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13차 촛불집회는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주최 쪽인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집회 전날 ‘촛불 혁명 완수 호소문’을 발표할 정도로 참가자 수 감소를 걱정했는데, 함박눈이 내린 영하의 날씨에도 지난 주말 촛불집회(주최 쪽 추산 13만명)를 웃도는 32만명(주최 쪽 추산)이 모였다. 지난 19일 법원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위기감을 느낀 시민이 대거 모인 것으로 보인다. 단순 정권교체를 넘어, 재벌개혁으로 상징되는 근본 사회개혁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날 저녁 서울 종로구 종각 삼성타워 앞에선 이 부회장 구속 퍼포먼스가 열렸다. 그의 얼굴 가면을 쓴 연기자가 수갑을 찬 채 삼성타워 앞에서부터 걸어 보신각사거리에 있는 가짜 감옥 안으로 들어가는 퍼포먼스였는데, 실제로 이 부회장이 구속되는 장면인 것처럼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한동안 연기자가 철창으로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은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다소 긴장이 풀렸던 광장을 다시 달구고 있다. 가족과 함께 나온 전보흔(53)씨는 “가장 큰 문제는 재벌이다. 특권을 너무 많이 누린다. 사람들이 불평등, 불공정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에 광장에 나오는 것”이라며 “근본적으로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 박 대통령만 탄핵되면 그냥 권력만 교체되는 것이다. 재벌 문제 해결 못하는 정권교체는 아무 의미 없다.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나온 김창호(48)씨도 “박 대통령 탄핵되고 나서는 띄엄띄엄 나왔다. 그런데 이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되는 것 보고 ‘안되겠다’ 싶어 나왔다”며 “이미 국민들 요구는 단순히 박근혜 퇴진을 넘어섰다. 이번 기회에 잘못된 사회 자체를 바꿔야지 단순히 대통령 쫓아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두 딸과 함께 나온 유지연(39)씨는 “구속영장은 법원이 판단하는 것이니 이해해보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더라. 삼성 총수라 구속이 안 됐다는 생각 말고 다른 방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검이 안쓰럽다. 힘 보태주려고 나왔다”며 “이번 기회가 정경유착을 뿌리 뽑는 큰 본보기가 됐으면 하는데, ‘역시나’가 될까봐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사는 황윤규(43)씨는 가족과 함께 인근 호텔에 방을 잡고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광장에서 들리는 이야기 중 공감이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있다. 제일 공감되는 부분은 정경유착 깨고 재벌개혁 하자는 것”이라며 “우리들은 불평등·불공정에 찌들어 살았던 세대다. 우리 아이에게까지 그런 세상을 넘겨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친구와 함께 나온 김나영(24)씨는 “마음에 빚이 쌓이는 것 같아 처음 나왔다”며 “이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이 너무 어이없었다. 일반인이라면 가능했겠나. 정부는 물론, 판사도 못 믿겠다”고 말했다. 친구와 나온 주익섭(51)씨는 “대통령 탄핵시켜도 이 부회장 구속영장은 기각된다. ‘나라 위에 삼성 있구나’ 싶어 화가 났다”며 “사법부가 어려운 법리 뒤에 숨어 이중잣대를 들이댄다”고 비판했다.
행진경로도 바뀌었다. 저녁 7시30분부터 시작된 행진은 청와대가 있는 청운동 방향, 헌법재판소가 있는 안국역 방향, 재벌 기업들의 사옥이 있는 도심 방향 세 군데로 나눠 진행됐다. 많은 시민들은 도심 방향 행진을 하며 종로 에스케이(SK) 본사, 종각 삼성타워, 명동 롯데호텔 앞에서 재벌 총수 구속과 처벌을 요구했다.
지역에서도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광장을 채웠다. 제주시청 앞에선 집회가 시작되자 “재벌도 공범이다. 이재용을 구속하라”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대형 스크린에는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서울구치소에서 걸어 나오는 이 부회장의 모습이 나왔다.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법원을 비판하기 위해 이 부회장이 수감된 모습을 표현한 설치물을 끌고 광주지법까지 행진했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는 이날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맞불집회’를 열고 ‘영장기각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125만명(주최 쪽 추산)이 모였다는 이 집회엔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도 참석해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조의연 판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헌법재판관들은 조작된 증거가 아니라 법과 진짜 증거에 따라 판결해 사법부의 권위를 지켜줄 것으로 믿는다”고 발언했다. 큰 박수가 쏟아졌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좌파들이 조 판사 신상을 터니까 겁이 나서 조윤선과 김기춘을 구속했다. 세계적 기업 삼성(의 이 부회장)을 마구 구속하려고 안달이 났는데, 경제보다 정의가 중요하다는데 웃긴 이야기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박수지 허승 기자, 광주 제주/정대하 허호준 기자
suj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