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충북 청원의 한 한센병 환자 정착촌에서 병력자 문아무개씨(맨 오른쪽)가 마디가 짧아진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취재진과 이야기하고 있다. 청원/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환자아닌 환자’대물림
①정착촌에 갖힌 2세들
②거리의 재가 환자들
③다 말하지 못한 역사
④차별과 편견을 넘어 전북 익산 ㄱ농원에 사는 정광수(56·이하 모두 가명)씨는 한센병 ‘미감아’다. 미감아는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정부가 한센병 환자의 자식들을 관리하기 위해 붙인 용어다. 정부는 정씨가 열살이 되자, 그를 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대구의 한 고아원에 수용했다. 열아홉이 될 때까지 그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감염 위험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미감아’라는 꼬리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업보 대물림은 피하려…”
사회 나서지만 곳곳 냉대
차별에 쫓겨 정착촌으로
정씨는 “평생 막노동으로 전국을 떠돌았다”며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정착촌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987년, 30여년 동안의 방황을 끝내고 정착촌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들에게 업보를 대물림하기는 싫었지만 도리가 없었다”며 “벌어둔 재산도 없어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중학교밖에 못 보냈다”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센병 2세들은 환자가 아니지만 ‘미감아’, ‘문둥이 자식’으로 불리며 환자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평생을 살아간다. 현재 전국에 흩어져 있는 88개 정착촌에는 정씨와 비슷한 처지의 한센병 2세 1만여명이 그들의 부모인 한센병 1세대(5873명)와 함께 살고 있다. 전북 김제 ㅅ정착촌의 김성환(42)씨도 한센병 2세다. 김씨는 정착촌에 만들어진 ‘미감아 학교’를 졸업했다. 이웃 주민들은 “우리 아이에게 병이 옮을지 모른다”며 김씨의 입학을 거부했다. 중학교는 일반 중학교에 가까스로 입학할 수 있었지만 정착촌 아이들끼리만 근처 공동묘지에 따로 모여 도시락을 먹어야 할 정도로 따돌림이 심했다. 김씨는 “따돌림이 지긋지긋해 고등학교는 버스로 2시간이나 걸리는 군산으로 나갔다”며 “그때 ‘씹던 껌도 돌려가며 씹을 정도’였던 친한 친구들 가운데 한센병에 걸린 사람은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2세들에 대한 차별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아이 걸음으로 10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초등학교가 널려있지만, 정부는 정착촌에 분교를 만들어 ‘미감아’들을 따로 수용했다. 예전에는 제법 규모가 큰 정착촌에는 어김없이 ‘미감아 학교’가 있었지만 입학생이 줄면서 하나둘 사라졌고, 지금은 남양주·진주·경주·나주·익산·김제 등 6곳에 미감아 학교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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