일 내에 단일노조를 다시 결성하기로 했다.

제일모직 노조는 다시 결성됐지만 참여율이 저조했다. 회사의 당근과 채찍 정책 때문이었다. 회사는 ‘장미상조회’를 만들어 회원들에게 무이자 대출 등 특혜를 베푸는 반면 조합원들은 사규에 어긋나면 사정없이 해고했다. 노조는 최후의 수단으로 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12월20일 파업은 몇 시간 만에 공권력에 의해 진압됐다. 회사는 파업 참가자를 업무방해죄로 고발했다. 고발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노조 간부들은 회사를 떠났다. 제일모직 노조는 깃발을 내렸다.

이병철의 ‘무노조 원칙’은 박정희를 만나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70년대 20%를 넘었던 노조 조직률은 해가 갈수록 떨어져 지금은 반토막에 불과하다.
이병철의 ‘무노조 원칙’은 박정희를 만나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70년대 20%를 넘었던 노조 조직률은 해가 갈수록 떨어져 지금은 반토막에 불과하다.
이병철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인정할 수 없다”는 무노조 선언은 1987년 경영권을 승계한 이건희 회장을 거쳐 오늘까지 이어진다. 1960년 제일모직 첫 노조를 와해했던 그 전략도 여전히 살아숨쉰다. 2012년 1월에 작성된 ‘2012년 S그룹 노사전략’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보면 “신규노조 내부 분열 유도” “노조 설립 주동자들을 즉각 징계하기 위해서는 평소 문제인력들의 사규 위반사항을 채증, 필요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함” “불가시 친사노조 설립 판단 후 교섭을 진행하며 고사화 추진”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심상정 의원(정의당)이 이 문건을 2013년 10월에 공개했는데 법원은 삼성그룹이 작성한 것으로 판단했다.

“68년도 봄에 (한국나일론) 공장 작업환경이 열악했어요. 평균 실내 온도가 38도, 40도 가까이 되고 습도도 높아서 찜통 같은 밀폐된 환경에서 노동을 하는 거야. 임금이 또 완전히 최저임금이 채 안 될 정도로 아주 열악하고. 통째로 착취하는 그런 상태더라고요. (내가 노조) 경험자니까. 젊은 친구들이 찾아와 자문을 구하는 거지요. 근데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 터져 남산(중앙정보부)에서 취조를 받았는데 (나로 인해) 또 노동조합 주동했던 사람들 몇 사람이 곤욕을 치렀어요.”(나경일 구두진술)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노동집약적 수출공업화 전략을 채택했다. 이를 위해선 노동자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유지해야 했다. 이에 출범 직후부터 노동운동을 철저히 통제했다. 우선 모든 노동쟁의를 금지하는 계엄사령부 공고 제5호를 발표했다.(경제질서회복에 관한 특별성명)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령 제6호로 노동 4법의 효력을 정지하고 전국 노동단체를 모두 해산했다. 3개월 만에 노조 재조직을 허가했지만, 새로운 한국노총은 군사정권의 계획과 지시 아래 조직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 속에서도 나씨는 제일모직에서 노조를 결성하며 만난 사람들과 계속 인연을 맺었다. 이들은 한국노총을 어용노조라고 보고 민주노총 건설을 시도했다. 경제학자 권혁재씨 등과 함께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1968년 중앙정보부는 권씨 등 13명을 불법구금하고 간첩으로 몰아갔다. ‘전략당 사건’이다. 법원은 2015년 2월, 재심에서 46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지만, 권씨는 69년에 이미 사형당했고 나씨도 같은 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전략당 사건 피해자 13명 가운데 처벌 수위가 낮은 편이었지만 나씨는 더이상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6·3 한일수교 반대운동’ 등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74년 5월 인혁당 사건으로 또다시 감옥에 갇혔다. 8년8개월 복역한 뒤 82년 12월 출소했지만 24시간 감시와 ‘빨갱이’라는 오명만이 그를 기다렸다. 자녀들(1남3녀)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간첩 자식’이라는 손가락질까지 견뎌야 했다. 나씨는 고문후유증과 싸우다 2010년 7월12일 세상을 떠났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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