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2017 광장의 노래]
2부 우리안의 박정희들-대구이데올로기의 탄생
■ 대구 40대 4명 솔직 인터뷰
2부 우리안의 박정희들-대구이데올로기의 탄생
■ 대구 40대 4명 솔직 인터뷰
<한겨레>는 대구에서 학교를 나와 직장에 다니는 ‘대구 남자’ 4명을 지난 5일 대구 수성동의 한 맥줏집에 만났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대구의 정서가 궁금해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있는지도 관심사였다. 김기한(41·직장인), 김창규(41·사업), 김승필(41·사업), 이아무개(40·직장인)씨는 학교와 사회에서 만난 친구 사이지만 정치적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보수와 진보의 스펙트럼을 1에서 10으로 둔다면 승필씨는 1~2(보수), 기한씨는 4~6(중도 보수), 창규씨는 6~7(중도 진보), 이씨는 9~10(진보)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들은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해선 한목소리로 비판하며 대통령 탄핵에도 찬성했다. 하지만 박근혜의 실패가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어떻게 평가하나?
김승필 내 책상 위엔 박근혜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올려져 있다. 최순실 게이트 터지고 나서 그걸 뒤집어버렸다.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요즘은 박근혜가 티브이(TV)에 나오면 목소리도 듣기 싫고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 박정희의 얼굴에 먹칠한 게 가장 속상하다.
김기한 대구는 박정희를 좋아해서 그 딸도 유능할 것이라고 믿고 뽑았는데, 무능의 끝이니까 창피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선실세로 국가 시스템이 다 붕괴된 것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김창규 정국이 불안해서 빨리 내려왔으면 하면서도 그러면 명예로운 퇴진이 되지 않나. 반드시 탄핵해 불명예스럽게 끌어내려야 한다.
이아무개 서울 본사에 가면 ‘너네(대구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싸잡아 비판한다. 억울하다. 나는 아닌데 그렇게 보이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대구의 ‘친박 정서’는 여전하다. 대구에서 한명, 한명 물어보면 30%는 될 것이다. 박근혜가 지역구 의원으로 나와도 당선될 것이다.
김승필 새누리당 당원들과 네이버 밴드를 하는데 어르신들이 청문회에 나온 하태경 의원(바른정당)을 잡아죽이라고 난리다. 오직 박근혜만 외치고 있다. 나도 실망했다는 글을 올렸다가 십자포화를 받았다. 젊은놈이 뭘 안다고 떠드냐고.
김기한 대구 사람이 ‘박근혜가 싫다’고 말해도 앞의 수식어가 빠져 있다. ‘대통령’ 박근혜일 수도 있고, ‘지금의’ 박근혜일 수도 있다. 무능하든, 어리석든 박근혜가 최순실에게 휘둘린 것이라고 드러나면 대구 사람은 다시 회귀할 것이다.
김창규 대통령은 탄핵되더라도 대구로 내려와 달성(구)에 집 한 채 짓고 살면 된다. 그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대통령님’ 하면서 보호하며 살 것이다.
이아무개 사무실 앞에 밥집이 있는데 벽이 온통 박정희·박근혜 사진으로 도배돼 있다. 박근혜도 그분의 딸이니까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다. 경제발전과 독재라는 공과 과 중에서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엇갈린다. 나는 박정희 덕분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주장은 우리 국민을 너무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의 자질이라면 상식적인 사람이 선출돼 힘을 모아 같이 갔다면 충분히 이뤄낼 수 있는 성과들이었다. 경제적 성과가 지금의 80%만 되었더라도 독재 시절이 없었다면 더 나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김승필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이순신과 안중근, 그리고 박정희다. 공과가 있지만 과는 불가피했다고 본다. 내 사무실엔 박정희 자필로 쓴 ‘내 일생과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가 걸려 있다. 파독 광부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거지로 살아도 우리 애들한테는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 그는 10년, 20년을 내다보며 나라를 만든 지도자였다. 필리핀은 미국 원조를 받아서 호텔을 지었지만 박정희는 포철을 짓고 자동차와 조선업을 육성했다. 이런 정책은 단기간엔 달성하기 어렵다. 목표는 10층짜리 빌딩을 짓는 건데 기초공사만 2, 3년 걸린다. 이제 겨우 2층 올렸는데 정권이 교체되면 완성이 불가능하다. 국가 미래를 위해 장기집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땠는지 모르면서 무조건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제대로 알고 나면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 싶다.
김기한 박정희의 미담을 어릴 때부터 많이 듣고 자랐다. 대구는 전두환 전 대통령도 좋아했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의 차이는 육영수 여사와 이순자 여사의 차이다. 이순자를 흉보는 사람은 많지만 육영수는 여전히 존경받는다. 이미 박정희 부부는 신화가 돼버렸다.
진보서 보수로 승필씨
“박근혜가 무능하다고 해서
박정희 폄하할 이유 업어” 중도보수 기한씨
“대구는 거리서 해병대 옷 입고
교통 정리하는 어르신과 같아” 중도진보 창규씨
“한 달 2번 부모님댁에 가는데
뉴스하면 집 나와…다투기 싫어” 진보 이씨
“박정희 지지 철회되려면
잘못한 일 더 많이 까발려져야” 대구에서 “폐쇄적”으로 자라난 대구 남자 3명(기한, 창규, 이씨)은 대학 입학 때까지 “김대중은 빨갱이”이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폭동을 전두환 장군이 제압한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1997년 첫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찍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뽑힌 뒤 98년 1월 입대한 기한씨는 “적화통일이 될까봐” 불안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이 ‘국민과의 대화’를 하는 걸 보면서 그 편견이 깨졌다.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대북 정책도 급진적이지 않고 햇볕정책도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경제지식도 탁월했다. 그동안 들은 얘기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다르게 생각해봐야겠구나 싶었다.” 창규씨는 대구 자동차가 전라도 주유소에 가면 ‘김대중 만세’를 불러야 기름을 넣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학 선배들을 만나며 지역감정의 덫에서 빠져나왔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고속도로가 88고속도로인데 그 도로가 수십년간 편도 1차선이었다. 지난해 3차선으로 확장했다. 소백산맥으로 나뉘어 영호남이 서로 교류가 없으니까 정권 얘기를 검증 없이 믿으며 오해와 편견이 쌓였다.” 교환학생으로 전남대에서 1년을 보낸 이씨도 영남 정권의 민낯을 목격했다. “너무나 열악했다. 같은 국립대인데 이렇게 다르구나, 호남이 소외돼 왔구나 알았다. 특히 회사에 입사해 서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내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쳤다.” 반면 승필씨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김대중(1997)-권영길(2002)-이명박(2007)-박근혜(2012)를 찍었고 지금은 새누리당 책임 당원이다. “정권교체를 꿈꾸며 김대중을 뽑았고, 가장 옳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권영길을 찍었다. 하지만 진보가 실현 불가능한 주장을 남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본주의는 누군가를 밟아야 올라갈 수 있는 사회다. 목표 부분까지 올라가야 밑의 계층을 보듬어줄 수 있는데 (진보는) 올라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개혁적인 대통령만 나오면 뭐가 바뀔 줄 안다.” -박근혜에 대한 실망이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질까?
김승필 박근혜를 싫어한다고 좌쪽으로 가는 사람은 없다. 박근혜만 싫어하는 것이다. 내가 박정희를 존경하는 이유는 사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한 일을 좋아한다. 박근혜가 무능하다고 해서 박정희의 업적을 폄하할 이유가 없다.
이아무개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철회되려면 그가 잘못한 일이 더 많이 까발려져야 한다. 최근 김종필씨의 인터뷰와 같은 것들이 더 나와야 한다.
김기한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했는데 집권 말기에 사람들이 엄청 싫어하니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퇴임하고 나서 노무현의 인기가 살아났다. 박근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잠시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새누리당 경북 의원들이 탈당하지 않는 이유다. 대구 민심은 쳇바퀴를 맴돌 뿐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구가 보수적인 도시라는 데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는 나이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가부장적 문화를 그 이유로 꼽았다. “자녀가 30~40대가 돼도 집안 여론은 60~70대 부모가 주도한다. 우리 사촌들도 (지난 대선 때) 누구 찍었냐고 물어보니까 부모님이 1번 찍으라고 해서 다 그렇게 찍었다고 하더라.” 창규씨의 진단도 비슷했다. “60대 이상은 거의 90%가 ‘꼴통 보수’다. 50대부터는 반반 정도 되고 40대 이하는 진보적 성향이 더 많다. 지난 대선 때 대구에서 박근혜 지지율이 80%가 넘었는데, 20~30대가 투표를 잘 안 하니까 그랬을 뿐이다.” 기한씨는 대구를 “길거리에서 해병대 옷을 입고 교통정리 하는 어르신”과 비교했다. “그분들은 해병대가 내가 가진 유일한 자산이라서 그걸 내세우는 것이다. 대구가 대기업도 없고 사고도 잦고 살기 힘드니까 정계 주류가 대구 출신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 기득권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얼마 전 어머니가 세월호 이야기가 이제는 지겹다고 해서 ‘손녀딸이 그럴 수도 있는데’라고 반박했다. 어머니 대답은 ‘우리한테는 그럴 일이 안 생긴다’는 거였다. 대구 사람들은 다른 지역이 경험한 불행을 자신들은 겪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구의 보수성은 계속될까?
김창규 60대 이상이 다 돌아가실 때까지 앞으로 30년은 유지될 것이다. 인구가 고령화되지 않나. 한 달에 두 번씩 부모님 댁에 가는데 9시 뉴스 시작하기 전에 집에서 나온다. 뉴스를 같이 보면 자꾸 부모님과 싸우는데 그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게 싫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 성향을 따라갔듯이, 내 아이들은 나를 닮아간다.
김승필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하는 이유는 인생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젊을 땐 세상이 뒤집힐 줄 아는데 살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진보 쪽에서 변화와 열정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보수로 변할 수밖에 없다. 비빔밥처럼 다양한 맛이 필요한 것이다.
김기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진보, 보수가 아니라 상식, 비상식의 문제다. 그래서 이번 일로 보수층이 변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아무개 민주당이나 국민의당도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기득권층이다. 국민이 가만히 있는데 기득권층이 알아서 개혁하지 않는다. 방법은 경쟁뿐이다. 물이 고여 썩지 않으려면 정권 교체를 자주 해야 한다.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선) 야당이 대구에 후보를 내지 않기 때문에 선택하고 싶어도 찍을 수가 없다. 주위가 다 빨간색(새누리당)이니까 다들 그렇게 물드는 것이다.
대구/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대구 토박이’ 4명이 지난 5일 대구 수성동 한 맥줏집에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대구의 정서를 말하고 있다. 이들의 토론은 5시간이나 이어져 밤 12시가 훌쩍 넘어 끝났다. 왼쪽 앞부터 시계방향으로 김기한, 이아무개, 김창규, 김승필씨.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박근혜가 무능하다고 해서
박정희 폄하할 이유 업어” 중도보수 기한씨
“대구는 거리서 해병대 옷 입고
교통 정리하는 어르신과 같아” 중도진보 창규씨
“한 달 2번 부모님댁에 가는데
뉴스하면 집 나와…다투기 싫어” 진보 이씨
“박정희 지지 철회되려면
잘못한 일 더 많이 까발려져야” 대구에서 “폐쇄적”으로 자라난 대구 남자 3명(기한, 창규, 이씨)은 대학 입학 때까지 “김대중은 빨갱이”이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폭동을 전두환 장군이 제압한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1997년 첫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찍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뽑힌 뒤 98년 1월 입대한 기한씨는 “적화통일이 될까봐” 불안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이 ‘국민과의 대화’를 하는 걸 보면서 그 편견이 깨졌다.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대북 정책도 급진적이지 않고 햇볕정책도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경제지식도 탁월했다. 그동안 들은 얘기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다르게 생각해봐야겠구나 싶었다.” 창규씨는 대구 자동차가 전라도 주유소에 가면 ‘김대중 만세’를 불러야 기름을 넣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학 선배들을 만나며 지역감정의 덫에서 빠져나왔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고속도로가 88고속도로인데 그 도로가 수십년간 편도 1차선이었다. 지난해 3차선으로 확장했다. 소백산맥으로 나뉘어 영호남이 서로 교류가 없으니까 정권 얘기를 검증 없이 믿으며 오해와 편견이 쌓였다.” 교환학생으로 전남대에서 1년을 보낸 이씨도 영남 정권의 민낯을 목격했다. “너무나 열악했다. 같은 국립대인데 이렇게 다르구나, 호남이 소외돼 왔구나 알았다. 특히 회사에 입사해 서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내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쳤다.” 반면 승필씨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김대중(1997)-권영길(2002)-이명박(2007)-박근혜(2012)를 찍었고 지금은 새누리당 책임 당원이다. “정권교체를 꿈꾸며 김대중을 뽑았고, 가장 옳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권영길을 찍었다. 하지만 진보가 실현 불가능한 주장을 남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본주의는 누군가를 밟아야 올라갈 수 있는 사회다. 목표 부분까지 올라가야 밑의 계층을 보듬어줄 수 있는데 (진보는) 올라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개혁적인 대통령만 나오면 뭐가 바뀔 줄 안다.” -박근혜에 대한 실망이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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