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가 18일 26일의 조사를 끝내고 54쪽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내놨지만, 의혹을 모두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알려진 해당 컴퓨터를 조사하지 못한 한계와 함께 대법원 양형위원회 이규진 상임위원에게 사실상 책임을 떠넘긴 ‘반쪽짜리 결과’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의혹의 핵심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였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판사들을 뒷조사해 작성한,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파일이 존재한다는 의혹만으로도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올 사안이었다. 실제 지난 2월 행정처 발령 이후 사직서를 제출하며 이번 사태의 단초를 제공했던 이아무개 판사는 “이 상임위원 한테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파일이 있다. 거기에 판사들 뒷조사한 파일이 나올 텐데 놀라지 말라’고 들었다”고 조사위에 진술했다. 다른 이도 아닌 현직 판사가 매우 구체적인 내용의 진술을 한 만큼, 이를 확인해 보는 것은 조사의 기본이자 상식이다.
하지만 조사위는 “법원행정처장에게 해당 컴퓨터 조사를 요청했으나 보안유지가 필요한 문서가 다수 있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답변했기 때문에 강제로 확보할 근거나 방법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미 많은 판사들이 ‘소유자인 행정처가 컴퓨터를 제출하면, 보안문서라고 하더라도 해당 컴퓨터를 관리했던 판사가 옆에서 열람에 하나하나 동의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지만, 조사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법원행정처가 제출한 두 건의 동향파악 문서와 행정처 관계자들의 진술만으로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 사건이 불거진 뒤 해당 컴퓨터를 사용하던 김아무개 심의관이 ‘블랙리스트 파일’을 삭제하고, 후임 판사에게 ‘깡통 컴퓨터’를 건넸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보고서에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조사 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조사위의 꼬리 자르기식 조사도 문제로 지적된다. 조사 결과를 보면,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부당한 압박을 행사한 직접 주체로 거론된 이는 이 상임위원 한 명이다. 하지만 법원행정처 조직 구조상 이 상임위원이 ‘윗선’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해 행동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조사위 결과에서도 이 판사가 법원행정처 차장이 주재하는 실장회의와 법원행정처장(고영한 대법관)이 주재하는 주례회의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해 조처가 필요하다’고 보고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조사위는 고 대법관과 양승태 대법원장에 대해선 서면조사만으로 조사를 끝냈다. 이들이 이 판사에게 이런 내용을 보고받은 전후에 어떤 지시를 했는지 등도 규명대상이지만, 조사보고서는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이번 조사보고서 곳곳에는 “법원행정처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표현만 여러 차례 등장한다. 법원행정처 주도로 연구회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정작 책임자는 밝히지 않은 반쪽짜리 조사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미 법원을 떠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과 이 상임위원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서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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