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사태’로 연인원 1천만명이 촛불을 들며 한국 사회는 30년 전 ‘민주주의의 여명기’를 자주 떠올리고 있다. 그해 1987년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 도중 사망했고, 들끓던 시민항쟁 도중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실신해 숨졌다. ‘6월 항쟁’이 일자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된 노태우는 ‘6·29 선언’을 통해 시민들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의 농성을 시작으로 ‘노동자 대투쟁’이 일었고, 대한항공 858기가 폭파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한국전쟁 이후 사상 첫 집단 탈북이라 할 김만철씨 일가족이 탈북한 것도 이해다. 당시 박종철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따뜻한 남쪽 나라’인 인도네시아로 가려던 김씨 가족을 어떻게든 남한으로 데려오려했다. 김씨 가족의 남한행을 고문치사 사건을 덮으려는 ‘군사정권의 기획입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들이 한국으로 온 지 꼭 30년. 사생활 노출을 꺼려 그간 언론 접촉을 피해왔던 김씨는 지난해 8월 자신이 속한 종교단체를 통해 탈북 과정과 그동안의 남한 생활을 구술해 책으로 펴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야음을 틈타 목숨을 걸고 북한 청진항을 떠난 지 정확히 30년이 흐른 지난 15일 경기도 부천 승리제단(영생교) 사무실에서 김만철씨를 만났다.
-30년 동안 살아온 남한은 정말 ‘따뜻한 남쪽 나라’였습니까?
“남한에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정도교육, 인성교육을 잘 안 하는 거 같아요. 과학자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는 걸 앞세우지 못한달까. 북한에선 대학을 졸업할 때 자기 분야에 가서 먼저 노동을 한 뒤에야 일할 수 있다 이런 게 있거든. 선반공을 3~4년 해야 설계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고. 현장경험 있어야 한다는 건데 여긴 대학만 졸업하면 노동하기를 싫어하더라고. 의사가 되려면 의사 이전에 사람이 된 다음에 의사가 되어야 하고. 교수도 마찬가지고. 남한에서 내가 사기를 많이 당해서 그런가, 그렇더라고.”
꼭 30년 만이다.
30년 전 이날(1987년 1월15일) 자정을 넘긴 시각 김만철(76)씨는 처가 식구를 포함해 10명의 가족을 경비정 ‘청진호’(50t급)에 태운 채 북한 청진항을 떠났다. 해안 경비를 서던 보초들은 모두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시속 70노트인 간첩공작선(30t급)보다 최고 속도가 절반밖에 되지 않는 청진호를 몰아 어떻게든 빠른 시간 안에 200마일 밖 공해상에 도달해야 했다. 꼬박 밤을 새워 달렸다. 아내와 배의 기관실을 맡은 작은처남만 이 탈출 계획을 알고 있었다. 선실에서 잠든 나머지 가족들은 그저 인근 등대섬에 식량을 가지러 가는 줄 알았다. “골수 빨갱이”인데다 애인이 있던 큰처남(최정섭·당시 27살)이 알았다간 분명 난리 법석을 떨 것이 뻔했다.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총포사격이 불가능한 공해상으로 나가야 했다.
지난 15일 경기도 부천 승리제단(영생교) 지하 예배당에서 예배 중인 김만철(맨 앞)씨. 김씨는 남한으로 온 지 14년째 되던 2001년부터 이곳 영생교의 신도 생활을 해왔다. 부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가 탈출을 생각한 건 10년도 더 전이었다. 1975년께 막냇동생이 반동분자로 몰려 총살당한 이후 줄곧 생각해왔던 일이었다. 첫 탈출 시도는 1977년. 청진의대병원 내과의사였던 김만철씨는 백혈병 연구차 러시아 모스크바에 간 길에 동독행 열차를 타려다 승강장에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걸렸다. 함께 탈출해야 했다. 7년 뒤인 1984년 8월 그는 인근 특수부대의 군 병원으로 자원했다. 원래 군의관은 맡지 않는 직일관(당직사령)을 자청했다. 직일관을 설 때마다 보초들에게 술을 먹이고 자신이 보초를 섰다. 2년 동안 반복했다. 그가 직일관을 서는 날 보초들은 으레 술을 기대하게 됐다. 경비정 청진호의 정장을 구슬려 배의 기름탱크도 미리 개조했다. 다른 배보다 5배나 기름을 더 넣을 수 있게 됐다. 신이 난 정장이 그에게 항해법을 가르쳐줬다. 일부러 밤마다 연습 삼아 배를 몰아 탈출날 의심의 여지를 없앴다. 인근 레이더 기지의 근무 상황도 미리 확인해뒀다. 무인도에 정착하게 될 상황을 감안해 각종 씨앗도 챙겼다. 집 안 책장 서랍엔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넣어두었다. 김만철 일가족의 탈출은 그야말로 오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계획된 희대의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30년.
70대 후반의 나이가 된 그를 경기도 부천의 승리제단에서 만났다. 그는 17년째 이곳의 신도로 있다. 이날 그는 건물 지하 예배당에서 열린 예배에 참석했다. 까무잡잡하고 광대뼈가 불거졌던 얼굴엔 30년 사이 주름이 패고 머리는 희끗해져 있었다. 영상을 통해 흘러나오는 조희성 교주의 설교를 들으며 그는 연신 고개를 떨궜다 치켜들었다. 2시간가량의 예배 뒤 만난 그의 말투엔 여전히 북한 말씨가 남아 있었다.
“인민들도 소리칠 수 있구나”
-오늘(15일)이 북한을 탈출한 지 정확히 30년 된 날이네요.
“그렇네. 오늘이 도망친 날이네. 묘하게 됐구먼. 난 거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날도 되게 추웠어요, (영하 10도 안팎에 한파특보가 내린) 오늘처럼. 영하 30도라 거기(청진)가. 바닷가에 살얼음이 쳤어. 파도 잔잔한 데는 언다고요. 그날도 밤에 눈이 왔는데 낮엔 날이 맑아졌지.”
-그날 밤 대한해협쯤에서 높은 파도를 만나 엔진이 고장났고 표류하다 일본으로 밀려갔지요? 일본 후쿠이 외항에 도착한 게 1월20일, 탈출 5일 만이었습니다.
“마침 식수도 없어져서 표류 사흘쯤 되니까 애들이나 어른이나 갈증이 나서 난리가 났지. 한데 일본에 들어가면 죽게 될 거라 생각했어요. 당시만 해도 일본이 악질이라고 들어서 걱정이 태산 같았거든. 그런데 항구 근처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우릴 해적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나중에 통역관 통해서 상황을 파악한 뒤엔 호의적으로 대해줬어요.”
30년 동안 살아온 남한은
어떻게 살지 가르치지 않는다
북한에선 학자가 되기 전
인간이 되라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사태 보며
이게 정말 자유다 싶었다
북에선 비판 상상도 못해
87년에도 ‘희한하게’ 느껴
-우여곡절 끝에 남한으로 오게 됐어요. 당시 남한행에 처남들의 반대가 심했다던데.
“일본에서 어찌하다 대만으로 갔는데 김신조랑 이웅평이가 우리를 찾아왔어요. (김신조는 1968년 1월21일 30명의 남파 무장공작원들과 청와대를 기습했다 생포됐고, 이웅평은 1983년 2월25일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그(이웅평)가 우리 맏이놈하고 처남 둘하고 원탁에 빙 둘러앉아서 얘기하는 거야. 가만 들으니까 이웅평이가 답답하니까 ‘보라고’ 그러면서 자동차 키를 두 개인가 세 개 꺼내놓으면서 ‘난 남한에 와서 개인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이러는 거예요. 갸들은 그날 거기서 대화하면서 이웅평이한테 녹았어.(웃음) 그래도 결정은 내가 하는 거니까. (그 대화 이후) 남조선으로 가는 걸 반대를 안 했어 이것들이. 확실히 뭐든지 실물적인 거야.”
-인생의 거의 절반씩을 북과 남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이는 매우 드문데요. 최근 한국의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대통령 비판하는 거, 이게 정말 자유지 뭐가 자유인가 싶었지. 북한에서는 자기네 대통령은 절대적인 하나님보다도 더 우상화돼 있는 존재라, 그걸 비판한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일이거든. 붙잡히면 영락없이 총살 맞는 거고. 그런데 여기는 민주사회니까, 참 체제가 좋기는 하다, 이 남한 사회가. 이게 자유다 그랬지. 김정은 파헤치면 박근혜보다 훨씬 더 부정이 많을 거야. 이 세상에서 살 수 없는 놈이 될 거요, 틀림없이. 기본적으로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들 싹 잡아죽인 것부터 시작해서. 우상화 안 한다고 죽이고, 졸았다고 죽이고.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냐 말이야.”
지난 15일 경기도 부천 승리제단(영생교)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김만철씨. 오랜 기간 언론 접촉을 꺼려온 김씨는 지난해 8월 본인의 탈북 과정과 남한 생활을 담은 책(<김만철 선생 탈북스토리-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을 그가 몸담고 있는 승리제단의 출판사를 통해 펴냈다. 부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당시에도 전두환 정권이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당신 가족을 무리해서 데려왔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난 박종철이 누군지 몰랐으니까. 병원 지어준다 그런 얘긴 있었는데…. 다만 그때도 ‘인민들도 소리칠 수 있구나’ 희한하게 느껴지긴 했어요.”
-30년 전 입국 시점의 한국 상황도 어찌 보면 지금과 비슷했습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이 있었고, 전두환의 호헌 선언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거쳐 이룬 민주주의가 지금 역행하고 있으니까요.
“북한엔 닭장차 경찰차 이런 거 없거든. 길에 나서 데모하는 놈 있다 하면 기관총 사격해서 다 잡아버리지. 그건 김일성 시대부터 그랬어요. 신의주 학생들이 들고일어났을 때(1945년 11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비행기로 기총사격했고, 검덕광산 사건이라고 있는데 거기도 다 기관총으로 몰살시켜버렸어요. 재판 같은 거도 없어. 재판 자체가 민주화된 거거든. 그러고 나니 데모 같은 게 있나. 그거만 보더라도 남한이 살기는 참 자유롭다 그리 봐진 거지. 말을 지 맘대로 하는 거이 얼마나 자유냐 말이야. 북한에선 ‘김정은이 죽일 놈’ 그랬다간 들키면 총살일 텐데.”
남겨진 가족들은 짐승처럼
김만철씨 가족은 우여곡절 끝에 남한 정착을 마음먹었다. 입국 1년여쯤 지나 그에게 국립보건원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특임연구원 자리가 주어졌다. 애초 전두환 대통령이 “차려준다”던 병원은 “남파간첩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며 유야무야됐다. 5~6년간 이곳으로 출퇴근하며 그는 북한 의학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미군에 전달하는 일을 했다. 각종 강연도 다녔다. 의학 관련 강연도 하고 교회 연단에서 북한 생활을 설명했다. 강연 수입이 적지 않았다. 대형교회에선 1회 강연에 500만원을 주기도 했고 미국에서 강연 요청이 오기도 했다. 한때 10억원까지 재산을 불렸지만 이후 여러 차례 사기를 당해 재산을 거의 날려야 했다. 10여년 전부터는 경기도 광주의 한 야산에 컨테이너 집을 짓고 살고 있다.
-1982년 한국으로 망명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 1997년 경기 분당 자택 인근에서 남파간첩 손에 암살당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걱정되지 않던가요?
“이한영은 본인 혼자 자유롭게 다니다가 그렇게 됐는데, 나는 아예 혼자 다닐 수가 없었어요. 어딜 가나 경찰이 한둘씩 계속 같이 다녔던 터라 특별히 위협을 당한 적도 없었어요. 남한에 오고 처음 1년 가까이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의 안가에서 같이 살았고 서울 송파구로 이사한 뒤에도 경찰이 거의 항상 붙어 있었어요. 집에 같이 있기도 하고, 경찰이 퇴근해서 자기 집에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하고. 집사람은 여자 경찰이, 난 남자 두 명이 따라다녔죠.”
-북에 남겨진 가족들 소식은 들어봤나요?
“우리 넷째 누님 자식들, 조카들이지. 6~7년쯤 전에 걔네가 북한에서 넘어온 거를 내가 중국에 가서 데려왔어요. 여조카 하나, 남조카 하나. 조카가 내려와서 하는 말이 삼촌 때문에 가족들 당시에 다 쫓겨나서 산골로 흩어졌다고. 짐승처럼 살다가 이제 겨우 모여 산다고 했어요. 그외엔 형제들 소식은 못 들었지. 그거 말고는 우리 애들 학교 동창들이 오고 청진 사람도 남한으로 와서 소식 들었는데, 내가 북한에서 죽일 놈이 돼 있다고 하더라고요.”
-큰처남이 북한에 약혼녀를 두고 왔는데, 큰처남도 연락을 못했는지요?
“할 수가 없었지. 방법도 없고. (요즘엔 많이들 연락한다던데?) 최근에 넘어온 사람들은 거의 다 연락이 되는 거 같더라. 거기 보위부에서 감시하긴 하지만, 산 같은 높은 데 올라가면 휴대전화가 터진대요. 그래서 전화가 그짝에서 온대, 남한 전화번호로. 그렇게 연락해서 북한에 돈 보내는 사람 많아요. 근데 우린 너무 오래전이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탈북 당시 이미 남한에 정착해 있던 큰누나를 포함해 3남5녀 중 여섯째였던 김만철씨는 막냇동생의 총살을 계기로 북한 탈출을 결심했다. 평양과 청진으로 떨어져 살았던 터라 유학을 갔는지도 몰랐던 막냇동생은 1975년께 러시아에서 강제 소환돼 한 달도 못 돼 총살됐다. 현지 동료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불평하고 드러내놓고 비판한 죄였다. 동생의 죽음 이전 김만철 가족은 일제 강점기 아버지의 항일 공로가 인정돼 북한에선 좋은 성분으로 인정받았다. 그 역시 북한에서 평양의대 다음가는 청진의대의 교수였다. 하지만 동생의 총살 직후 반동분자의 가족으로 몰려 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나고 의사 직함도 빼앗겼다. 동생의 죽음과 연좌제의 부당함을 겪은 그는 이때부터 북한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막냇동생에 대한 기억은 그를 지금 이곳까지 끌고 온 원동력이었다.
1987년 2월8일 특별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김만철씨 가족 일행의 모습. 연합뉴스
동생의 죽음 뒤 강등된 신분
-죽은 막냇동생과는 가까웠나요?
“나이 차이가 7~8살가량 났어요. 늘 어린애로 생각되잖아요. 한데 이 아가 내 있는 데서 늘 멀리 떨어져서 살았어요. 학교 댕기는 것도 평양 누님네 집에 가서 댕겼고. 평양미대를 다녔는데 누님이 보내줘서 누님 덕에 간 거거든. 거기 졸업하고 미술가 동맹인지 거기 있었지. 다들 (신라시대 천재화가) ‘솔거’ 못지않다고 했어요.”
-동생이 총살된 건 어떻게 알게 됐나요?
“여기로 치면 안기부에 해당하는 북한 보위부에 아주 절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어느 날 ‘동철(막냇동생 이름)이 외국에 유학 갔다 잽혀왔다’고 하길래 ‘어떻게 됐냐’ 그러니까 ‘모르겠다, 그다음에는’ 그러더라고요. 근데 얼마 안 있다 총살됐다 그러더라고. (총살 전에 어쨌든 소식을 들었던 거군요?) 네, 붙잡혀 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요. 한 달도 못 가서 총살해버렸으니까.”
-동생의 죽음 뒤 신분이 강등됐다고?
“내가 대학병원 내과 진단학 교수 겸 의사였어요. 대학에선 내가 강좌장(학장)이고. 병원에선 부과장이야. 그런데 어느 날 병원 당비서가 나를 부르더라고. 학장 비서가 부를 땐 많아도 병원 당비서는 잘 안 부르거든, 의료사고 없이는. 근데 병원 당비서가 ‘동무는 오늘부터 부과장직 하지 마세요’ 그래요. ‘왜 그럽니까’ 그러니 ‘통보 못 받았냐’ 그러면서 병원에 주둔한 보위부에 가서 책임자 만나보라 그래요. 그래서 갔더니 그 사건 알려주면서 ‘당신 동생이 사형됐으니까 당신은 우리 혁명에서 제외된 인물이다’ 이렇게 말해줘요. 반동분자 딱지가 붙은 거죠. 그래서 강좌장 하던 것도 다 내놓고 평의사로 돼버린 거지, 교수도 못 하고. 교수는 북한에선 교원이라 부르는데, 후대를 교육하는 선생이기 때문에 혁명의 제일인자로 본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성분 나쁜 놈은 선생을 못 해요. 게다가 내 직계가족이 그랬으니까 특히 더 그렇지. 하루아침에 반동분자 된 거죠.”
-지금 시점에서 북한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아는 사람들도 보고 싶고 형제간들도 보고 싶고 그런데. 특별히 애착이 가는 건, 참 없이 살고 곤란하게 살았지만 추억이 남아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어요. (잠시 말을 멈춘 김씨에게 ‘어떤 기억이 있느냐’고 재차 물었다.) 고향 산천이지 말하자면. 그러니까 내가 가만 생각해본다니까 늘그막에 와선. 왜 짐승들이 죽을 때가 되면 자기 태어난 곳으로 가서 죽느냐 이런 걸 생각해보니까 사람들 역시 그런 심정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글쎄 꼭 거기 가 죽는다기보단 거기가 한번 가보고 싶다. 이런 생각은 들어요.”
-통일되면 청진에 가보셔야지요?
“아 당연히 가봐야지. 당연히.(웃음)”
오랜 기간 언론 접촉을 꺼려온 김만철씨는 지난해 8월 본인의 탈북 과정과 남한 생활을 담은 책(<김만철 선생 탈북스토리-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을 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승리제단(영생교)의 출판사를 통해서였다. “승리제단의 발전과 구원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현재 영생교의 신도회 부회장으로 있다. 남한으로 온 지 14년째 되던 2001년부터 드나들기 시작했다. ‘고향 친구’ 김신조의 전도로 다니던 교회에 점점 소홀해지던 때였다. 그가 영생교에 나간다고 하니 사기당해 재산 잃은 충격에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는 말도 나왔다. 신학대학원까지 다니며 개신교 신앙을 믿었던 사람이 어쩌다 영생교에 몰두하게 됐을까.
“난 자본주의 생리에 어두웠고, 돈이 귀한지도 잘 몰랐어요. 고향 떠나와서 살자니 여러 가지로 마음이 공허했고. 마침 김신조가 와서 교회 다니니 좋다고 해서 다닌 거지. 근데 잘 믿어지지가 않더라고. 2년 정도 서울 청파동에 있는 대학원도 다녔는데 아무래도 의대 출신이라 그런지 기독교 공부가 잘 안 돼요. 교수들한테 질문해도 답변을 잘 못 하는 거야. 인간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예수만 독생자라고 하니 그거 모순되지 않나 그랬지. 교수들이 다 목사라 그런지 ‘안 보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식이었어요.”
“영생교는 과학이다”
-영생교는 다르던가요?
“처음엔 아는 사람 인연으로 오게 됐는데 여긴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라 하더라고. 누구를 믿는 데도 아니라고 하고. 여기선 피가 변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데, 원래 피가 맑아야 혈액순환이 잘되잖아요. 사람 마음이 변하면 피도 변하거든. 악한 마음 먹으면 피가 썩고. 피도 세포라 죽고. 그러면 열흘 살 거 이틀 살고 그런 거라. 마음가짐이나 정신상태가 바르면 피가 맑아지고 남을 돕고 악한 짓 하지 않으면 오래 사는 거지. 이런 게 과학이라는 거예요. 이런 거 듣다 보니 우리 주님(조희성 교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가히 틀리지 않는다 이거야. 처음엔 곧이들리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 경험해보니 이치가 맞고 과학적이었어요. 영생교를 사람들이 살인종교라고 하는데 그러면 내가 왜 여기 나오겠어요? (조희성 교주는 살인교사 혐의에 대해 2004년 2월 1심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같은 해 5월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범인도피죄가 인정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가 복역 중 2004년 6월 숨졌다.)”
재산 10억까지 모았지만
여러차례 사기당해 날려
자식들은 저마다 착실히 정착
17년째 다닌 영생교에서 안식
탈북민들 어려움·고립 호소
외국 생활 오래할수록
적응 못하고 힘들어한다
그의 30년은 어떤 모습일까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지 않은 탈북민들은 정착금을 날려먹기 일쑤다. 김씨도 지난해 낸 책에서 남한에서 사기당한 이력을 고백했다. 강연료로 적지 않은 돈을 번 그는 탈북 뒤 10여년이 흐른 1990년대 후반 경남 남해 바닷가에 4억5천만원을 들여 기도원을 세웠다. 김신조를 통해 교회를 다니며 ‘귀순자 전도회’에서 활동하던 참이었다. 당시 주로 강연을 다니며 생활했던 김만철씨는 목사와 권사를 고용해 기도원을 운영했는데, 어느 날 이 목사가 아들의 필리핀 사업에 필요하다며 기도원을 담보로 돈을 빌려달라 청했다. “40일 뒤 돈이 들어오니 바로 갚겠다”던 목사는 은행에서 대출받은 4억원을 들고 필리핀으로 사라졌다. 그는 기도원을 지을 때 고생한 남한의 조카를 위해 소 목장을 열어주려다 다시 사기를 당해 1억6천만원을 날렸다. 지인의 소개로 1억8천만원을 들여 인천의 한 상가를 사들였다 손해를 입기도 했다.
“순진했던” 아버지와 달리 그의 자녀들은 남한에서 ‘착실하게’ 저마다의 삶을 꾸려갔다. 장남 광규(52)씨는 홍익대 미대를 나와 공기업에 입사했고, 장녀 광옥(46)씨는 화물차 기사인 남편과 함께 경기 고양시에 살며 버스 운전사로 일한다. 차남 명일(44)씨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차녀 광숙(43)씨는 서울메트로 직원인 남편과 결혼해 경기 수원에 둥지를 틀었다. 광숙씨 부부는 ‘1호 탈북민 커플’로 통한다. 입국 기자회견 때 “남한에 거지들이 득시글댄다 들었다”고 말했던 막내 광호(41)씨는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해 우주공학을 전공한 뒤 국내로 돌아와 천체물리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일본 여성과 결혼해 지금은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 강사로 일한다. 어린 시절 남한에 정착한 그의 자녀들은 더 이상 북한 말투를 쓰지 않는다.
남한으로 귀순한 김만철씨의 막내아들 광호(당시 11살)군이 입국 사흘째인 1987년 2월11일 서울시내 백화점을 찾아 진열된 인형들을 살펴보고 있다. 광호(41)씨는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해 우주공학을 전공한 뒤 국내로 돌아와 천체물리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한 사람들도 포용해달라”
-지난해 11월 국내 체류 탈북민이 3만명을 넘어섰지만 탈북민 다수는 남한 생활의 어려움과 정서적 고립을 호소합니다.
“최근 탈북 루트는 북한을 나와 외국에서 오래 머물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식이에요. 한데 외국에서 오래 돌다 온 이들일수록 한국에서 적응을 잘 못 하고 겉돌더라고. 더러 사기도 당하고 본인이 사기를 치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지내다 보니 직접 일을 해서 벌어먹어야 하는 이런 환경에 적응을 못하는 거고. 같은 기술자들(직업군)끼리도 잘 못 어울려. 서로 속을 모르니까 도와주려고 하지도 않고. 안타깝지.”
지난해 8월 가족과 함께 탈북한 40대 남성이 인천의 한 빌딩 유리창을 닦다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김만철씨처럼 북한에서 의사였으나 2006년 남한에 온 이후 줄곧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 아내의 병 치료비와 생활비 마련으로 그는 숨지기 전까지 생활고에 내몰렸다.
-통일부가 서울 마곡지구에 ‘남북통합문화센터’를 건립하는 안을 추진했는데, 지역 주민들이 반대했다고 합니다. 탈북민들에 대한 선입견과 차별이 여전한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한 1년 이상 돌아다니며 온 사람은 질 들기(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남한 사람들도 따뜻하게 포용할 줄 알아야 하고.”
1987년 6월 항쟁. 한국 민주주의 체제를 닦은 그 거대한 흐름의 초입에서 김만철의 남한 생활은 시작됐다. 그 격랑의 물꼬를 틀어막으려는 전두환 정권의 개입 속에서 그의 ‘탈북 이후’도 얽혀들었다. 그의 ‘따뜻한 남쪽 나라 생활 30년’은 남한 사람들이 통과해온 ‘민주주의의 진전과 퇴행’의 시간과 겹친다. 그가 ‘자유의 땅’에서 겪은 시간과 그 시간을 거쳐 도달한 남한 민주주의의 오늘은 같은 모습일까 다른 모습일까.
부천/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